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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20장①_포도원의 품꾼들

by 적아소심 2023. 8. 16.

마태복음 20:1-19

 

포도원의 품꾼들 (마태복음에만 기술됨)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The Parable of the Vineyard Workers

1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unto a man that is an householder, which went out early in the morning to hire labourers into his vineyard. 2 And when he had agreed with the labourers for a penny a day, he sent them into his vineyard. 3 And he went out about the third hour, and saw others standing idle in the marketplace, 4 And said unto them; Go ye also into the vineyard, and whatsoever is right I will give you. And they went their way. 5 Again he went out about the sixth and ninth hour, and did likewise. 6 And about the eleventh hour he went out, and found others standing idle, and saith unto them, Why stand ye here all the day idle? 7 They say unto him, Because no man hath hired us. He saith unto them, Go ye also into the vineyard; and whatsoever is right, that shall ye receive.

8 So when even was come, the lord of the vineyard saith unto his steward, Call the labourers, and give them their hire, beginning from the last unto the first. 9 And when they came that were hired about the eleventh hour, they received every man a penny. 10 But when the first came, they supposed that they should have received more; and they likewise received every man a penny. 11 And when they had received it, they murmured against the goodman of the house, 12 Saying, These last have wrought but one hour, and thou hast made them equal unto us, which have borne the burden and heat of the day. 13 But he answered one of them, and said, Friend, I do thee no wrong: didst not thou agree with me for a penny? 14 Take that thine is, and go thy way: I will give unto this last, even as unto thee. 15 Is it not lawful for me to do what I will with mine own? Is thine eye evil, because I am good? 16 So the last shall be first, and the first last: for many be called, but few chosen.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이르시다(10:32-34; 18:31-34)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Third Prediction of Death, Resurrection (Mark 10:32-34)

17 And Jesus going up to Jerusalem took the twelve disciples apart in the way, and said unto them, 18 Behold, we go up to Jerusalem; and the Son of man shall be betrayed unto the chief priests and unto the scribes, and they shall condemn him to death, 19 And shall deliver him to the Gentiles to mock, and to scourge, and to crucify him: and the third day he shall rise again.

요한 크리스티안 브란드(1722-1795), 포도원 일꾼의 비유, 1769, 아카데미 데어 빌덴 덴 쿤스트, 비엔나 (Johann Christian Brand (1722-1795), Parable of the Workers in the Vineyard, 1769, 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Vienna)
 

야콥 빌렘순 드 벳, 포도원 품꾼의 비유, 17세기 중반 (Painting of the parable, by Jacob Willemszoon de Wet, mid-17th century)

렘브란트, 임금을 받는 포도원 품꾼들, 1637 (Painting of the parable by Rembrandt, showing the workers being paid that evening, 1637))
 

아를란드 J. 훌트그렌(Arland J. Hultgre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비유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동안 필연적으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 시대에서 제11시에 고용된 일꾼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임종 직전에 개종한 사람이나,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해왔고 신앙적 헌신에 더 열심인 사람들이 무시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그 범위를 좁히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제11시에 고용된 일꾼이며, 비유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예로운 손님입니다. 우리가 열한 시의 일꾼이 누구인지 결정할 권한도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마태복음 관점에서 모두에서 이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나 합당함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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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절은 헬라어 원문에서 Ὁμοία γάρ(호미아 가르)로 시작되는데, 이는 “For like~”의미로 바로 19:30절 마지막 구절의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마태 9:30절 말씀에 이어서 이 비유가 여기에 소개되는 방식은 앞 장에서 결론을 맺는 문장을 예시하기 위해 말씀한 것이므로 19장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일차적 목적은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의 부름에 불순종하여 거절당할 것이며,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의 부름에 순종한 결과 받아들일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이방인 중에서 먼저 회심한 많은 사람이 영광의 천국에서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될 것이며, 맨 나중에 회심한 많은 사람이 그 안에서 가장 먼저 되고, 가장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도 믿는 유대인들에게 부여된 특권과 동등한 특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천국은 마치 ~는 집주인과 같으니“ 이는 곧 천국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방식은 포도원을 관리하는 집주인, 즉 한 가정의 주인의 방식과 비슷함을 내포합니다.

