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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22장➀_혼인 잔치 비유

by 적아소심 2024. 1. 18.

마태복음 22:1-14

혼인 잔치 비유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큰 잔치 비유 (눅14:15-24)
15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안드레이 미로노프, 2014, 혼인예식의 비유 <Andrey Mironov, 2014, Parable of the Wedding>

마태복음에서 혼인 잔치 비유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답하는 세 가지 비유 중 세 번째 비유입니다(마 21:23-27). 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응답을 대조합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사람은 세리와 죄인입니다. 이들은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및 장로 등 종교 지도자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갑니다. 포도원 소작 농부의 비유(마 21:33~45)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포도원 주인의 부름에 제대로 부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부름에 응하지 않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본문에서의 세 번째 비유는 천국을 왕의 신하들이 초대받는 혼인 잔치에 비유합니다. 처음 두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두 그룹이 묘사됩니다.

 

이 비유에는 결혼식의 몇 가지 특징이 빠져 있습니다. 혼인식의 주인공인 신부에 대한 언급이 없고, 신랑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를 설명하는 일부 주석가들은 신랑을 예수님(마9:15의 말씀에 근거하여)으로 가정하고 신부를 교회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부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해석은 너무 확대된 것으로 보입니다. 언급되지 않은 신부를 비유에 끼워서 맞추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보통 구약의 유대인을 대체하는 새 언약의 이방인 교회가 하객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 비유에서 의도하신 바가 아닙니다. 요점은 신랑과 신부의 결혼이 아니라 혼인 잔치에 입장하라는 왕의 초대입니다.

 

왕이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것(22:1-10)이 주요 배경으로, 혼인 잔치는 상속자인 아들에게 중요한 예식인데, 이런 종류의 연회는 왕국 전체의 중요한 행사로 진행됩니다. 과거 왕정 시대에는 왕이 주최하는 결혼식 연회에 불참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으며, 무례하고 반역적인 행위로 쉽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에서 '청한 사람들'은 'τοὺς εκλημένους(투스 에클레메누스)'인데 현재완료 분사형 이태동사(중간태)입니다. 다시 말하며 '이미 이전에 초대장을 보내어 오기로 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those who having been invited" 번역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3절에서 종들을 보낸 것은 두 번째 초대로 이는 동양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에스더 6:14 참조).

 

동양에서는 잔치에 초대할 때 두 번씩이나 종들을 보내 초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첫 번째 초대는 준비할 음식의 양을 결정하고, 두 번째 초대는 사람들에게 연회에 와서 지금 준비된 음식을 먹으라고 요청합니다. 음식이 거의 다 준비되면 종들을 보내 손님들을 연회장에 참석하도록 하였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이런 종류의 연회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그날에 먹지 않으면 버려야 했습니다.

 

3절에서 연회가 시작되려고 할 때, 사전에 오기로 했던 초대 손님들이 오기를 싫어했습니다(3b). 이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기꺼이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아버지를 말에 순종하지 않은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두 번째 초대를 거절한 이 사람들은 무척 무례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초대에 따라 음식이 준비되었기 때문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초대받은 손님이 보여준 기본적인 태도나 소양이 없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처음 왕의 초청에 약속을 한 사람들이 약속을 어기는 것은 왕을 거부하고 반역하는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왕은 혹시 처음 보낸 자기 종들이 잘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너그럽게 생각하고 다른 종들을 보내어 다시 초대합니다. 이는 갑과 을이 완전히 바뀐 모습입니다.

