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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19장①_이혼에 대하여 가르치시다(막 10:1-12)

by 적아소심 2023. 8. 7.

마태복음 18:1-12

 

이혼에 대하여 가르치시다(막 10:1-12)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 And it came to pass, that when Jesus had finished these sayings, he departed from Galilee, and came into the coasts of Judaea beyond Jordan; 2 And great multitudes followed him; and he healed them there.

3 The Pharisees also came unto him, tempting him, and saying unto him, Is it lawful for a man to put away his wife for every cause? 4 And he answered and said unto them, Have ye not read, that he which made them at the beginning made them male and female, 5 And said,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6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7 They say unto him, Why did Moses then command to give a writing of divorcement, and to put her away? 8 He saith unto them, Moses because of the hardness of your hearts suffered you to put away your wives: but from the beginning it was not so. 9 And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put away his wife, except it be for fornication, and shall marry another, committeth adultery: and whoso marrieth her which is put away doth commit adultery.

10 His disciples say unto him, If the case of the man be so with his wife, it is not good to marry. 11 But he said unto them, All men cannot receive this saying, save they to whom it is given. 12 For there are some eunuchs, which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some eunuchs, which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be eunuchs, which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heaven'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마태복음 19장에 기록된 다양한 사건을 묘사한 렘브란트의 백 길더 판화. 1649. (Rembrandt's Hundred Guilder Print depicting various events recorded in Matthew 19. 1649)
 

렘브란트가 그린 백 길더 프린트입니다.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위가 많이 보이는 장소에 서서 많은 사람에게 설교하시는 모습입니다. 많은 병자와 아기와 어린이, 그리고 왼쪽에는 종교 지도자처럼 보이는 이들이 둘러있습니다.

 

가장 왼쪽 사람은 오딧세이, 일리아드로 유명한 호머의 모습입니다. 그를 중심으로 몇 사람이(시대의 지성인인 것 같습니다) 그룹을 이루어 예수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끼리 토의를 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가르침이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옆의 그룹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특히 긴 모자를 쓰고 예수님께 집중하며 말씀을 듣는 사람은 16세기 기독교 인문주의자의 리더인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바로 왼쪽에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부모들이 어린아이들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막다가 예수님으로부터 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옆에 젊은 청년이 턱을 괴고 예수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은 아마 렘브란트 자신인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왼쪽 앞에 터번을 쓴 여자가 안고 있는 아기를 향해 오른손으로 손짓하십니다. 그 뒤로 아이가 보이고 강아지도 보입니다.

오른쪽에는 손을 모아들고 기도하는 늙은 여자가 보이고, 그녀에게 기대어 누워있는 아픈 사람이 있고, 더 오른쪽에는 임시 바퀴 달린 수레를 아픈 사람이 누워 예수님의 은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른쪽 아치형 출입구 쪽에는 낙타의 등에 기대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맨 오른쪽에는 한 사람이 당나귀와 함께 와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건물 내부의 빛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추는 모습으로 왼쪽은 밝고, 오른쪽은 일부 그늘져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마지막 한 달 동안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위한 사역에 들어가십니다. 마지막 한 달의 첫 사역이 바로 19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첫 사역부터 사탄은 교묘하게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훼방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어쩌든지 예수님을 비방하고, 백성들에게 나쁜 소문을 퍼뜨리며 메시아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 공작을 펼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늘 배우고 익힌 모세 5경을 비롯한 구약 말씀에 의거하여 그들의 악한 의도를 물리치십니다.

