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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16장(下)_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by 적아소심 2023. 5. 22.

마태복음 16장 (21-28) -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이르시다(막 8:31-9:1눅 9:22-27)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Aanonymous, The Rebuking or Calling of Saint Peter, circa 1600 (작자 미상, 베드로를 책망 또는 부르시는 예수님, 1600년경)

위 그림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인지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장면인지 불분명합니다. 작가 미상의 그림이지만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이어서 작품의 타이틀도 애매합니다. 본문에 맞추어 해석하자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호하고 그 길을 가시는 것을 막아보려다가 크게 혼나고 상심하고 있습니다. 전 단락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한 후 크게 칭찬 받은 것이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다가 넘어지는 것이 우리 인생들의 신앙여정이 아닐런지요. 그래서 매번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않고 염치없지만 주님만을 붙잡고 가는 "염치 없는 신앙", "오직 은혜만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임스 티소(프랑스, 1836-1902),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1886-1896 (James Tissot, French, 1836-1902. Get Thee Behind Me, Satan, 1886-1896)

이제 초점은 예루살렘으로 바뀝니다. 다음 두 장(17, 18장)은 갈릴리에서의 사역과 가르침을 다루고 있지만, 이제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의 최종 목적지로 예루살렘을 거론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일어난 장소와 장소인 갈릴리와 고별하는(farewell) 여정이 됩니다.

 

이제 초점은 예루살렘으로 바뀝니다. 다음 두 장은 갈릴리에서의 활동과 가르침을 다루고 있지만, 이제 처음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의 최종 목적지로 예루살렘을 지시하기 때문에 예수의 사역의 대부분이 일어난 장소와 장소와 고별하는 여행이 됩니다. 베드로는 방금 예수가 메시아라고 선언했고, 유대 민족의 메시아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윗이 차지했던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대관식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큰 고통과 죽음의 길로 묘사합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예언 중 첫 번째 예언은 베드로가 고백하는 승리의 장면을 크게 퇴색시키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요나의 표적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해했던 것보다 더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고난의 십자가를 언급하신 이유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믿음, 즉 주님과의 관계의 신앙이 있을 때 고난과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2절 베드로가 예수님께 “붙들고 항변하여”라는 말은 “옆으로 데리고 가서 항변(개역개정) 또는 책망하였는다 (ἐπιτιμάω; epitimáō)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에피티마오“라는 뜻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경고하여 금(禁“)하다”는 뜻입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을 옆으로 조용히 모시고 가서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다시 한번 고려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Be it far from thee, Lord: this shall not be unto thee.Ἵλεώς σοι Κύριε οὐ μὴ ἔσται σοι τοῦτο)"라는 베드로의 만류의 간청에서 헬라어 ἵλεως(hileos; 힐레오스)는 ”하나님이 막아주소서“라는 뜻이기보다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고난의 길에서 예수님에게 이 고통을 가져다주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의 기도 또는 만류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보호하려는 자비의 말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유혹의 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오해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의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데 치명적인 연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만류의 말이 왜곡되어 예수님이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Σατανᾶς; Satanas)“이라는 말은 마태복음4:1-11절에서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시험하려고 시도하는 유혹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통을 피하고, 표적을 주며, 세상 권력을 차지하려는 마귀의 유혹은 모두 요나의 표적을 구하고 종교적,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이 필연적인 길과 완전히 상반됩니다. 마귀를 지칭하는 사탄은 욥기 1-2장에서 '고발자'의 호칭으로 사용된 '사탄'에서 유래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잘못 이해하였고, 예수님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길을 가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역할을 맡고 말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을 바로잡기 위해 베드로에게로 향합니다.

 

마태복음4:10에서 예수님이 마귀를 쫓아내신 것과 마태복음16:23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사이에는 대조가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은 유혹하는 자에게 ”떠나가라“고 말씀하시지만(ὑπαγε 휘파게), 여기서 예수님은 "내 뒤에"라는 위치를 덧붙이십니다. 베드로는 마귀처럼 쫓겨나거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내버려지는 대신 배우는 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위치를 차지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영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인간의 권력과 영광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이 메시아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그 길을 배워야 합니다.

도미네, 쿼 바디스? 애니발레 카라치, 1062년작 (Domine, quo Vadis? by Annibale Carracci, 1062)

"쿼바디스(quo Vadis)는 "어디로 행진하십니까?(Where are you marching?)"라는 뜻의 라틴어 문구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디로 가십니까?(Where are you going?)" 또는 고어(古語)의 시적표현으로 "Whither goest thou?"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 문구는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아피아 길(Appian Way)에서 만났을 때 처음 한 말과 관련된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했습니다. 외경인 베드로 행전(베르첼리 사도행전 XXXV, 서기 2세기 후반)에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정부의 손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피해 도망치다가 도시 외곽의 길을 따라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라틴어 번역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Quo vadis?"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Romam eo iterum crucifigī" ("I am going to Rome to be crucified again") (로마 에오 이터룸 크루시피기;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십니다(위 그림 참조). 그 후 베드로는 크게 회개하고 용기를 내어 로마로 돌아와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합니다. 로마의 도미네 쿼바디스 교회는 전통적으로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곳에 세워졌습니다. 질문으로서의 "쿼 바디스"라는 단어는 라틴 벌 게이트에서도 최소 7번 등장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초기 제자들에게는 도전이었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난을 피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의 소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힘들지만 궁극적으로 헌신할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대해 여러가지 대안을 제시하여 좀 더 쉬운 길을 가도록 합니다. 1963년 디트로이트 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자신이 죽을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라고 한 말은 자신의 길을 바꾸려고 하는 세상의 유혹과 걸림돌, 친구들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로서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삶과 죽음의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라는 소명에 동기부여를 줍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보복하는 복수의 문화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뺨을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하는' 삶의 방식으로 부르십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걷는 제자도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각자 개인적으로 다를 수 있고, 우리가 견뎌야 하는 고통은 우리의 위치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종종 선의의 이유로 우리 앞에 걸림돌을 놓거나 우리 문화의 일부인 무수히 많은 산만함(우리의 주의를 끄는 잔재미 등)과 무감각한 요소들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할 수 있습니다. 유혹자가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는 길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시도할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생명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영혼'으로 번역되는 프쉬케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내세로 가는 '분리 가능한' 영혼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영혼'은 삶의 본질 그 자체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영혼'을 판다는 개념은 불멸의 삶을 저주하는 거래가 아니라 살도록 부름 받은 삶을 배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스타브 도레이, 이교도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승리, 1899 (Gustave Dore, The Triumph of Christianity over Paganism, 1899)

천사와 함께 공중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중앙에 번개를 손에 들고 있는 자는 제우스 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절대자의 위치에 있었던 제우스뿐 아니라 각종 이교적인 무습을 한 무리들이 심판을 받는 모습입니다.

궁극적으로 제자도의 삶이 갈망하는 것은 현재 너머에 있는 소망, 즉 하늘나라가 이 땅에 침투하는 어떤 경험입니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자기부인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하나님이 오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세상의 불의를 뒤집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 신학은 지옥 그 자체"라는 위르겐 몰트만의 명언이 기억에 남습니다. 소망 없는 고난의 길은 마조히즘 철학에 불과하며, 이 고난은 소망뿐만 아니라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소망'을 낳아야 합니다(롬5:5-6).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에는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이 영광으로 오시는 인자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이 예수님이 그의 나라에 오시기 전에 그곳에 서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들은 것은 역설적으로 십자가 또는 부활과 관련될 수 있지만,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들로서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통찰하는 순간과 미래의 천국 실현을 모두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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