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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18장①_천국에서 큰 사람

by 적아소심 2023. 7. 21.

마태복음 제18장 1-14

 

천국에서 큰 사람 (막9:33-37; 눅9:46-50)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1 At the same time came the disciples unto Jesus, saying, Who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2 And Jesus called a little child unto him, and set him in the midst of them, 3 And said, Verily I say unto you, Except ye be converted, and become as little children, ye shall not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4 Whosoever therefore shall humble himself as this little child, the same is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5 And whoso shall receive one such little child in my name receiveth me. 6 But whoso shall offend one of these little ones which believe in me, it were better for him that a millstone were hanged about his neck, and that he were drowned in the depth of the sea.

 

유혹과 죄 (막9:42-; 눅17:1-4)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2)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7 Woe unto the world because of offences! for it must needs be that offences come; but woe to that man by whom the offence cometh! 8 herefore if thy hand or thy foot offend thee, cut them off, and cast them from thee: it is better for thee to enter into life halt or maimed, rather than having two hands or two feet to be cast into everlasting fire. 9 And if thine eye offend thee, pluck it out, and cast it from thee: it is better for thee to enter into life with one eye, rather than having two eyes to be cast into hell fire.

 

잃은 양의 비유 (눅15:1-7)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0 Take heed that ye despise not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I say unto you, That in heaven their angels do always behold the face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11 For the Son of man is come to save that which was lost.

12 How think ye? if a man have an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be gone astray, doth he not leave the ninety and nine, and goeth into the mountains, and seeketh that which is gone astray? 13 And if so be that he find it, verily I say unto you, he rejoiceth more of thatsheep, than of the ninety and nine which went not astray. 14 Even so it is not the will of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that one of these little ones should perish.

요한 프리드리히 오버벡, 1789-1869,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야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다. 1846년 오버벡(J.F. Overbeck)의 그림을 플루그펠더(A. Pflugfelder)가 에칭으로 제작함 (Overbeck, Johann Friedrich, 1789-1869, Christ tells the apostles that to be as humble as a child makes one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Etching by A. Pflugfelder after J.F. Overbeck, 1846)
 

레오나르드 고티에,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겸손할 것이다, 1576/1580년경 (Leonard Gaultier,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will be Humble like a Child, probably c. 1576/1580)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여 쩔쩔매던 귀신들린 청년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향하던 길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메시아로서의 등극을 바라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게세마네에 도착했을 때에(마18:1 ”그때에“) 즉, 막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신 때였습니다. 성진세는 매년 아달월(태양력 2-3월) 15일 경에 한 번씩 내는 것이므로(출30:11-16) 구체적으로 이 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니산월, 태양력 3-4월 14일경) 한 달 전 정도 되고, 제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로 들어가려고(19:1) 하실 때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온통 한 달 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 이 질문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발생한 것으로(막9:33; 눅9:46),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오는 길(路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였다고 말합니다(막9:33). 이와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으나 제자들은 잠잠하고 아무 말도 못 하였다고 합니다(막9:33-37). 한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는 그때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9:40-48). 그때 당시의 상황을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논쟁하는 것을 아시고(누가), 그들에게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해졌고(마가), 바로 그때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마태).

 

제자들이 이렇게 ”누가 크냐?“라며 자리다툼과 세속적 권력의 서열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16:16), 또한 세 제자만 변화 산상에서의 영광스런 주의 빛난 모습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17:1), 베드로만 성전세 사건과 연루된 사실(17:24-27)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보기에 최근에 예수님은 베드로 또는 수석 제자들만 챙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세상 임금이 그의 아들에게서는 관세나 세금을 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예로 들어서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님 당신도 결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세금을 내실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다스리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새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에 따라 제자들의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암투와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이제 예수님은 곧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말씀을 2번씩이나 들으면서 때가 임박하였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 '누가 크니이까'는 제자들의 갈등과 조급함이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 당시의 사건 속에 있는 제자들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지금 모든 스토리를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아전인수격인 해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실 때까지 계속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귀에 쏙쏙 들어오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C. W. 에커스버그, 천국에서 가장 큰 자, 1842. 성 니콜라스 교회, 미델 파르트. 덴마크 국립 박물관, 코펜하겐 (C. W. Eckersberg,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1842. St. Nicholas' Church, Middelfart. The National Museum of Denmark, Copenhagen)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부르시고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2).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집안에서"(막9:33) 이루어졌고 그 집이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므로, 그 아이는 베드로의 자녀이거나 그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3,4)“

 

어린아이는 천진하고 순결합니다. 또한 겸손합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약점인 유치한 성향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장점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는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엇ㅂ고 부모의 그늘 아래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며 그분의 보호 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을 하거나 관계성에서 계산을 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천국 시민의 모형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른들이 어린아이와 같이 될 수 있습니까? 3절 말씀대로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이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στραφῆτε(스트라페테')는 돌리다(전환하다); (비유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전환하다, 즉 다른 방향으로 가다("어바웃 페이스"), 반대 또는 다른 코스를 택하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동적 변화(전환)를 그림으로 다이나믹하게 설명하는 직접적인 의미("돌리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단지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 즉 회개와 거듭남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요3:3; 행2:38).

