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17장①_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형

by 적아소심 2023. 6. 25.

마태복음 17: 1-13

<요약> 예수님의 변형은 예수님이 산 위에서 변모하여 영광의 빛을 발하는 사건입니다. 공관복음서(마태복음 17:1-7, 마가복음 9:2-8, 누가복음 9:28-36)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베드로후서에도 이 사건이 언급되어 있습니다(벧후 1:16-18).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기 위해 산(나중에 변화산으로 불림)으로 갑니다. 산 정상에서 예수님은 밝은 해와 같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두 인물은 각각 율법과 선지자를 상징하는 종말론적 역할을 맡은 인물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후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예수님이 "아들"로 불립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시다 (The Transfiguration) - 막 9:1-13눅 9:28-36; 벧후1:16-21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벧후1:16-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변형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 라파엘, 1520년 (The Transfiguration by Raphael, c.1520)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의 마지막 그림입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면죄부’ 판매를 승인하여 마틴 루터의 95개조 항의문 게시를 촉발하며 1517년 종교개혁을 초래하였던 교황 레오 10세(1513-1521)의 사촌인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나중에 교황 레오10세를 이어 클레멘트 7세 교황으로 즉위)이 나르본 대성당을 위해 라파엘의 그리스도의 변형과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두 개의 그림을 의뢰합니다. 라파엘은 프랑스 나르본 대성당의 제단화로 구상된 이 ”그리스도의 변형“ 작품을 1520년 사망하기 전 몇 년 동안 작업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라파엘의 예술가로서의 발전과 그의 경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이 제단화에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연속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림 위쪽에는 변화하신 그리스도가 모세(오른쪽)와 엘리야(왼쪽) 사이에 있는 다볼산(Mt. Tabor) 위로 기적적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야고보(왼쪽), 베드로(중앙), 요한(오른쪽)이 그들 위에서 펼쳐지는 눈부신 빛과 강력한 장관에 놀라 혼비백산한 모습입니다. 아래쪽에는 다볼산(Mt. Tabor)에서 돌아오신 그리스도에 의해 기적적으로 치유될 집착하는 청년과 사도들의 만남이 전경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라파엘의 마지막 그림이며 예술가의 영적 유언처럼 보입니다. 이 작품은 16세기의 유명한 예술가이자 전기 작가인 조르지오 바사리가 쓴 그의 전기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성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1604-1605, 피터 파울 루벤스 (Transfiguration, 1604&ndash;1605 by Peter Paul Rubens, Mus&eacute;e des Beaux-Arts de Nancy)

루벤스의 그림도 라파엘 그림의 형식을 따른 것 같습니다. 복음서 본문에 변형산에서의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과 이후 산에서 내려오신 후 귀신들린 청년을 고쳐주신 사건이 연달아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습니다. 라파엘의 그림에서는 모세가 오른쪽에 있고 엘리야가 왼쪽에 있으나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변형산 아래에서의 다른 제자들과 귀신들인 청년 및 여러 사람들은 그야말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 없는 제자들의 실존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변형(The Transfiguration), 이 놀랍고 신비한 사건은 12제자 중 핵심 리더가 되는 세 제자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시점으로 앞으로 겪으실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베드로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다른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걸려 넘어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는 방해꾼이라는 책망을 받고 크게 낙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제자들도 베드로가 사탄이라고까지 심하게 책망받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라고, 더 이상 예수님께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별도로 시간을 내시어 변형산으로 가셔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현재 모습을 보지 않고 십자가의 고난 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실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및 부활승천 이후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을 위로하고, 또한 미리 하늘에 계신 그분의 영광을 미리 엿보도록 하셨습니다. 세 제자들은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가 그분께 복종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분의 아들되심을 선포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영광의 예수님의 모습을 봄으로써,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십자가는 불명예나 수치가 아니며 승리와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할 천국의 축복에 대한 예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 증인에게 일어난 변형이었습니다. 때가 되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제자(사도)들은 성육신과 육신의 부활, 의인의 몫이 될 영광에 대한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이 영광스로운 모습은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우리 주님을 그분의 고난과 그 결과에 엄숙히 임명하신" 지상 생애의 정점이었습니다.