 

4절에서 더욱 정중하게 초청합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여기에서 '오찬'은 '아리스톤(ἄριστον)'으로서 초기 헬라어에서는 일하러 나가기 전 아침 일찍 먹는 '처음 음식(the first food)', 즉 '조반'을 말합니다. 후기 헬라어로 와서 '아리스톤'는 점차 '점심'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신약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눅11:38; 14:12) 반면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저녁 만찬(dinner)'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거의 유일하게 Literal Standard Version에서 "I prepared my early meal"로 번역했습니다!). 본문의 흐름상으로 볼 때 '저녁 만찬'보다는 '조반'이나 '오찬'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초대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 군대를 보내어 진멸하고 동네(도시)를 불사르고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반나절 이상이 걸리기 때문입니다(7-10절 참조). 또한 '아리스톤(ἄριστον)'은 문자적으로 '경계나 지정 없이(without boundary, designation)'의 뜻이 있기 때문에 '결정되지 않고 만찬(저녁 식사) 전에 먹는 식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저녁 만찬으로 데이프논(δεῖπνον)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왕이 초청할 정도의 손님이면 대부분 고관대작이거나 각 분야의 유명 인물일 것입니다. 또한 그들도 자기의 바쁜 스케줄이 있어서 왕은 일찍 시작하는 조찬이나 오찬 정도에 초대하여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보낸 종들의 초청에도 손님들은 초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일부는 자기 밭이나 사업장으로 가버립니다. 5절에서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는 영어로는 "But they paid no attention"입니다. 헬라어로는 '아멜레산테스(ἀμελήσαντες | 분사형, 부정과거, 능동태)로 '무관심하다', '부주의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의 부주의한 태도를 나타내는 단어(ἀμελέω)는 신약성경에 네 번 등장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예레미야서에서 결혼 은유를 사용하는 두 가지 문맥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헬라어 70인역 성경(LXX)에서는 렘4:17("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서 '거역했다'로 쓰였는데, 이는 히브리어 '마라따(מָרָ֖תָה)'(기본형: 마라/מָרָה)에서 번역한 것으로 '대적하거나 반항하는'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 남은 사람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6). 이 정도면 왕의 호의를 완전히 개무시하고 완전히 반항하며 척지는 모습입니다.

 

이에 왕은 더 이상 참지 않고 극적으로 대응합니다. 만찬이 차려지는 동안 왕은 군대를 보내어 그들의 도시를 멸망시켰습니다(7). 왕의 대응은 과장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 왕은 손님들을 연회에 초청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손님들의 무례함도 너그럽게 생각하고 인내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초청받은 사람들이 초청을 거부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보내었던 종들까지 모욕하고 죽이자, 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도시(우리말 성경에서는 '동네'라고 읽고 있습니다)를 불태우라고 명령합니다(7).

 

왕이 초청했던 손님들은 더 이상 합당하지(worthy) 않게 되었습니다(8). 악한 포도원 소작농부의 비유(21:33-41)에서처럼 원래 손님은 종교 지도자이고, 이후에 대체된 손님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원래 손님이 새로운 손님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음식이 준비된 후, 왕은 원래의 손님들을 포기하고,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다른 사람들로 교체합니다(8-10). 그러나 왕은 딜레마에 직면하게 됩니다. 왕은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은 들어갈 자격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다시 종들을 보내 혼인 잔치를 채울 만한 사람을 모으라고 지시합니다(9-10).

 

대체된 손님은 원래 초대받았을 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유에 나오는 왕국의 '외부인'입니다. 9a절의 '네거리 길에 가서'는 헬라어로 'ἐπὶ τὰς διεξόδους τῶν ὁ δῶν(에피 타스 디엑소두스 톤 호 돈)'인데 여기서 '디엑소두스(διέξοδος)'는 도로가 끝나는 가장자리, 즉 도시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출구나 입구 쪽의 가장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왕궁으로 향하는 출입구 쪽이므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한 70인역 성경(LXX)에서는 땅의 경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예: 민34:4). 따라서 왕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사회의 변두리에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외부인입니다.

