본문 바로가기
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21장④_예수님의 권위를 두고 말하다

by 적아소심 2023. 12. 22.

마태복음 21:23-32

 

예수의 권위를 두고 말하다(11:27-33; 20:1-8)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마가복음 11:27-33 누가복음 20:1-8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두 아들의 비유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 * * * * * * * -----------

제임스 티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다 (James Tissot(1836–1902), The Pharisees Question Jesus, between 1886 and 1894, Brooklyn Museum)

 

제임스 티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오다 (James Tisso, The Pharisees and the Saduccees come to tempt Jesus)

 

제임스 티소, 대제사장들이 예수님께 누구의 권위로 일하는지 묻다 (James Tisso, The Priests ask Jesus by Whose Authority He acts.)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올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 저주를 통해서 열매 없는 삶의 결과와 믿음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신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가르치시다가 그곳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23a).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오늘이 두 번째 날이고, 마가복음에서는 세 번째 날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거니시다가 대제사장 등을 만났다고 했고(11:27), 누가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시다가 만났다고 하였습니다(20:1). 어째든 그 전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심의 조사단 성격의 팀이 예수님께 접근을 했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몸통(?)이 등장하게 되는 셈이지요.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크게 당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들의 권위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에는 주로 신학적인 입장에서 조사를 했다면, 이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직접 산헤드린 공회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황은 마태복음 9~12장에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일어난 것과 비슷하지만, 이전에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면, 지금은 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도전하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16:21에서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예언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 사역 내내 예수님을 반대했던 바리새인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힐난하며 묻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3b)"

 

예수님에게 제기된 질문의 목적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절대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왔다고 주장하면 신성 모독죄로 고발할 수 있고, 당신 스스로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조롱하며 사정없이 비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24-25b)?”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화법은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방법입니다. 보통 질문에 답변한 후에 상대방에게 반대 질문을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질문에 질문으로 답변하신 이유는 대제사장들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함정이었고, 이미 이후의 전체 스토리를 모두 알고 계시고, 특히 그 결말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질문에 새로운 질문을 제시하신 것은 그들의 숨은 의도를 드러내고, 대화의 범위를 크게 키우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그 대화에 몰입하게 하는 동력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전지(全知)하신 분이나 전지적 작가의 관점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쓰는 대화법인 것이지요.

 

지금까지 세례 요한이나 그가 어떤 사역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의 운명이 예수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등 단편적으로만 기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 성전 당국이 세례 요한과 그의 인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을 언급하셨는데, 특히 세례 요한이 예수님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선지자로 여겨졌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 당신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신 것이지요. 대제사장들의 질문이 이중적 목적을 지닌 교묘한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질문은 삼중적 목적의 고차원적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세례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에게도 같은 권위를 인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권위가 사람에게서만 왔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계속 공격할 수 있지만 세례 요한의 큰 인기로 인해 많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은 당시 선지자로 널리 인정받던 바로 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던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1:32-36).

 

예수님의 질문은 성전 당국자(종교 지도자)들이 결국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라는 유일한 답변을 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하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복음서의 청중인 우리는 이를 예수님의 통쾌한 승리로 읽게 됩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는 성전 당국자들을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권위는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볼 수 있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말을 들어도 결코 알아볼 수 없습니다.

 

결국 청중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하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결국 대제사장들과의 논쟁을 통해 당신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또한 그러한 권위는 삼위일체 성자 하나님의 본래적, 내재적 존재로부터 나오는 권위였습니다권위(權威)는 제도나 이념 또는 인격이나 지위 등이 그 가치의 우위성을 공인해 주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부여한 능력이나 위신을 말합니다. 권위는 자신이 주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권세나 권위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에서 나온 말입니다.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에크(ἐκ)와 에이미(εμί)의 합성어입니다. (ἐξουσία = ἐκ + εμί) 에크(ἐκ)는 영어의 from(~로부터)의 의미이고, 에이미(εμί)to be(~이다) , '존재하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권위는 외부에서 오기보다는 내부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권위'와 '권위적'이라는 말은 구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당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만 이스라엘과 이방까지 전역을 돌아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제자들과 백성들은 놀랍게 반응했습니다.