 

1-7절에서는 집주인이 포도원 일꾼들을 계속 고용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른 아침(early in the morning)은 로마인과 유대인이 제1시(첫 번째 시간)로 부르는 6시를 말하며, 그때부터 제3시는 현재의 아홉 시, 제6시는 열두 시, 제9시는 오후 세 시, 제11시는 오후 다섯 시로 구분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시간에 6시간을 더하면 오늘날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이제 포도를 수확해야 할 때였기 때문에 주인은 포도밭에 일꾼을 고용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여기서 집주인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처럼 포도원은 일꾼이 필요한 세상 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여러 시간과 관련하여, 초대교회 교부(fathers of early churchs)들 중 일부는 이른 아침, 즉 제1시는 아담과 이브, 아벨, 에녹, 노아 등이 부름을 받았던 홍수 이전의 시대로 이해했습니다. 제3시는 홍수 이후의 족장 시대를, 제6시는 모세의 시대와 율법 공포 및 유대 교회 설립을, 제9시는 선지자들의 시대를, 제11시는 메시아 시대와 이방인의 부름의 시대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휘트비 박사는 이 비유가 천국, 즉 복음 경륜과 복음 교회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교부들의 설명이 참된 설명이 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제1시는 세례 요한의 부름에 앞선 그리스도의 전파 초기의 부르심, 즉 이른 아침의 부르심과 사도들이 유대에서 전파하도록 처음 보냄을 받은 제3시의 부르심에 대해 설명합니다(사도들의 사명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제6시의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 강림 후 교회가 영광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의 설교를, 제9시의 부르심은 세계 각지의 회당에서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같은 사도들이 설교하는 것을, 제11시의 부르심은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이 설명은 너무 큰 구별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매우 그럴듯해 보이며,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 주님이 의도 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교부들 중 다른 이들은 인간의 삶을 하루와 비교하면서 이 비유가 인간의 삶의 여러 시기, 즉 어린 시절, 청년기, 중년기, 쇠퇴기, 노년기에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비유는 그러한 적용이 가능하고 아마도 의도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8-15절까지는 일과 후에 집주인이 종들을 시켜서 일꾼들에게 임금을 동일하게 지급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16절에서 예수님은 마태 19:30절에 대한 결론을 맺으십니다.

 

8절에서 제11시, 즉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와 하루 일의 10분의 1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하루 품삯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단순 임금 아닌 은혜로 상을 분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일 마지막에 온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처음에 온 일꾼들은 자신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불의에 대해 큰 소리로 계속 불평했습니다(‘원망하다’는 말은 불완전 현재형으로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나다). 여기에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이들의 모습은 가장 자연스럽고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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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품꾼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기로 한 주인의 결정은 불법적인 것이 아니라 자비의 행동이었으며, 그분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풍성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모세 앞에서 친히 영광을 보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구원은 사람의 욕망이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로마서 9:15-16). 구원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자기 의로운 행위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롬3:23), 그분의 은혜는 믿는 모든 사람을 구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일찍 부르시든 늦게 부르시든 그분의 은혜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든, 우리의 구원에 대한 영광과 찬송은 그분과 그분만의 것이며 공평합니다. 주인이 자신의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비를 베푸실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권리가 있습니다.

 