 

이 두 번째 초대는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전 세계로 선교가 이루어지는 우화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21장에서의 두 비유(두 아들 비유와 포도원 소작농부의 비유)와 일치한다면, 대체된 손님들은 현재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이미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유대 사회의 변두리에 사는 세리, 창녀 및 기타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이 베푼 잔치를 ‘가득 채웠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드디어 수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이제 10절에서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라는 구절에서 '손님'은 '아나케이메논(ἀνακειμένων)'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는 '비스듬히 눕다(ἀνάκειμαι)'의 현재 분사형(이태동사) 동사입니다. 즉, 손님들의 지금 비스듬히 누워 식사하고 있는 식사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스듬히 누워 식사하는 사람들이 홀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 비유에서 원래의 손님(종교 지도자들)이 새로운 손님(예수님을 따르는 자)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제자)들이 모두 연회에 남아있을까요? 이 비유에는 이 문제를 다루는 다음 장면에 있습니다.

피터 에어센(네덜란드, 1508-1575), 북부 매너리즘 스타일의 "혼인 잔치의 비유" <Pieter Aertsen(Dutch; 1508-1575), The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in the style of Northern Mannerism>
영국 볼튼의 보위어 성경에 나오는 "대연회 초대"를 그린 얀 루이켄의 에칭 작품 <An etching by Jan Luyken illustrating invitation to the great banquet in the Bowyer Bible, Bolton, England>

본격적으로 손님들을 초청하기 시작하지만 손님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초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위 그림에서는 문틈 뒤에 숨어서 거절하는 장면을 듣고 있습니다. 잠깐의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로 무엇이 그토록 바빴을까요?

코넬리스 드루크슬루트(1630-1673), 만찬의 비유, 보우즈 박물관 <Cornelis Droochsloot (1630-1673), The Parable of the Great Supper, The Bowes Museum>

초청받은 손님들의 거절뿐 아니라 반역의 모습까지 보이자, 왕은 그들의 도시(동네)를 불사르고 종들에게 만나는 사람대로 초청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제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도 잔치에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브런즈윅 모노그라미스트(1525-1545?), "대연회의 비유", 1525년경 <Brunswick Monogrammist, Parable of the Great Banquet, c.1525> (cf. 브런즈윅 모노그램주의자 또는 브런즈윅 모노그램의 거장은 16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익명의 네덜란드 화가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장면뿐만 아니라 사창가와 선술집 장면 등 세속적인 유희를 그린 여러 장면을 그렸으며, Pieter Bruegel the Elder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젠 베르낭, "잔치에의 초대", 1899, 스위스 빈터투어 미술관 (전체 그림) <Eugene Burnand, detail of 'Invitation to the Feast' (1899), oil on canvas, 470x220 cm, Kunstmuseum Winterthur, Switzerland (full painting)>
유젠 베르낭, "잔치에의 초대", 1899, 세부 그림 <Eugene Burnand, detail of 'Invitation to the Feast', 1899>
유젠 베르낭, "잔치에의 초대", 1899, 세부 그림 <Eugene Burnand, detail of 'Invitation to the Feast', 1899>

마태는 임금의 명령을 사거리 길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데리고 오라는 것으로 기록하였지만, 본문의 비유와 버슷한 비유를 기록한 누가는 잔치를 배설한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14:21).

우리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기대어 식사하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의자가 비스듬한 침대처럼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의 그림은 천 마디를 말하기도 합니다. 위 그림은 유대인 예수 미술관(Jewish Jesus Art)에 전시된 로드 보르게세(Rod Borghese)라는 작가가 그린 유대인 식사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의 모습 <출처: pinterest.com>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이 식사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 누가복음 36-37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When one of the Pharisees invited Jesus to have dinner with him, he went to the Pharisee’s house and reclined at the table.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a Pharisee invited him to eat with him; so he went in and reclined at the table.)
  • 누가복음 22: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When the hour came, Jesus and his apostles reclined at the table.) - 예수님 십자가 직전의 마지막 만찬

 

