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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17장②_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심

by 적아소심 2023. 6. 27.

마태복음 제17장➁

 

마태복음17:14-21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9:14-29; 9:37-43a; 눅17:5-10참조)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어떤 사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음

 

14 And when they were come to the multitude, there came to him a certain man, kneeling down to him, and saying, 15 Lord, have mercy on my son: for he is lunatick, and sore vexed: for ofttimes he falleth into the fire, and oft into the water. 16 And I brought him to thy disciples, and they could not cure him. 17 Then Jesus answered and said, O faithless and perverse generation, how long shall I be with you? how long shall I suffer you? bring him hither to me. 18 And Jesus rebuked the devil; and he departed out of him: and the child was cured from that very hour.

 

19 Then came the disciples to Jesus apart, and said, Why could not we cast him out? 20 And Jesus said unto them, Because of your unbelief: for verily I say unto you, If ye have faith as a grain of mustard seed, ye shall say unto this mountain, Remove hence to yonder place; and it shall remove; and nothing shall be impossible unto you. 21 Howbeit this kind goeth not out but by prayer and fasting. (KJV)

보티우스 아담스 볼스베르트 플랑드르(1580-1633),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시는 그리스도 1590-1622, 스코틀랜드 국립 현대 미술관 (Boetius Adams Bolswert Flemish(1580-1633), Christ heals a demon-possessed boy 1590-1622, Scottish National Gallery Of Modern Art)

데이비드 마틴, 예수님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 David Martin(1639-1721), Jesus Heals an Epileptic Boy (마태복음17장)

 

14절에서 본문 장면은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 위에서 내려와 무리에게 왔을 때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튿날 아침에 산에서 내려오셨다고 합니다(눅9:37).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밤을 지새우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라파엘이나 루벤스의 예수님의 변형 모습과 귀신 들린 아이 나오는 장면이 병행되어 있는 것은 동시의 사건이 아니라 단지 산 위의 영광의 장면과 산 아래의 고난과 불안의 장면을 대조시켜 좋은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변형의 사건은 밤에 있었고, 이튿날 아침에 산에서 내려와서 귀신 들린 아이를 두고 소란을 피우던 제자들과, 서기관 그리고 무리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내려오실 때 나머지 제자들이 무리들 및 서기관들과 논쟁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때 무리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주님께 달려가 문안하고, 주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그들과 논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고,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서술하고 있습니다(막9:14-29). 그리고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책망하시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위대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에 대해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과 세 명의 주요 핵심 제자들이 산에 가 있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시내산에 모세가 없을 때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던 것처럼(출애굽기 32장), 이제 스승이신 예수님과 핵심 리더들이 산 위로 올라가자 아홉 제자들은 믿음이 흔들렸고 그들에게 부여된 기적의 능력을 드러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전파하라고 보내실 때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고(마10:1; 마10:8), 그 후에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며 성공적으로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자들이 함께 아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책망하시는 말씀에서 우리 주님은 먼저 제자들과 그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이 연약한 것을 책망하시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17:20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이 말씀에 포함된 책망은 오직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이 약했지만 믿음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렇게 심한 책망을 받을 상황에 있었던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의 범위는 제자뿐 아니라 무리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는 특히 마가복음 9:14절에 언급된 서기관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제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지금 그들에게는 너무 힘든 사건, 즉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으로도 고칠 수 없는 귀신을 만난 것처럼 그들을 모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과 정체성을 수없이 보여 주셨기 때문에 서기관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의 불신앙에서 비롯된 매우 고의적이고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믿음이 없고 패역한(비뚤어진) 세대라고 부르면서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how long shall I be with you? how long shall I suffer you?)“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제자들이나 아이의 아버지를 적용해 보면 오히려 연민의 마음이 들지만, 오히려 경황이 없는 중에 아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나 동정보다는 제자들을 몰아붙이는 서기관들을 염두에 두고 책망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제자들뿐 아니라 서기관들을 꾸짖으시고 아이의 아버지를 향하여 이르시되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명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아이가 외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눅9:38).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아들이 귀신 들렸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올 때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렸습니다(막9:20; 눅9:42).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 아이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막9:25). 그리고 바로 그 시간부터 그 아이는 치료되었습니다.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벽했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녀를 믿음과 기도의 품에 안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우리 부모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그들을 치료할 수 있고, 또한 기꺼이 치료해 주십니다! 코빅19 팬데믹 이후 현재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특히 대학생들의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4% 정도밖에 안 되고, 중고생은 2% 정도밖에 안 된다는 충격적인 통계도 심심치 않게 돌아다닙니다. 이제 ”다음 세대“라기보다는 ”다른 세대“가 되어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자녀들을 안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우리 주님께서 다음 세대의 우리 아이들을 Touch하시어 고쳐주시길 기도합니다.

