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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16장(中)_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by 적아소심 2023. 5. 22.

마태복음 16장 (13-20) - 베드로의 신앙고백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다(막 8:27-30눅 9:18-21)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베드로의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 (Peter Publicly Professes that Jesus is Christ, the Son of God) - Source : Right Rev. Richard Gilmour, D.D. Bible History: Containing the Most Remarkable Events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with a Compendium of Church History (New York, NEW YORK (NY): Benziger Brothers, 1904) 169
피에트로 페루지노,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 1482년경 (Pietro Perugino, Christ Giving the Keys to St. Peter, c.1482)
피터 카스텔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는 예수님, 1598년 (Jesus Giving Keys of Kingdom to Peter. Painting by Peter Castello, 1598)

니콜라스 푸생,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시는 그리스도, 1630년대 (Nicolas Poussin, The Sacrament of Ordination (Christ presenting the Keys to Saint Peter), 1630s)
 

13절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빌립보 가이사랴(Cæsarea Philippi)에 이르렀습니다. 복음서상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두로(아래 그림 8번)와 시돈 해안에서 시돈(9번)을 지나 갈릴리 바다의 동쪽 해안(10번) - 막7:31
  • 배를 타고 서쪽 해안의 막달라와 달마누타(Magdala and Dalmanutha) (11번) - 마태15:39; 막8:10
  • 다시 호수를 건너(막8:13) 동쪽 벳새다(12번) - 막8:22
  • 그리고 나서 가이사랴 빌립보(13번)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동경로 (7번부터 13번까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b) - 헬라어는 관사 앞에 접두사를 붙여 "사람"을 강조하는데(ο ἄνθρωποι; hoi anthropoi - "the" men), 이는 사람들의 의견과 하나님의 계시를 대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제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앞에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움으로 다가옵니다. 이 질문은 물론 예수님에 대해 "그 사람들이"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 전에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무리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먹을 것을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 지긋지긋한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면서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6:22-59)

 

예수님은 무리들이 당장의 떡보다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많은 무리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어떻게 먹고 마실 수 있는가라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당장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모두 떠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6:66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떠났을 때 주님은 남아 있던 열두 제자를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요6:67).

이에 다른 제자들의 대변인이자 리더인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8-69)"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다시금 마태복음17:16절의 신앙고백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제자들은 많이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전 마태복음 16장에서 4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후 제자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마16:8)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또한 그 전에는 마태복음 15장에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경계하시면서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15:16)“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할 것이라며 그를 "마귀”라고 하셨습니다(요 6:70).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거의 마지막 시험을 받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시험은 믿음이냐 믿음이 없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시험이요,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르느냐 아니면 떠나느냐는 갈림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15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헬라어로는 Υμεῖς δὲ τίνα με λέγετε εϊναι (But whom say ye that I am?) 즉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직전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이 일반 사람들의 객관적인 관점에 대한 것이었다면,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은 사람들과 상관없이 제자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대답을 요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말하는가?” 이는 제자들에게 중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참된 본성에 대한 믿음의 지식을 시험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6 개월 중에 이제까지 거의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계속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얼마 후에는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자들도 이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16절에서 베드로가 즉시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시몬 베드로는 따뜻하고 열성적이며 진취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의 대변인이요 리더로서 제자들과 평소 나누었던 믿음의 이야기들을 통해 적어도 그들의 마음의 정서나 믿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 스스로의 믿음, 그리고 다른 동료들의 믿음을 대표로 고백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는 짧지만 믿음이 충만하고, 매우 통찰력이 있는 신앙고백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 하나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다른 이들에게 생명의 샘이시며, 이것으로 이방인의 우상들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모든 선지자들이 창세 때부터 예언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다리던 참 메시야,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선지자, 제사장, 왕의 모든 직분을 포함하며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인격, 그리고 이 메시아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신성한 인격,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사나 사람처럼 창조에 의해서도 아니고, 성도처럼 입양에 의해서도 아니고, 법관처럼 직분에 의해서도 아니고, 본성상 아버지의 독생자이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시고, 아버지와 하나이시고,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랑? 믿음? 은혜?....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한결같고 일관성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동의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이나 감정을 합쳐서 만들 수 있는 사상이나 이론, 신념 등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단순한 사람으로 여겼고, 예수님에 대한 무리들의 가장 고상한 생각은 예수님을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그러나 베드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과 동일한 생명을 그 안에 가지고 계심이라 했습니다. 무리들은 참으로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판단하였으나 장차 오실 선지자로 모든 선지자보다 뛰어난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무리들이 이해한 것보다 더 높은 의미에서 그분의 선지자 직분을 취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다른 모든 직분을 취하고 그를 약속된 메시야로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18절의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 수세기 동안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본문을 다룰 때, 말씀의 본래적 의미를 덮어 버린 "신학의 뒷 생각들"을 우리의 마음에서 지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의 말씀이 실제로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전달했는지를 깨닫기 위해 노력할 때까지는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논쟁을 유보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를 파악했을 때 그것이 고대 또는 현대의 후기 논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결정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인 것입니다.