포도원의 첫 번째 일꾼 그룹은 마지막 그룹과 같은 품삯을 받는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자신들만을 위한 천국을 다른 사람들도 상속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분노했던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비슷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무시 받고 연약한 죄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하게 여길 뿐 아니라 그들에게 천국을 주신 것을 경멸했습니다. 15절에서 주인은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묻습니다. 영어성경(KJV)에서는 “Is thine eye evil, because I am good?" 내가 선하기 때문에 너희의 눈은 악하느냐? 여기서 evil eye 즉 ”악한 눈"은 질투와 시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에도 불구하고 독선적인 바리새인들은 시기심이라는 악한 눈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악한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시기심과 질투로 가득한 악한 눈으로 예수님과 따르는 무리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도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삼상 16:7b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의 히브리어 원문은 “사람은 눈으로 보고, 하나님은 심장으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고후 5:7에서도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상을 악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나머지 일꾼들은 불평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않고 임금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마지막에 들어온 일꾼들과 같은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 기뻐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드리는 섬김을 순수하게 기뻐해야 합니다. 그분은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수고에 대해 신실하게 보상해 주시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상받는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그분께 대한 우리의 헌신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러한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6절의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 얼마나 오래 또는 얼마나 열심히 일하든 영생의 상급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하늘에서 누리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점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눅 23:39-43)도 그리스도를 향한 회개와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그 잠깐의 회심의 삶이었지만 사도 바울과 동일한 영생의 상을 받았습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위해 수고한 방식에 따라 상급이 다르지만, 영생의 궁극적인 상급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구원과 심판과 보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가 왈가왈부할 영역이 아니지요. 종의 자세는 주인의 계획과 방향을 따라 본인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주인의 자리에 앉는 교만입니다. 우리 주님은 선하십니다. 모두를 사랑하시며,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고자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주님의 배려와 은혜를 감사히 받을 수 있고, 또한 남의 축복과 은혜도 불편해하지 않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 주님, 저에게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자녀요 종으로서의 영적 수준이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저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려 주옵소서.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하시고, 남의 형통을 나의 것과 비교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과의 친밀함이 모든 보상보다 뛰어남을 알고 그것에 만족하게 하소서. 넓은 마음이 곧 나를 비우는 마음인 것을 알게 하소서.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어떠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조금의 편견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배움에 겸손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임스 J. 티소(1836–1902), '사도들에게 권면' (1886-94), 브루클린 박물관, 뉴욕 (James J. Tissot, 'The Exhortation to the Apostles' (1886-94), Brooklyn Museum, New York)
 

제임스 티소, 제자들과 대화하시는 예수님 (James J Tisso, Jesus Discourses with His Disciples)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즉석 도상강의(道上講義)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제부터는 시간이 촉박하고 긴급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이 목전에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사람들 사이에서 사역을 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차분히 가르치실 시간을 갖기란 어려우실 겁니다. 따라서 많은 무리들이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만 따로 불러서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깨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마지막 제물이었습니다(히브리서 9:28).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적어도 세 번 이상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셨으며, 요한복음에는 더 많은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당신의 죽음을 예언한 내용은 마태16:21-23, 마가8:31-32, 누가9:21-22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5천 명을 먹이시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처음으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9:31)” 그러자 베드로가 성급하게 예수님을 책망하기 시작했고,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태16:33; 마가8:33).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17:22-23, 마가9:30-32, 누가9:43-45에서 두 번째로 죽으심을 예언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하늘의 영광을 입은 그리스도를 본 변모 사건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왕국이 곧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이해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묻기를 두려워"하며 설명을 구했습니다(마가9:32; 누가9:45).

 

마태20:17~19, 마가10:32~34, 누가18:31~34에는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죽음을 예언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조롱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다시 살아나실지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도 제자들은 그 의미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곧 성금요일과 그 이후의 많은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몇 가지 예언이 더 있지만 당시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가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을 때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팔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한12: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세 번의 말씀처럼 명시적인 예언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분명히 다가올 죽음과 장례를 예시하였습니다. 다시 요한13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4장 25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부재 중에 성령을 주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는 당신의 죽음과 교회의 미래를 암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당신의 뜻으로(우리의 용어로 ”자발적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그 이후의 사건에 대해 예언을 하셨는데,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를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한14:29)”라고 하셨습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계시를 위해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그분의 종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아모스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계속해서 “나는 ~이다(I am~)”라고 계속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모든 구속사역의 분기점입니다. 인류의 영적, 역사적, 육체적인 구원의 역사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기점으로 B.C와 A.D로 나뉩니다. 인간의 일생도 그리스도의 이전과 그리스도 이후로 완전히 바뀝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Great Turning Point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예고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위대한 희망이요 삶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눈과 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구원과 영생을 지식적으로 알지만 그것이 삶에서 역사하지(work) 않습니다. 지식을 신념화하여 날마다 마음으로 결심하고 자신을 추스르지만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입술의 고백은 공허하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간구하고 그분의 오심과 다스림을 기다리고 또 기다릴 때, 주님께서는 반드시 오셔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 때가 되어서야 영적인 눈이 떠지고 영적인 귀가 열리고 비로서 영적인 비밀들을 알게 되고 밝아지게 됩니다. 단순한 지식과 정보가 이제는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비추게 됩니다.

 

주님, 자기를 향하는 모든 자기중심적 사고와 성향들을 주님께로 돌리게 하시고, 주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가 먼저 달려나가 무언가를 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게 하옵소서.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무엇을 하기보다 주님 앞에 앉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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