 

이후에 제자들이(산 아래 남아있던 아홉 제자들) 조용히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19)“ 그들은 지금도 실패의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 대처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도 주님의 책망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스스로를 "믿음이 없는 세대"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무리와 서기관 앞에서 침묵했고, 아마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이전에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권능을 잃어버릴까 봐 노심초사하며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숙소로 왔을 때, 왜 자신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냐고 물었습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And Jesus said unto them, Because of your unbelief: for verily I say unto you, If ye have faith as a grain of mustard seed, ye shall say unto this mountain, Remove hence to yonder place; and it shall remove; and nothing shall be impossible unto you.)“

 

예수님의 말씀으로 제자들도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에 포함되는 것이 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제자들의 믿음이 작다고 표현하였지만 영어성경에서는 불신앙 때문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랍어와 에티오피아어 버전은 "너희의 작은 믿음 때문에" 또는 "너희 믿음이 작기 때문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사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의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완전히 결핍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믿음은 아주 작았고 불신앙은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실 때 제자들은 믿음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있었더라면 분명 역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겨자씨의 크기나 성질, 뜨겁고 매운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한 알만한“은 ”한 알처럼“의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단지 사도들이 이 지극히 작은 씨앗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후에 언급하신 것과 같은 능력이나 결과가 뒤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완전한 믿음과 그 결과에 관한 교훈을 주셨는데, 그 후에도 시든 무화과나무(마21:21)와 다른 곳(눅17:6)에서도 반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마13:32)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작고 약하지만 진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작고 보잘것없음을 표현하는 유대인의 속담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좋은 토양과 화창한 하늘 아래에서 자라면 마치 나무처럼 되어 새들이 가지에 둥지를 틀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지만 그 안에 큰 발전과 성장의 힘이 들어 있고 작은 알갱이에서 풍성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믿음을 그것에 비유합니다.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 많은 사람들은 이를 예수님 말씀을 과장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바울도 비슷한 맥락(고린도전서13:2)에서 "내게 모든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으리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산을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속히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기적적인 능력의 자의적이고 무모한 표현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신앙의 목적을 위해 그러한 조치가 필요하다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된 사람의 믿음에 따라 이행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중세의 작가들과 후대의 주석가들은 믿음이 가져다준 엄청난 효과에 대한 많은 사례를 제시합니다. 물론 그러한 기적의 증거는 결함이 있고 현대의 비판을 만족시키지 못하지만, 그러한 전승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b)” 믿음의 사람은 실제적으로 능력이 있으며, 도덕적, 물질적, 영적 어려움은 그 앞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능력의 원천은 기도와 금식에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Howbeit this kind goeth not out but by prayer and fasting.)“

 

여기에서 ”이런 류“ 즉, ”이런 종류“는 귀신에게 귀속되는 악의 형태의 강도에 따라 일반적인 차이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귀신을 쫓아낼 정도의 능력을 위해서 "기도와 금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더 큰 강도의 영적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사건의 상황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아직 금식하지 않았으며(마9:14-15), 그들이 믿음이 약하고 기도에 게을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말씀은 "금식"의 진정한 근거와 동기, 그리고 참된 기도가 수반될 때, 우리가 높은 영적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의 환상(행10:9-10)과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에 따른 바울과 바나바의 임명(행13:2)은 모두 금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선교 사역의 사건으로 자신에게 닥친 "주림과 목마름" 외에도 자신은 "자주 금식했다"(고후11:27)고 말합니다.

구스타브 도레,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예수님 (Jesus heals a silent demoniac, 1878 by Paul Gustave Dore)
 
윌리엄 브래시 홀(1846-1917, 스코틀랜드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삽화가, 판화가, 조각가로 산업, 역사, 성서 장면으로 유명),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한 소년을 고치시는 예수님 [William Brassey Hole(1846–1917, Scottish Victorian painter, illustrator, etcher, and engraver, known for his industrial, historical and biblical scenes), Jesus about to heal a boy from whom his disciples had failed to cast out a devil.]
제임스 티소, 다볼산(변화산?)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심 (James Jacques Joseph Tissot, The Possessed Boy at The Foot of Mount Ta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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