 

(1) 베드로(페트로스)와 반석(페트라) 사이의 연결(헬라어의 단어는 πέτρος와 πέτρα로 성별이 다르지만, 우리 주님이 사용하신 아람어에서는 동일함)이 특별히 두드러지게 드러나도록 의도된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이 신앙고백을 통해 새로운 부름의 자리에 올라섰고, 새로운 이름에 합당하게 되었습니다.

 

(2) 그러나 베드로가 다음 절의 "반석"과 동일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람어에서는 두 절의 단어 사이(베드로와 반석)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셨을 가능성, 또는 전도자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 의미가 다른 두 단어, 즉 πέτρος(페트로스)는 "돌" 또는 바위 조각이고 πέτρα(페트라)는 “바위” 그 자체인 두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마태 자신이 느낀 구별을 표시하려고 의도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람어로 Cepha(게바)는 페트라보다는 페트로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구별을 가정하면 반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뒤따릅니다. 주관적으로 베드로의 믿음을 가리킬까요? 아니면 객관적으로 그가 고백한 진리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 자신일까요? 사건의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균형은 마지막 견해에 유리하게 기울어지는 것 같습니다.

❶ 고린도전서 10:4에서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고, 고린도전서 3:11에서 기초는 그리스도입니다.

❷ 구약의 시(詩)에서는 반석의 개념을 사람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함과 견고함과 연관시켰습니다(신명기32:4; 신명기32:18; 사무엘하22:3; 사무엘하23:3; 시편18:2; 시편18:31; 시편18:46; 이사야17:10; 하박국1:12].

❸ "이 성전을 헐라"(요2:19)는 말씀과 그 형태가 유사하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가 중요한 표정이나 몸짓으로 표시된 것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질 반석은 베드로의 고백의 주제였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의 신비 안에서 그분 자신이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을 의미했다면 "너는 베드로라, 내가 내 교회를 네 위에 세우리니"라는 더 단순한 형태가 더 명확하고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18절에서 “내 교회를 세우리니”의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구절이며, 우리 주님의 기록된 가르침 전체에서 이 단어가 한 구절(마18:17)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발견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사용은 모든 면에서 중요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의심할 여지없이 구약성경의 그리스어에서 주님의 "집회" 또는 "회중"(신명기18:16, 신명기23:1, 시편26:12)에 사용되었던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분적으로는 그리스 정치와 연관성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사법권과 입법권을 가진 자유 시민의 모임으로, 외국인과 노예는 모두 배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용어의 사용은 제자들의 교육에 있어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제자들은 왕이 눈에 보이는 머리로서 지상의 보좌에 앉아 있는 왕국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왕국이 지상의 정치에서 우리가 대중 정치 또는 민주 정치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사회, 즉 의회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왕이신 그분은 그 사회를 자신의 사회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사회의 진정한 머리이자 창시자였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그분이 지금 선택한 단어가 묘사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교회를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건축"이라는 개념에 그렇게 쉽게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시에는 사회와 사회 구성원이 만나는 구조가 지금처럼 같은 용어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그 유사성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하였습니다.  마태복음5:14절의 "산 위에 있는 동네(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처럼, 요한복음15:1절의 "포도나무"처럼, 그 말씀이 선포된 풍경이 이 단어를 암시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딤전3:15)이었고 "거룩한 성전"(엡2:21)이었습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졌습니다(고전14:3-4, 엡4:12). 그 일에 수고한 사람들은 "지혜로운 건축자"(고전3:10)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건축의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주장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그분은 최고의 마스터 건축가이십니다. 그분의 제사장적 성격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분은 동시에 제사장이자 희생제물이시므로 지금 제시된 양상(영적 진리의 필요성에 대한 은유의 일관성)에서 그분은 동시에 새 사회의 창시자이자 기초가 되십니다.

