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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21장①_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

by 적아소심 2023. 10. 7.

마태복음 21:1-11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 (슥9:9-13; 막11:1-11; 눅19:28-38; 요12:12-19)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길 옆으로 깊은 계곡이 있음)
여리고 평지, H.A.Harper, 1884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H.A.Harper, 1884년
James Tissot(1836–1902), With Passover Approaching, Jesus Goes Up to Jerusalem, between 1886 and 1894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삭개오와의 교제를 가지셨고, 또한 두 맹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고된 여정을 가지셨습니다. 유월절 기간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가겠습니까? 아마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위 그림에서 예수님은 그 험한 길을 걸으시다가 바위를 자리 삼아 앉으셔서 잠시 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도 태어나 가난과 아픔을 경험하시고,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통을 감수하시며 우리 인생들의 죄와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아픈 상처와 고통을 아시며 동정(체휼)하시며 그 보혈의 피로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절 상반절의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멀고 험한 여정의 길을 가신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직선거리는 18마일(28km), 차량도로 거리는 35km입니다. 여리고가 사해(Dead Sea) 근처에 있어 해발 250m 정도이고, 예루살렘은 약 790m 정도이기 때문에 여리고에서 예루살람까지의 고도가 1.000m가 넘는 험한 길입니다. 2019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그 길을 한나절 걸어보았는데, 길이 험하여 계곡 일부만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무리 일행과 더불어 그 길을 가시려면 하루 정도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시면서 식사도 하셔야 하고, 말씀으로 제자들 가르치시기도 하시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좁은 계곡을 올라가는 여정에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뒤를 제자들이 따랐고, 제자들의 뒤를 이어 다가오는 유월절이나 나사렛의 선지자가 어떤 사역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에 이끌려 거룩한 도시로 가는 수 많은 순례자의 무리가 그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 사이에는 예수님이 마침내 자신을 그리스도로 선포하고 그분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열렬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19:11).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6일 전", 즉 금요일 오후에 베다니에 도착합니다(요한복음12:1). 그들은 안식일 동안 나사로 또는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머물렀습니다(26:6; 12:2; 후자의 경우 마태복음26:6-13에서 마태가 연대순으로 기록한 역사, 즉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깨뜨려 부은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벳바게, 이 마을은 누가복음19:29절과 마가복음11:1절에 베다니와 함께, 그리고 그 이전에도 언급되어 있으므로 여리고에서 오는 길목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베다니의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베다니의 서쪽, 언덕 꼭대기에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위치를 전통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베다니는 "행복의 집", “선을 향한 열망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곳"이라는 뜻으로,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 곳 모두 감람산(올리브산)에 있었습니다.

James Tissot(1836–1902), The Foal of Bethpage

위 그림에서도 제임스 티소는 두 갈래로 갈라진 거리 득, 삼거리에 바로 새끼가 있는 나귀가 매여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셨는데, 두 제자에 대해 복음서 어디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누가복음22:8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비슷한 심부름을 맡았다는 사실로 추측하여 볼 때, 아마도 이 사건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이 심부름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6일 전에 벳바게에 도착하시고, 이후 유월절을 지키셨습니다(12장 참조). 마가는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10:46).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신 맞은편 마을은 감람산에서 남쪽으로 2마일(3.2km)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곧 매여 있는 나귀 한 마리와 그 나귀 새끼를 보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가져오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예지력과 그것을 미리 다 보신 것처럼 디테일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너희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발견하리라 아무도 앉은 적이 없는 어미와 함께 묶여 있고 두 길이 만나는 곳(11:4) : 마을에 들어가면 그 주인이 처음에는 너희가 그를 풀어 주기를 꺼려하는 것 같으나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주리라

 

마태는 스가랴9:9절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4,5)

나귀의 모습

예수님께서 굳이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말씀을 성취하시는 목적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유대에는 말이 거의 없었고, 말은 주로 전쟁에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이나 평범한 여행에서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귀, 노새, 낙타는 여전히 동양 지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말을 타는 것은 때때로 전쟁의 상징이었고, 노새와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왕과 왕자들은 평화로운 시기에 주로 말을 탔으며, 사사기 10:4, 사사기 12:14, 사무엘상 25:20 등에서는 말을 타는 것이 지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솔로몬에게 왕권을 승계하면서 솔로몬이 왕으로 취임할 때 "노새"를 타도록 하엿습니다(열왕기상 1:33). 백성들에게 전쟁과 위엄이 아닌 평화와 겸손으로 통치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귀를 타는 것은 가난이나 이미지 손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들에게 다가가는 적절한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평화의 왕 예수님이 수도인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그 길은 엄숙과 두려움이 아닌 진정한 기쁨과 소망의 길이었습니다.