 

1절에서 "엿새 후에( 6일 후)"라고 하였는데, 누가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눅9:2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베드로의 고백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발표 시점부터 계산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은 여전히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에 있었지만 정확히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 동안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날은 특별히 그 전날 밤에 위대한 고백이 이루어진 날과 같은 요일이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으며, 성경에서 숫자의 일반적인 의미를 고려할 때 6일은 세상과 매일의 노동을 의미하고 일곱째 날인 "6일 후"는 하늘과 안식을 상징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핵심 제자들은 이미 야이로의 딸의 방에서 죽음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목격했으며, 나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고난당할 때에도 함께하였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본 사람은 그분의 피땀을 바라보며 힘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그 피땀이 바로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 제자들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내면의 삶과 본성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에너지와 열심과 사랑, 그리고 교회를 세우게 될 때  그가 맡게 될 역할을,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오랜 세월 고난을 받으며 신성한 계시를 받아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어 곧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고 선한 전쟁을 치르게 될 사람이었기 때문에 등 여러 가지 이유로(물론 이러한 평가는 그들의 삶의 결과를 사후에 해석한 것이지만) 선택받았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이며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행12장).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변형의 장소에 관한 유일한 전통은 에스드라에론 평야(the Plain of Esdraelon=이스르엘 골짜기 또는 므깃도 골짜기)의 북동쪽에 약 1800 피트 높이의 아름다운 외딴 산인 다볼산(Mt. Tabor)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전통은 서기 4세기에 예루살렘의 시릴(St. Cyril of Jerusalem)과 제롬(St. Jerome)에 의해 처음 제기된 이후 16세기까지 주석가와 여행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채택되고 유지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더 정확한 조사와 역사적 비평은 이 식별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다볼산의 정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역대상6:77에서 그 경계에 도시와 교외를 포함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것은 강력하게 요새화되었고 전체 지역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폐허는 여전히 발견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시에는 마을과 요새가 언덕의 평평한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변형의 모습을 보여주실만한 장소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과 제자들은 당시 갈릴리 외곽의 바네아(Paneas) 동네에 남아있었습니다. 거기서 에스드라에론까지는 약 3일의 여정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에는 그러한 이동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갈릴리로 돌아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예수님의 변형사건 이후입니다(22절, 막 9:30 참조). 따라서 오랜 전통적 해석인 다볼산보다는 가이사랴 근처에서 우리 이야기의 높은 산을 찾아야합니다.

 

그 지역에는 헬몬산이 가장 유력한 장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튼 복음서 저자들이 이 사건이 정확히 어디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제자(사도)들의 깨달음을 위해, 즉 사도들이 변형에 관한 가르침과 그 이후의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후대에 이 언덕을 언급하면서 단지 "거룩한 산"(벧후 1:18)이라고 불렀으며, 누가는 주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이곳으로 가셨다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변형, 1872, 칼 블로흐(덴마크) [Transfiguration of Jesus (1872), Carl Bloch (Danish, 1834-1890)]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변화되셨습니다!(2절) 누가는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9)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였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그 행위에서 신성한 영광이 눈에 보이는 빛으로 흘러나왔습니다. 그 현현(임재)은 초월적이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할 감동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벧후1:16-18). 그 광경은 스데반의 얼굴을 "천사의 얼굴처럼"(6:15) 빛나게 했던 광채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비췄던 영광(34:29)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하자 제자들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정신없는 중에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절)“ 누가에 따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거의 떠날 때였다고 합니다(눅9:33).

 

베드로는 당황하고 기쁨과 놀라움에 휩싸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막9:6). 그는 흥분과 열정으로 침묵을 지킬 수 없었던 그는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외쳤습니다. 이 간절한 외침인 “주여, 우리가”에서 “우리”에는 모세와 엘리야도 포함됩니다. 여기에 "초막(장막) 셋(σκηνάς)을 짓되(제가 만들겠습니다)".... 나뭇가지와 풀로 만든 장막은 여행자들이 야영할 때 사용하거나 초막절을 지킬 때 사람들이 세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과 두 선지자만을 언급하고 자신과 동료 제자들은 제외하고 세 개의 초막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고 하자 혼란스럽고 마음이 급한 그는 이 세 사람이 남아 있다면 어떤 종류의 거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이 위대한 환상의 기쁨을 한없이 연장하고 싶었고, 정복자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갈망과 옛 언약의 영속성으로 그 안전한 산 정상에서 왕국의 법이 선포되고 모든 사람이 위대한 율법 제정자이자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또한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일이 연기되거나 유보될 수 있으리라는 내심의 희망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떠났고, 베드로의 사려 깊지 못한 요청에 대해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아버지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 그들의 귀와 마음과 영혼을 크게 때렸습니다.

