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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21장③_무화과나무가 마르다

by 적아소심 2023. 12. 20.

마태복음 21:18-22

 

무화과나무가 마르다(11:12-14, 20-24)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12-14 마가복음 11:20-24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없음) 어떤 사본에,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가 있음

베다니 전경(스케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예루살렘과 베다니 지도 보기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2km(2마일) 미만 떨어진 올리브 산의 남동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사이에는 올리브산(복음서에서는 감람산이라고 함)과 기드론 골짜기가 있어서 그리 멀지 않아도 당시로서는 길이 좀 험하였을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베다니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남매의 고향이자 나병환자 시몬의 고향인 유대의 작은 마을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저녁에는 이곳에서 머무르셨습니다. 이 마을은 여섯 가지 사건과 관련하여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➊ 세례 요한이 베다니에서 세례를 베풀자 바리새인들이 조사와 심문을 함 (요1:19-46)

➋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요11:1-46)

    ▷ 예수께서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요11:54b)

    ▷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요12:1)

➌ 예수께서 베다니 근처에서 시작하여 종려 주일 예루살렘 입성하심 (막11:1, 눅19:29)

    ▷ 예루살렘 입성 후 저녁에는 베다니에서 머무르심 (마21:17, 막11:11-12)

➍ 예수님이 향유 부름을 받으신 한센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 식사하심 (마26:6-13, 막14:3-9, 요12:1-8)

➎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기 전 -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눅24:50)

➏ 예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방문하심 (베다니라는 말은 나오지 않음) (눅10:38-42)

 

베다니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그리운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당시 온갖 고생을 하시면서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니셨던 갈릴리와 유대의 동네들이 얼마나 그리우실까요? 그러기에 더욱 애타고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그리움의 영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떠나보내거나, 떠나온 그 누구를 그리워해 보고, 떠나온 추억의 장소를 그리워해 본 적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발길이 닿았던 광야에서부터 가버나움 자췻집, 노숙하셨던 곳, 특히 가난한 동네이지만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곳 베다니..... 모두 애틋하고 그리운 장소입니다.

베다니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전경: 존 플릿우드 목사의 <우리 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앨버트 헨리 페인(1812-1902)이 판각한 예루살렘 전경 by 알렉시우스 가이어 Jerusalem, engraved by Albert Henry Payne (1812-1902) frontispiece to 'The Life of our Lord Saviour Jesus Christ' by Rev. John Fleetwood by Alexius Geyer

 

본문 말씀은 시간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게 하신 사건의 다음 날 이야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장소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道中)입니다. (21:12-17; 병행구절 참조 - 11:15-19, 19:45-48, 2:13-22)

그런데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의 사건의 배열은 차이가 납니다. 두 병행본문을 종합하여 순서를 도출하면 아래 도표와 같습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21 (1) 예루살렘 입성
(2) 성전을 깨끗게 하심
(3) 베다니로 가심
(1) 아침 일찍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무화과 나무 저주하시고 나무가 곧 말라 죽음
(2) 성전에서 권위에 관한 논쟁
(3) 이후 계속 비유로 말씀하심
 
11 (1) 예루살렘 입성
(2) 성전 둘러만 보심
(3) 베다니로 가심
(1)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무화과 나무 저주하심
(2)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깨끗게 하심
(3) 베다니로 가심
(1)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 제자들이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발견함
(2) 성전에 올라가신 후 권위에 관한 논쟁 등

 