사람들은 이제 연회가 모두 준비된 식탁을 중심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왕의 등장과 함께 잔치 연회 개최선언이나 축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제 잔치에 사람들이 가득 차서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될 때 왕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접속사가 없지만 헬라어에는 δέ(데)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but, and, now'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는 앞뒤 문장이 계속 이어지거나, 반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데요, 지금부터 왕이 등장하여 왕 중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보통 고대 근동의 잔치에 었어서 잔치 주최자는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잔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나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죠.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서도 손님들이 모두 오고, 음식이 세팅된 후에 대통령이 입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서는 왕이 등장하여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잔치가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천국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점에 심판의 때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현재도 천국 잔치가 벌어져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본격적인 천국 잔치는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들어와 잔치를 시작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잔치에 맞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 관습에 의하면 손님은 혼주가 미리 나누어준 예복을 입습니다. 지금은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손등에 표식을 붙여주어 식사를 통제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왕도 분명히 손님들에게 잔치에 합당한 옷을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참조, 창45:22; 삿14:12). 그러나 한 사람이 이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이는 잔치의 주최자에 대한 무례이며 불성실 태도입니다. 왕의 잔치 석상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복선을 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때에 필요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갈3:27).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란 육신적인 삶, 곧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대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갈5:22-24; 계19:8).

영국 볼튼에 있는 보위어 성서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를 그린 얀 루이켄의 에칭 작품 <An etching by Jan Luyken illustrating the man without a wedding garment in the Bowyer Bible, Bolton, England>
작가: 유럽 학파(17세기), 혼인 잔치의 비유(마태복음 22장). 파리의 피에르 마리에트가 출판한 것으로 보이는 17세기 미확인된 성경 인쇄물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Creator-European School (17th century),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Matthew 22). One of an unidentified series of 17th century Bible prints, apparently published by Pierre Mariette, Paris.>
요한 게오르그 플라처, "혼인 잔치의 비유", 1737년 <Johann Georg Platzer, The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1737>
"혼인 잔치의 비유", 플랑드르 화가이자 프랑켄 가문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은 작품을 남긴 프란스 프랑켄 2세(1581-1642)의 작품 <The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Frans Francken II (1581-1642), a Flemish painter and the best-known and most prolific member of the large Francken family of artists.>

왼쪽 풍경에는 왕의 아들이 주최가 되어 연회를 진행하고 있고, 오른쪽 구석에서는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쫓아내는 장면이 보입니다.

프란스 프랑켄 2세(1581-1642), 혼인 잔치의 비유 <Frans Francken II (1581-1642),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빈센트 말로(1602/1606-1644), "초대받지 않은 결혼식 손님", 1631, 브루켄탈 국립 박물관 <Vincent Malo (1602/1606-1644), "The uninvited wedding guest", 1631, Brukenthal National Museum>
베르나르도 스트로치(1581-1644), 혼인 잔치의 비유, 1636년작 <Bernardo Strozzi (1581-1644),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1636>

 