 

베드로가 경황없는 중에 말을 마치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hear ye him.)”(5)

 

밝은 빛난 구름이 그들, 즉 우리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었습니다. 구름이 예수님을 덮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제자들에게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첫 번째 성막에 내려온 "구름 기둥"(출애굽기 33:9), "성전 봉헌식 때 여호와의 집에 가득했던 구름"(왕상8:10)을 떠올리게 했을 것입니다. 후대의 히브리어로 쉐키나(the Shechinah), 문자적으로 “거주” 또는 “임재”라는 뜻으로, 이 여호와의 임재(abiding presence of Jehovah)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미쉬칸mishkan)와 헬라어(스케네skené)로 성막을 뜻하는 단어와 연결되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성막의 언약궤(민10:35-36)와 솔로몬의 성전(왕상8:29)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로 소개됩니다. 당시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타르굼(Targums) 또는 의역본(Paraphrases)은 이 단어를 신성한 이름의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내가 네 안에 거하리라"라고 되어 있는 반면, 요나서의 타르굼에는 "내가 내 쉐키나를 거하게 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슥2:10, 슥8:3). 이 순간에 소리와 구름이 뒤따른 그 모습은 이제 손으로 만든 장막이 필요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하나님의 장막이며(요1:14 참고),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장막(예수 그리스도)이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계21:3)“는 것이며, 그분이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쉐키나“라는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세례 때 들었던 말씀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마3:17 참고), 그 형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 말씀은 예수님 존재의 위대성을 선포하는 것으로서 인자의 인간 의식(the human consciousness of the Son of Man)에 대해 언급되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성취될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합당하게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둠과 실패로 보이는 시간, 고통과 죽음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선한 기쁨"을 "만족"시키셨고, 아버지는 예수님을 인류 구속을 위한 완전한 희생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교훈, 심지어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도 아닌 오직 인자의 말씀이 그들의 충성을 명령하고 그들의 신앙과 삶의 지침이 된 것입니다. 이는 오직 그들 안에서 아버지가 온전히 계시되었고(히1:1-2)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참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마24:35).

 

히브리서1:1-3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마태복음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해처럼 빛난 모세의 얼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34:30), 구름 때문에 감히 꼼짝할 수 없었던 성전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처럼(왕상8:11)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말없이 바닥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과연 살 수 있을까요? 이 대목을 쓸 때 마태가 고소하게 생각하며 빙긋 웃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나아와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7) 그들이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고 예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8절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모세와 엘리야는 가고 예수님만 홀로 남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고 예수님만 남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율법과 선지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대체되었습니다. 율법은 일시적이고 복음을 소개하는 입문서로,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형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미래 영광에 대한 실재를 보았는데, 죄악된 세상에 살던 육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태양처럼 빛나고 하늘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산에서 변화하셨을 때 그의 옷이 눈처럼 되었습니다. 이는 하늘의 광채가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성도가 의의 빛에 비취어 그에게 합하여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남아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변형의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머지 제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적 성장 단계가 낮은 제자들에게 이 엄청남 사건은 그 환상에 대한 불신 또는 그 의미를 왜곡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남들로부터 듣는 것보다 직접 본 것을 더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단순히 "그들이 본 것"을 의미하며 영어 단어처럼 보는 사람이 꿈의 상태를 생각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습니다.

 

이때 세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0)?” 엄청난 광경을 본 세 제자는 엘리야의 출현, 더 나아가서는 서기관들의 전통과 관련된 엘리야마저 홀연히 가버린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암시합니다. ‘엘리야가 와서 길을 준비해야 했다면 왜 그렇게 잠깐만 왔다가 갔습니까?’라는 심중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례 요한이 엘리야로서 왔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임스 티소, 예수님의 변형(The Transfiguration, James Tissot, 1886-94)
 

예수님의 변형 사건이 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지 불과 며칠 후에 그 놀라운 장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변형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6:2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충격을 받고 황망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강하게 항의하며 반대하였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화를 내시며 "사탄"이라고까지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변형은 3년 반의 사역 중 약 3년 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기적을 보고,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능력과 실체에 대해 분명하고 객관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고, 그분이 정말 메시아인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아주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고 제자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예수님께서 형언할 수 없는 빛과 영광을 나타내며 그들 앞에 서 계신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장차 왕으로 다스리실 때 그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보이시되, 제자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잠시 동안만 변화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토록 조심스럽게 자신의 육체적 영광을 가렸던 분이 잠시 동안 그 영광을 스스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 경험의 전체 목적은 그 제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일을 기억하고 우리가 교묘하게 고안한 우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을 여러분에게 알렸다고 말할 때 베드로가 얻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벧후1:16-18). 우리는 그분의 육체적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이 메시아이시며 메시아로 통치하실 것임을 압니다.

 

변형 사건의 요점은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산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사도들이 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 하지만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맥상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메시지였고, 그것이 바로 변형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신중하고 섬세하며 창의적이고 그 수가 풍부한 스승이신지요? 그 놀랍고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변형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임박한 죽음을 제자들에게 전하려 하셨고, 제자들이 그 소식에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며칠 후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육체적 영광을 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겸손하고 섬세하셨지만, 그 본모습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본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제자들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겸손하시고, 섬세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분인지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