마가는 충실하게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하였는데, 마태는 마치 한 날에 일어난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태가 주제별 사건 편집의 원칙에 따른 것으로 앞서 발생한 성전을 깨끗게 하신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마태는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여 결국 저주받아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의 운명과 당시 종교적 열심은 있으나 실세 경건의 열매, 삶의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대비시킴으로 그들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서로 2개로 되어 있는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그 결과를 전체로 묶어서 성전을 깨끗게 하신 사건 뒤에 배치를 시켜놓은 것입니다. 실로 이러한 상징적이고 예언적인 사건이 보여 주는 바 그대로 이스라엘은 로마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고 성전마저 무너지는 비참한 역사를 겪게 되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너무 배가 고프셨습니다. 어제 저녁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사치들을 쫓아내시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종일 예루살렘 입성 행사에다가 시끄럽고 더럽게 변해버린 성전을 정화하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셨으니 얼마나 배고프고 피곤하셨을까요?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사로잡혀 아마 하루 종일 굶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야 베다니로 내려가셨습니다. 베다니에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가 살고 있었고, 또한 문둥병자 시몬 등이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가난한 동네였지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이 살고 있었기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에는 그곳에서 머무셨습니다. 오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보건대,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보내셨지만, 가난한 동네에서 저녁도 충분히 못 드셨을 것이고,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차마 아침을 달라고 말씀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동네에서 무슨 아침밥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노숙을 하셨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아침을 못 얻어 드신 것 같습니다. 한창 건장한 청년이었던 주님께서 얼마나 배고프셨을까요? 그래서 주님은 더욱 일찍 그곳을 조용히 떠나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의 마지막 십자가 고난주간의 그 짧은 시간에 밥 한 끼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한 우리의 못난 인정(人情), 그리고 밥 한 끼 달라고 하지 못하시는 우리 주님의 그 여린 마음(배려의 마음)이 참으로 우리 마음을 안타깝고 먹먹하게 만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인성(人性)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우리 주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바라시며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러나 잎이 무성함에도 불구하고 열매 즉, 미숙하더라도 먹을 수 있는 어린 열매도 발견하실 수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은 보통 열매가 달린 다음에 나기 때문에 잎이 무성하면 열매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잎사귀밖에" 얻지 못하셨을 때, 의외의 가혹한 저주 (특별히 최후의 심판을 함축하는 영원토록"이란 말을 사용하신 것을 주목하십시오)를 하시자, 무화과나무의 잎이 즉시 말라버린 사건은 잎의 마름이라는 눈에 보이는 기적을 넘어서 열매 맺지 못함이 극히 중대한 일임을 지적하는 예언적 상징적 표징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 기간 굶으시며 배고픈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처음 공생애 기간 40주야를 금식하기도 하셨고,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배고픈 상황에서도 바로 기적을 일으키시기보다는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기도 하셨습니다. 전도 여행을 다니실 때에는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배고픔에 무척 익숙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다우시지 않게 유난히 오늘따라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심하게 저주하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자 "(παραχρμα; 파라크레마 immediately, presently, once) 다시 말하면 바로 즉시시틀어 죽었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그만큼 뭔가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과 우리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일까요?

 

열매(καρπς; 카르포스)”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 즉 신자(가지)가 그리스도(포도나무)와 연합하는 사는 것으로부터 오는 열매를 말합니다.

 

  • 요15:1-2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이스라엘은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여 언제라도 도끼로 잘려 넘어질 위기에 처한 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심각한 영적 무지와 교만에 빠져 자신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自行自止)하였습니다.

 

  •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 마8:10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마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 마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 마23:1-3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심, 마23:37-39 이스라엘의 종말을 예언하심

위 구절을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의 열매 없음의 심각성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님의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행동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결국 이 예언적 징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무화과나무 잎사귀의 무성함과 같은 외적인 표징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의 마름은 심판을 나타내는 종말론적 선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마름은 장차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으로 구현될 것입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잎이 마른 무화과나무
얀 루이켄, 그리스도와 무화과나무의 표적 (Jan Luyken, Christ and the sign of the fig tree, Dutch, 1649 - 1712, Pieter Mortier, 1700)
얀 루이켄(1649-1712), 예수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다, 1712 (Jan Luyken(1649&ndash;1712), Christ curses the fig tree. 1712. Rijksmuseum, Amsterdam, Netherlands)
알렉산더 비다, 예수님과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 동판화, 1873년 (Alexandre Bida, Jesus Christ and the fruitless leafy tree, Etching, 1873)
제임스 티소, 예수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다, 수채화, 1890년도 (James Tissot, Jesus curses the Fig Tree, c.1890, Brooklyn Museum, New York)
제임스 티소, 포도원 주인과 무화과나무 (James Tissot (French, 1836-1902). The Vine Dresser and the Fig Tree, 1886-1894. Brooklyn Museum, New York)

 

그렇다면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열매 맺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선포의 메시지로 일갈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했으며, 또한 영원히 그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의 선포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의 길에 오른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삶,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또한 그 나라를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해서 배우기도 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성찰합니다. 또한 그러한 삶을 공동체적으로도 함께하고, 그것을 사회로도 확장해 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자유함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함,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로 응답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열매 맺는 삶이란, 우리가 성령님의 은혜 안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평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날마다 확인하며 시간의 순례를 가는 것입니다.