이 비유에서는 잔치 날에 예복을 입은 자에게는 큰 기쁨을 누리는 날이 될 것이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는 큰 슬픔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 대해 왕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왕은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을 향하여 '친구'라고 부릅니다. '친구'로 번역된 '헤타리레(ἑταῖρε)'는 '헤타이로스(ἑταῖρος)'의 호격으로 '친구', '동무(companion)'입니다. 이 '헤타이로스(ἑταῖρος)'는 '동무', '동료'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지만, 문책과 심판의 대상을 지칭할 때도 사용됩니다. 21장에서 포도원 주인이 품꾼 중에 원망하는 자들을 부를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했고(20:13), 예수께서 자신을 배반하기 위해서 오는 가룟 유다를 부르실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마26:50). 따라서 본문의 '친구'라는 호칭도 가룟 유다와 같이 거짓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 안에 기대어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고 자기 맘대로 고집하는 자들이라는 복선을 깔고 한 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우리는 12b에서 "그가 아무 말도 못하였다"고 읽습니다. 헬라어로는 '에피모쎄(ἐφιμώθη)'인데, 이는 '재같로 입을 막다(to close the mouth with a muzzle, to muzzle)'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곧 왕의 질문에 대해, 마치 입에 망을 씌운 소처럼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전 개역한글 우리말 버전으로는 '유구무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왕이 예복을 나누어 주었음에도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최후 심판의 때에 있을 상황과 비슷하게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심판대 앞에 선 불신자들에게 엄한 책망과 함께 그들이 맞이하게 될 미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은 사환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3)".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표현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말로 마태복음에서만 6번이나 나옵니다(8:12; 13:42,50; 22:13; 24:51; 25:30). '슬피 울며'라고 번역된 '호 클라우쓰모스(ὁ κλαυθμὸς)'는 명사형으로 '완전히 절망적인 느낌에서 비롯되는 쓰라린 슬픔' 또는 '통곡, 애곡'을 말합니다. 보통 언어에는 문화가 녹아 들어있는데, 헬라 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참을 수 없는 감정적(심리적) 고통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며 통곡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신약에서는 특히 일반 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반적인 슬픔보다는 종말의 심판에 대한 애통이나 애곡을 표시할 때 사용됩니다(8:12; 13:42; 25:30).

 

또한 '이를 갈 것'이란 표현도 '호 브뤼그모스 톤 호돈톤(ὁ βρυγμὸς τῶν ὀδόντων)', 영어로 'the gnashing of teeth'로 모두 명사형입니다. 이는 짐승이 먹이를 공격할 때 이빨을 갈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나타내는 의성어입니다. 이 명사구 역시 영원한 형벌에 처한 인간의 극심한 괴로움과 완전한 절망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됩니다(8:12; 13:50; 24:51). 이처럼 본문은 죄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극한 괴로움 및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14절에서 예수님께서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원어 성경에는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되지 않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가르(γάρ)'인데 영어에서는 접속사 'for', 'because'로 번역되는데, '왜냐하면'으로 이유를 나타내는 절을 이끌기도 하고, 한편으로 단언적인 진술을 할 때에 사용됩니다. 본문에서는 '진실로' 또는 '그러므로' 정도로 해석될 수 있으며 번역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는 예수님의 결론으로 재판장의 최종 선고와도 같은 확정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초대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택함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자로서 '엄선된 자'를 말합니다. 특히 여기서 '택함'이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깊은 관계성 가운데서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곧 무조건적 은혜로 하나님의 교회에 초청받은 자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아 구원에서 제외될 사람들이 많을 것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란 사실만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자들에게 그들 자신도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실로 충격적인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요?

 

<비유를 통한 묵상의 내용>

다시 한번 비유의 스토리를 가지고 당시 삶의 자리로 가봅시다.

- 왕궁에서 연회 준비하는 모습들...

- 종들을 보내는 왕의 모습...

- 종들이 각 손님들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

- 허탕치고 왕궁으로 돌아가 보고하는 종들의 모습...

- 허탈하면서 어이없지만 이전 종들이 부족해서 그럴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다른 종들을 보내는 왕의 모습...

- 초청하는 종들을 무시하고 나가버리는 손님의 모습...

- 남아 있던 손님들이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는 장면...

- 겨우 살아남아 왕국으로 돌아가 보고하는 종과 이를 듣고 대노하는 왕의 모습...

- 즉시 군대를 소집하여 도시를 쓸어버리라고 명령하는 왕의 모습...

- 불타는 도시의 모습...

- 약간의 자기 것을 지키려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어리석은 손님들의 모습...

- 다른 손님으로 대체되고 있는 모습들...

- 사방에서 연회에 초대를 받고 연회를 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 사람들이 모여있는 연회장 내부의 모습들...

- 이제 시간이 되어서 왕이 들어와 개최선언을 하려고 하는 모습...

- 이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눈에 띄어 지적받는 모습...

-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나는 모습...

 

이 비유를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나의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 삶의 자리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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