 

막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And they were astonished at his teaching, his for he was for teaching them as one having authority (exousian | ἐξουσίαν), and not as their scribes.]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권위는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재하시고, 그분의 말씀과 방향을 따라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상과 구별된 삶이 되고, 삶에서의 영성은 자연스럽게 영적 권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거룩한 삶에서 영적 권위가 나옵니다. 지위나 직분으로 상대방보다 우위를 점하여 대접받고 인정받으려 한다면 이는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로 주님께서 무척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엑수시아는 "위임된 권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권한을 의미하며, 성도들이 믿음(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의 인도를 받는 범위 내에서 행동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마태복음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authority; exousia / ἐξουσία)를 내게 주셨으니" [And Jesus came and spoke to them, saying, “All authority (exousia / ἐξουσία) in heaven and on earth has been given to me.]

 

한편으로, 우리에게 주신 이 권세(권위)는 내 안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는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이요, 또한 선물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권위를 가지게 되고, 또한 그 권위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권위는 우리 스스로의 성찰과 영성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권위가 함께 드러나게 되는 것인데요, 서로 상호연관성을 가질 때 온전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삶과 하나님의 말씀이 따로 다르다면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과 성품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2:23 참조).

 

오늘 다시 한번 빌립보서 2:5-8 말씀을 기억하고 제 마음을 그 말씀에 붙들어 맵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권리보다는 철저하게 순종의 길을 가셨던 주님의 그 마음이 제 마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그 마음을 내 마음에 날마다 새기고 또 새겨서, 그 마음대로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으로 무엇을 하든지 거리낌이 없고 자유하여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 나라 안에 있게 하여 주시길 소망합니다.

 

안드레이 미로노프, 두 아들 비유 [Andrei Mironov(1975~ ), Parable of the Two Sons, 2012.]

 

게오르그 펜츠(독일), 포도원에 있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 <그리스도 이야기>, 1534-1535년 (Georg Pencz(German), The Parable of the Father and His Two Sons in the Vineyard, from The Story of Christ, 1534&ndash;35)

 

28-32절 본문에서, 헬라어 원문성경 및 영어성경과 달리 우리말 성경에서는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바뀌어서 나오는데 그렇게 번역한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가 둘째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원문 성경과 영어 성경에서는 큰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원문을 따라서 말하자면 처음에 라고 대답하고 가지 않은 둘째 아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말하고, 처음에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나중에 후회하고 간 큰아들은 창기와 세리를 의미합니다.

 

특히 31절 말씀은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본문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그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천국을 들어같 수 있는 데 다만 세리와 창기들보다는 늦게 들어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 들어가리라'로 번역된 프로아구신(προάγουσιν)'은 '프로아고(προάγω)'의 현재형으로 본문에서는 '길을 인도하다, 먼저 간다'는 의미의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 '프로아고'는 '길을 인도하다, 먼저 들어간다'는 뜻이므로, 본문은 순서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적 순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와 못 들어갈 자에 대한 것입니다. 18 9-14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있어서도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란 비교법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는 표현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현재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세리와 함께 창기뿐임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도 희망은 있습니다. '프로아구신(προάγουσιν)'은 문자 그대로, 길을 인도한다 또는 먼저 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 단어를 선택하신 것은 현재는 창기와 세리가 천국에 가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뒤에서 따라갈 시간이 아직 남아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멸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보다 앞섰지만, 그들에 대한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2절은 권위의 논쟁과 두 아들 비유의 결론으로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의의 도(ἐν δδικαιοσύνης; in the way of the righteousness)'로 연결지어 말씀하십니다. '()의 도()'라는 말이 무척 형이상학적으로 들리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례 요한이 의의 길로 왔으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두 아들의 비유처럼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처음부터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아직 닫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회개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밖에서 우리가 누리는 삶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며칠 후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다시 오실 때에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고 종말론적인 소망이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에 살게 됩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잠시의 고난을 참을 수 있고, 또한 고난 중에서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의'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정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면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 주장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해 순례의 길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오늘도 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허리와 가슴을 펴고, 눈은 15도 위를 쳐다보고 세상을 좀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