 

마태는 4-5절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 선지자들이 말한 것이 성취되었음을, 즉 선지자의 예언이 이것으로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이것을 행하도록 지시하여 성취되도록 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언급하는 도시와 국가를 의인화하여 시적 운율로 친숙하게 사용했습니다. 5절의 첫 구절은 이사야 62:11에서, 나머지는 스가랴 9:9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메시아에게 적용하였습니다. 평화의 왕은 현재 나귀를 타고 오시지만, 그는 언젠가는 말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9:11).

 

예수님께서 마지막 공생애 사역을 하시던 때 서기 30년 경에 예루살렘은 이미 로마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마치 드라마의 무대처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동쪽에서 왕으로 환영받으며 도시로 들어올 때, 본디오 빌라도 군대는 서쪽에서 황실 기병대와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습니다. 빌라도는 보통 때는 가이사랴에서 지배자로서 부유하게 살았지만, 유대인의 주요 축제 기간에는 예루살렘에 머물며 지역 주민들의 폭동이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예수님의 행렬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빌라도의 행렬은 제국의 권력을 선포했습니다."라고 보그와 크로산은 <최후의 일주일>(하퍼 샌프란시스코, 1)에서 말합니다. “Jesus’s procession proclaimed the kingdom of God; Pilate’s proclaimed the power of empire,” say Borg and Crossan in “The Last Week”, (Harper San Francisco, chapter1)

Alessandro Turchi(1578-1649), The Triumphal Entry of Christ in Jerusalem
Anthony van Dyck(1599-1641, Flemish Baroque painter), Entry of Christ into Jerusalem, 1617
James J. Tissot (1836-1902 / French), Procession in the Streets of Jerusalem
Source: William A. Foster(from old catalog), The Bible panorama, or The Holy Scriptures in picture and story Year: 1891 (1890s) / Original Painting: Gustave Dor&eacute;(1832&ndash;1883), Jesus rides into Jerusalem on a donkey on Palm Sunday, Unknown date
Pietro Lorenzetti(1280&ndash;1348), Christ's entry into Jerusalem, Basilica of San Francesco d'Assisi

드디어 8절부터 예수님의 행진이 시작됩니다. 제자들이 준비를 하였고,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무리중 일부는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최근 나사로의 부활에 흥분하여 베다니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12:17). 어떤 이들은 주님보다 앞서갔고 어떤 이들은 뒤따르며 환호했습니다. 그들은 행진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군중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마치 승리의 상징으로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나왔습니다. (참조: 요한계시록 7:9). 예루살렘 안에서 종교지도자들이 놀라 허둥댈 정도면 그 행렬과 환호가 얼마나 굉장하였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8절에서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겉옷을 길에 펴는 것은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였습니다. 아합왕 시대에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은 예후는 이스라엘 군대의 장관(장교)들이 그를 통치자로 선택했을 때 그들이 발아래에 펼쳐 놓은 옷을 밟고 걸었습니다(열왕기하 9:13). 그리스의 아가멤논이 미케네에서 왕이 될 때도 동방 왕들의 방식을 따라 값비싼 카펫 위를 걸으며 미케네의 궁전에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호머, 일리아드).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9)

 

호산나무리에서 터져 나온 환성 소리, 여기서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주께 간구하나이다"라는 히브리어 명령문으로, 시편 118편에서 전례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편은 특별히 초막절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시편 118편 참조) 종려나무 가지와 자연스럽게 연관되었고, 지금 사람들이 부르는 이 시편의 구절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온 순례자들을 환영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고 합니다. 호산나에 "다윗의 자손"이 추가됨으로써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직접 선포하게 되었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호산나"(2:14 참조)는 이 선포에서 하늘이 땅과 일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방인의 압제와 이스라엘 권력자들의 부패와 타락으로 절망하던 군중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식에 큰 떨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메시아의 왕국을 갈망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전혀 다른 의미였지만 제자들도 얼마나 그 나라를 갈망하였습니까?

 

그러나 제자들과 무리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이 땅의 나라와 예수님께서 그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며 강조하시던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입성 장면에서 그 모습은 확연히 갈라집니다. 이 땅의 나라는 법과 권력으로 다스려집니다. 말을 타야 대접을 받고 위용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정의를 위하여 법을 집행한다고 외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거기엔 가식도 없고 권위적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타시더라도 경외와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진정한 공평과 정의, 평화와 따뜻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만이 우리 인생들에게 진정한 영혼의 안식과 평강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6:33).

 

오늘도 우리 나귀 타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우리 삶에 오시기를 간절히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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