 

예수님은 이처럼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이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세상의 권력서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가르침의 말씀으로 제자들은 더 이상 서열 논쟁에 대한 입을 닫게 되었습니다.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But whoso shall offend one of these little ones which believe in me, it were better for him that a millstone were hanged about his neck, and that he were drowned in the depth of the sea.)
목에 걸려있는 연자맷돌 (millstone around one's neck)
  

여기서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한다에서 σκανδαλίσῃ(skandalise; 스칸달리세 원형-σκανδαλίζω) 올무를 놓다("걸림돌"); (비유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나 생각을 방해하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 문자 그대로 "함정에 빠지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상대방을 화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버리게 하고 그분에 대한 봉사와 섬김을 그만두게 하며 그분의 말씀을 버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려 떠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유대인의 강한 형벌 중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작은 자 한 사람, 또는 제자 중 한 사람을 제자 중 한 명을 화나게 하고 악하게 대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현세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을 견디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연약한 한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큰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무시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 인간의 윤리와 도덕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디에서도 믿음으로써 율법, 즉 도덕이나 윤리, 계명을 무시하라는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도리어 제자는 도덕이나 윤리보다 더 탁월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세계에서 중요한 기본 윤리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누가복음 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

 

또한 이는 세상의 종교와 철학의 황금률이기도 합니다.

  • 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仲弓曰, 雍雖不敏 請事斯語矣. (論語 顔淵 第十二) 仲弓이 仁을 묻자, 子께서 말하였다. “문을 나가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大賓을 만나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大祭를 받들듯이 하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 것이니, 〈그리하면〉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고 집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다.” 仲弓이 말하였다. “제가 비록 不敏하지만 이 말씀을 일삼겠습니다.”
  • 性理書云 接物之要 己所不欲 勿施於人 行有不得 反求諸己(성리서운 접물지요 기소불욕 물시어인 행유부득 반구저기, 明心寶鑑 省心篇) 접물(接物, 接人)의 요체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아니하고, 행하여 뜻대로 되지 않으면 돌이켜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것이니라.
  • 忠恕 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충서 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中庸章句 제13章) 충과 서는 도와 멀지 않으니 자신에게 베들어 보아 원하지 않는 것을 나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
  • 所謂平天下 在治其國者 上 老老而民 興孝 上 長長而民 興弟 上 恤孤而民 不倍 是以 君子 有絜矩之道也.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대학장구 傳十章 釋治國平天下) 이른바 “천하를 화평하게 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이 효(孝)를 일으키고,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윗사람이 고아를 구휼하면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는다. 이러므로 군자는 구(矩:척도)로써 헤아리는 도(絜矩之道)가 있는 것이다. 윗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써 뒷사람에게 먼저 하지 말며, 뒷사람에게 싫었던 것으로써 앞사람을 따르지 말며, 오른쪽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왼쪽을 사귀지 말며, 왼쪽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오른쪽을 사귀지 말 것이니, 이를 일러 “구(矩)로써 헤아리는 도(道)라고 하는 것이다.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수호천사, 1656년 (Guardian Angel by Pietro da Cortona, 1656)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Take heed that ye despise not one of these little ones; for I say unto you, That in heaven their angels do always behold the face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in heaven their angels)“에 대한 말씀은 수호천사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각 천사에게는 분명하고 특별한 임무가 맡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34:7, 시91:11, 히1:14 및 다른 곳에서 이러한 수호천사의 존재를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편 34: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시편 91: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히브리서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또한 작은 자와 함께 하는 천사들은 천군 천사 중에서 가장 고귀한 자들이며, 가브리엘처럼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서 현현을 보고 기뻐하는 임재의 천사들과 같다는 것입니다(눅1:1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I say unto you)“라는 말씀 뒤에는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하실 때 강조하시는 성격을 띱니다(눅15:7, 눅15:10 참조). 천사의 구체적인 역할과 사역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천사에 대해 잘 알고 계셨으며, 자연스럽게 그 존재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작은 자들의 천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은 자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며, 아주 깊이 관여하신다는 것입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삶을 모두 보시고 아시며, 또한 천사들의 보고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동시적으로 하나님께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순간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삼가 ~하라(Take heed~)“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존 에버렛 밀래스 경, 잃어버린 양, 1864년 출간 (Sir John Everett Millais, Bt, The Lost Sheep, published 1864)
 
윌리엄 J. 웹 (c.1830-c.1904), 잃어버린 양, 맨체스터 아트 갤러리 (William J. Webb (c.1830-c.1904), The Lost Sheep, Manchester Art Gallery)
 

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How think ye?)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이 비유는 누가복음 15:4-6에서 더 자세히 반복되며, 거기에서 전체적인 설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마태복음에서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은 우리 주님의 생각과 가르침에서 이 비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첫 마디는 제자들의 경험에 호소하는 것으로서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더욱 도드라지게 합니다. 이 짧은 비유의 단락에서도 우리 주님은 참 목자이심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애타는 마음으로 돌아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귀하게 보시고, 잃어버린 한 양을 찾고자 온 산을 헤메이는 목자와 같이 잃어버린 한 사람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나를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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