그들은 뜬금없이 이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 타락과 완악함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 사상에 주류를 이루는 랍비 학파인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는 특히 이혼 문제로 해서 크게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다 이혼을 인정하였는데, 물론 남편이 아내를 버린 경우의 이혼만을 인정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하였습니다. 이들의 이혼에 대한 생각은 신24:1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수치되는 일'이라는 말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수치'(indecency)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수치를 '간음'과 갈이 큰 범죄 정도의 것으로 해석했는데, 물론 성경 본문은 수치가 반드시 간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간음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은 죽음이었지 이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신22:22). 마찬가지로 '수치되는 일'이 아내의 '간통에 대한 의심'과도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이는 아내가 간통한 사실을 밝히고 싶을 때는 저주를 내리게 하는 쓴물을 아내에게 마시게 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민5:5-31). 따라서 '수치되는 일'은 바로 간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내의 순결 문제 등과 같은 상대 남편에게 큰 충격이 되는 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율법의 근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란 남편이 아내에게 떳떳하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요구할 만한 충분하고도 객관적인 사유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한편 힐렐 학파는 '수치'의 의미를 확대해석하여, 실제의 죄든 아니면 상상 속의 범죄이든지 간에 모든 종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지극히 사소한 잘못'까지도 포함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음식이 상한 일이라든지, 남편이 자기 아내보다 더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다든지 또는 더 이상 애정이 생기지 않는 것 등의 부당한 일에 의해서 남편의 이혼 요구가 있는 경우 아내는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제기된 물음은 바로 신24:1에 대한 힐렐의 해석에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힐렐 학파의 주장을 따른다고 한다면 그의 대적자들은 샴마이 학파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예수님이 도덕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라고 공박할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엄격한 샴마이 학파의 편을 들면 그들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친절과 자비 행위는 바로 위선'이라고 선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샴마이나 힐렐의 견해를 모두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비록 엄격한 샴마이 학파라 할지라도 이미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석 참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 두 학파 중 하나 또는 다른 학파에 끌어들여 논란을 만들려는 함정을 만들었습니다. 그 음모는 헌금에 관한 질문에서와 비슷했습니다(마태22:15 참조). 필립 헨리는 "악한 일에서 사탄은 수단으로부터 목적을 분리하고, 선한 일에서 목적으로부터 수단을 분리한다"며 사탄의 교묘한 유혹을 설파하였습니다. 즉, 사탄은 악한 일에서는 일을 하는 과정이나 수단의 정당성만 강조하고 그 일의 결과나 목적은 말하지 않거나 감춥니다. 그리고 선한 일에서는 목적이나 결과의 정당성만을 강조하고 옳지 않은 과정이나 수단을 믿음으로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알렉상드르-프랑수아 카미나드, <처녀(마리아)의 결혼>, 1824 (Alexandre-Fran&ccedil;ois Caminade, The Marriage of the Virgin, 1824)
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튼, 등록부에 서명하다, 19~20세기 (Edmund Blair Leighton, Signing the Register, 19th-20th c.)
피에트로 페루지노(1446/1452-1523), 성모의 결혼 (Pietro Perugino(1446/1452-1523), Marriage of the Virgin)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이 테마 버전에서 라파엘이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결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페루지노의 그림이지만, 현재는 그의 제자 로 스파냐(Lo Spagna)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을 묘사한 이 작품은 현재 프랑스 캉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페루치노는 최근 완공된 페루자 성당을 위해 핀투리치오에게 이 작품을 의뢰했고, 몇 차례의 정체기를 거친 후 1500~1504년경에 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라파엘(1483&ndash;1520), 마리아의 결혼, 1504, 피나코테카 디 브레라, 밀라노 (Raphael, The Marriage of the Virgin, 1504, Pinacoteca di Brera, Milan)

15세기 후반, 시타 디 카스텔로의 후원자들은 라파엘의 스승 피에트로 페루지노에게 세 개의 작품을 의뢰했고, 페루지노가 부재 중일 때 라파엘이 완성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한 '성모 마리아의 결혼'은 이 중 마지막 작품이었습니다. 페루지노의 그림 중 하나인 '성모 마리아의 결혼'에서 영감을 받은 라파엘은 서명 옆에 적힌 날짜에 따르면 1504년에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4~6절에서 예수님께서 결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And he answered and said unto them, ”Have ye not read, that he which made them at the beginning made them male and female, And said,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6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유대인들은 신명기 24:1을 이혼의 합법적 근거로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創造)하셨는가를 환기시킴으로써 창조의 원리(창1:27)를 통해서 이혼의 절대 불가성과 아울러 결혼의 신성함과 영구성을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본문의 '본래(at the beginning)'라는 말을 사용하심으로써 남⬝녀의 근본적인 창조 목적을 상기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진실로 결혼의 법은 하나님의 섭리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과 생명 유지의 법이었습니다(고전7:25-38). '여호와께서는 이혼을 미워한다'고(말라기2:16) 선포한 말라기 선지자와 같이 예수님은 창1:27의 말씀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것인 동시에 창조때부터 여자와 남자는 하나의 몸에서 잠시 분리되었으며,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으로 다시 한 몸을 이루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결혼에 있어서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동시에 창조 때에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창1:27의 말씀, 즉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그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온전히 합일을 이루는데 그 어떠한 장애 요인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두 사람의 독립적 인격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합니다(창2:24).

 