 

  • 요15:5-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 딛3: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 벧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20절에서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하였는데, 헬라어로 θαύμασαν(에싸우마싼) (기본형 θαυμάζω; 에싸우마조)매우 놀랐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무화과나무가 어찌 그렇게 빨리 말랐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무화과나무의 즉시 마름에 대한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기적의 능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이라고 시작하는데, 원어에서는 ἐὰν χητε πίστιν καμδιακριθτε (에안 에케테 피스틴 카이 메 디아크리쎄테)입니다. ἐὰν(에안)은 조건 불변사로 조건문을 이끕니다. If ye have faith, and doubt not, ’너희가 (믿음이) 있고'로 번역된 χητε(에케테)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서 믿음의 지속적 소유를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ἐὰν(에안)이라는 조건을 나타내는 접속사와 결합하여 미래 조건적 성격을 가집니다. 따라서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을 원어에서 직역하면 너희가 앞으로도 항상 믿음을 소유한다면이 됩니다.

 

한편 의심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διακριθτε(디아크리쎄테)'διακρίνω(디아크리노)‘의 가정법 과거 수동태입니다. διακρίνω(디아크리노)δια(디아; 철저히 앞뒤로)κρίνω(크리노: "판단하다")의 합성어로, “철저히 조사(판단)하다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긍정적으로) 면밀한 추론(구별, 차별)을 의미하거나 (부정적으로) 지나친 판단(너무 멀리 나가서 흔들리는 경우)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디아크리노는 객관적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판단으로 너무 앞서가서 흔들리는 상황으로 의심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대신에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너무 앞서가서 마음이 흔들리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ἔχητε(에케테)”는 가정법 현재인 반면에 διακριθτε(디아크리쎄테)'는 일시적 동작을 나타내는 가정법 과거라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습니다. , 믿음은 지속적으로 소유해야 하지만 의심은 과거의 어느 짧은 순간이나 시점에서 마음 속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의심을 이기기 위해서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항상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21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변형산에서 내려오실 때,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헤매는 것을 보시고 하신 말씀과 유사합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17:20). 이 말씀은 직접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더 생생하게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산이 옮겨지는 것과 같은 단순한 물리적 기적은 그 자체로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기도의 제목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러한 물리적인 하늘로부터의 기적은 우리의 실제적인 기도 제목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일지라도 우리가 그러한 믿음으로 구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시겠다는 의지를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제자들은 즉각적이면서 단번에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리는 사건을 보고 너무 놀라 예수님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20).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그분의 신성한 능력을 행사하셔서) 어떤 방법으로 나무를 시들게 하셨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들과 비슷하고 더 큰 기적을 행할 수 있는지(14:12), 또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17:20), 즉 그들의 모든 기도에 대한 응답을 얻는 믿음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원어에서 말하는 믿음(πίστις; 피스티스)는 원래 "설득하다, 설득당하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는데, 믿는 자에게 있어서 피스티스(믿음)"하나님의 신성한 설득"이며, 따라서 인간의 믿음(신뢰)과는 구별되지만 그것을 포함합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지속적으로 믿음을 주셔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즉 그분의 뜻에 대한 설득을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요일 5:4). 피스티스는 세속적 고전에서는 보증(보증)을 의미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증명하는 하나님의 보증을 말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핵심 의미(신성한 설득)를 제공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영접하고 순종하는 신자 안에서 나타내시고 계시의 성취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보증입니다(요일 5:4 및 히 11:1 참조).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는다면우리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으로 보증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 기도가 남용되거나 허황하게 남용되는 것이 방지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사건(마태복음 8:33 참조)은 자연적인 근거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의지를 행사하신 기적적인 결과, 즉 복음에서 궁극적으로 묘사하는 그리스도의 속성과 일치하는 개념으로만 설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기적의 목적은 애매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단순히 기적적인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언적이고 상징적이며 가시적인 형태로 심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저주사건과 기도에 대해 연결을 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본문의 내용은 순수한 믿옴의 눙력을 강조한 21절의 말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앞에 정관사가 붙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기도를 가리킵니다. 바른 기도를 지속적으로 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핵심은 열매 맺는 삶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열매 맺는 삶을 사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충분히 배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배운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운 대로가 아닌 익숙한 대로 살아갑니다. 왜냐면 그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배운 대로 사는 것에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길입니다. 순종하는 것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순간순간의 자기 잔재미, 소소한 즐거움을 포기해야 합니다. 새벽잠을 깨워야 합니다. 여유시간에 헛생각 하거나 게임하거나 유튜브를 보기보다 기도하며 말씀을 읽거나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이 나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손발로 적용되도록 곱씹고 그것이 삶으로 살아지도록 마음을 주님께 성령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명제보다는 사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도록 내 마음과 몸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먼저 되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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