 

(교회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 전도를 하고,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말입니다. 마태복음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보다 늦게 저술된 것을 고려하면 나중에 후대에 기술한 말이거나, 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따라서 나중에 교회라는 말을 썼거나 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를 전제로 하였습니다.)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다른 비유적 사고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1) 천국 열쇠라는 말에는 왕궁의 재무관이나 시종과 같은 최고 책임자의 존재를 암시하거나 오래된 히브리어 문구를 사용하여 "집안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사22:22)의 경우처럼 관직의 열쇠, 성문의 열쇠, 보물의 열쇠가 그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다윗 가문의 열쇠는 왕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열어도 닫을 수 없고 닫아도 열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계3:7). 그러나 그 권세는 이제 사도라는 이름으로 주님의 대리자로 표시된 종에게 위임되었으며,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행14:27, 행15:7) 베드로의 사역 이후의 역사는 베드로가 그렇게 부여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한 증거였습니다.

 

(2) 이와 함께 또 다른 이론으로, 이 구절의 후반절에서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은 신성한 지혜의 보물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여겨졌습니다(마13:52). 그들은 그들의 직분에 임명되었을 때 그 상징으로 "지식의 열쇠"(누가복음 11:52)를 받았는데, 이는 통역자의 집인 랍비들의 베스 미드라쉬의 보물 창고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훈련시켜 오셨고, 베드로의 고백은 그 훈련이 지금까지 그 일을 해왔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천국에 관한 교훈을 받고 그 보물에서 새 것과 옛 것을 찾아내는 서기관"(마13:52)이 될 자격을 갖추었고, 이제 그 직분에 들어가기 위한 증표로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를 제사장이 아니라 교사이자 선포자로 만들었습니다. "묶는다"와 "푼다"에 관한 다음 단어는 그 상징적 행위를 말로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그것들 역시 제사장이 아니라 서기관의 직분에 속하며 죄를 유지하고 용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 권능이 베드로와 그의 형제 사도들에게 부여된 것은 사실이지만(요20:23 참고), 여기서는 그 권능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해석할 때, 이 말씀은 주로 입법 또는 해석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지 개인에 대한 사법적 처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매고 푸는 것은 해석을 위한 것이지,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도 베드로의 뒷이야기는 그 말씀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목에 멍에를 메려는"(행15:10) 유대인들의 시도을 단호히 배격하셨을 때, 그분은 하늘에서도 풀린 것을 풀고 계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능은 그 후에 사도 일행 전체, 또는 아마도 제자들 전체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입니다(마18:18절 참조).

윌리암 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Jesus asking his disciples whom the people say he is. The Life of Jesus of Nazareth by William Hole(1846–1917) (Eyre and Spottiswoode, c 1905)]
제임스 티소, 베드로의 신앙 고백
제임스 티소,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예수님(사탄아 물러가라!)

위 그림에서는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며 예수님께 칭찬을 받는 모습이지만 그 아래 그림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한쪽으로 모시고 가서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도록 설득하려다가 도리어 크게 책망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고 있는 다른 제자들도 무척 당황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둘러싼 영적 전쟁은 치열합니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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