5절에서 ”합하여“ κολληθήσεται(콜레테세타이)는 (κολλά 콜라, "접착제"에서 유래) ”아교로 붙이다 (문자 그대로 "함께 붙이다"); 쪼개다, 결합하다; (비유적으로) 영혼으로 맺어진 우정으로 친밀하게 연결하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단순미래 수둥태로서 '완전히 달라 붙어 뗄래야 뗄 수 없게 될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부부란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결합체가 아니라 영원히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합일체라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와의 결합을 정신이나 혼만의 결합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육체의 결합으로 본 성경의 이해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실제로 결혼에 의하여 남녀는 그 몸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 것은 물론, 정신적, 영적으로 한 몸을 이루어 삶의 구체적 요소들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두 사람을 결코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한 몸'이란 육신(flesh)을 근간으로 한 전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보다 더 높은 관계로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절에서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으로 한마디로 천생연분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짝지어주다'란 말은 '결합하다', '함께 멍에를 메다'는 말의 헬라어 '쉬네쥬겐'(συνέζευξεν)이 사용되었습니다(기본형 συζεύγνυμι, 쉬쥬그누미). 이는 ζεῦγος(주고스) "멍에"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함께 멍에를 메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함께 결합시킬 때 함께 멍에를 메다(짝을 지음)”는 의미입니다. 쉬네쥬겐(기본형 쉬쥬그누미)는 신약에서 결혼에만 사용되며, 남편과 아내가 혼자서 사는 것보다 주님을 위해 함께 연합하여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헬라어 쉬네쥬겐(συνέζευξεν)은 부정 과거형 직설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끝나버린 단 한번의 과거 사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이미 발생되어 버린 일이므로 어떤 사람도 그 연합을 나눌 수 없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따라서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캠브리지, 시드니 서섹스 대학의 교수인 맥네일(A.H. McNeile)은 말하기를 '모든 결혼한 부부는 아담과 하와의 결합(結合)의 재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이혼이란 인간의 악한 의지의 반영일 뿐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는 둘이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란 서로에게 바쳐진 몸이요 계속해서 헌신해야 할 대상입니다. 또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몸'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헌물입니다. 그러므로 헌신된 제물로서의 부부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남자와 아내를 한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결혼으로 맺어진 신성한 관계를 해치는 그 어떠한 분열도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반(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8~9절에 이혼에 대한 예외적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법을 지킬 만큼 순수하다거나 신앙적 열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내를 내쫓기 위해 심하게 학대(虐待)하거나, 누명을 씌워 율법에 의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모세는 그러한 '큰 죄악'을 범하면서 남녀가 함께 사느니 차라리 이혼하는 '작은 악'을 허용했습니다. 모세는 이혼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용인한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결혼법에는 '본래' 이혼의 허용이나 그 가능성에 대해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아내의 수치되는 일(신24:1)을 보았을 경우에 반드시 이혼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허용했을 따름입니다. 이혼은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아닙니다. 이혼은 모세에 의해서 허용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혼 자체가 이미 사람의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이혼은 본래의 하나님의 창조질서,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상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결혼의 신성한 윤리가 파괴되고,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는 그래도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어머니, 믿음의 여인에 대한 신앙적 요구가 살아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들의 신앙과 믿음 안에서 자녀들이 믿음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민주화가 되고, 국민 소득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그러한 말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가정에서 믿음의 역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자녀들에게 믿음의 교육보다 세상의 교육을 더 중시하였습니다. 고3이 되면 교회를 안 보내는 것은 당연했고, 교회학교가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교육과 교회학교가 무너지면서 기독교 신앙의 다음 세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사사기 2:10 말씀에서와 같이 “다른 세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책임은 기독교인 각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무엇보다 영적 지도자들의 물신주의와 양적 성장주의, 잘못된 교리에 기초한 설교, 목회자를 직분으로 보지 않고 제사장이나 사도처럼 여기는 계급주의 및 우상주의, 교회 이기주의, 성적 타락 등 교회는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주님 앞에 회개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여러 군데에서 영적 회복을 위한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 불씨들이 영적 대각성 운동으로 번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각 개인의 신앙이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되고, 사회와 국가가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지금 가장 급진적으로 변질되어 기독교 탄압의 선봉이 되어가는 듯한 대한민국이 속히 하나님께 돌이키길 기도합니다.

 

저도 결혼하고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지금까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철 없는 삶을 살았는지 지금까지의 삶을 보면 너무 부끄럽고 회개할 것만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 생활만 보건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축복인데 남편으로서, 부모로서의 마음가짐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준비되지 못한 시작이란 의미는 바로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몰랐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은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가장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천국이 될 수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시작된 가정은 과거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가정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버지로부터의 상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지만, 자기의 기준으로 보면 모든 것이 헛점 투성이요, 책망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특히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가 세상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잘못하면 그것을 꼬투리로 가르치거나 책망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녀 입장에서는 귀찮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제가 살면서 마음으로 깊이 깨달은 것은 우리의 믿음이 가장 필요한 곳은 가정이었습니다. 기다림과 인내, 사랑, 섬김이 가장 필요한 곳은 가정입니다. 무엇보다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가정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깊이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내와의 동역, 자녀의 교육을 내 맘대로 하고, 주님께 맡겨 드리고 기도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생각합니다. 고3까지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인생실패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아이의 목을 빼게 되고, 아이와의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결국 세월이 흘러서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게 됩니다.

 

살아보니 좋은 대학 나왔다고, 좋은 직장 다녔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못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계속 노력하고 도전한다면, 때가 되면 반드시 그 분야에서 도가 트게 되고 결국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녀가 살면서 낙심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부모의 깊은 동정과 따뜻한 한 마디가 필요합니다. 부모의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자녀를 끝까지 믿고 신뢰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자녀는 철이 들고 성장합니다. 다행히 아이가 일찍 철이 들면 다행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일정 기간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인생을 보는 눈이 생기게 됩니다. 

 

마침 본문말씀이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 이후에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시고 안수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무척 중요시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정이 깨지는 것을 싫어하십니다(말라기2:10). 사탄은 가장 먼저 가정을 파괴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에게 보낸 가장 귀한 손님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에게 울타리를 만들고 주고 그 안에서 자유와 책임을 배우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때가 되면 그 울타리에서 나와 또 다른 가정을 이루어 살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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