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16장(上)_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by 적아소심 2023. 5. 11.

마태복음 제16 장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막 8:11-13눅 12:54-56)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막 8:14-21)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2)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왜 표적을 요구할까요(마16:1)? 이것은 물론 테스트(πειράζω)로, 긍정적인 테스트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이런 테스트를 통해서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표적을 보여줄 수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한 대리자라는 주장을 증명하고, 심지어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마태복음16:1-12은 마태복음14:13-21과 15:29-39의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을 되돌아보면서 16:13-20절의 베드로의 고백과 메시야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예시합니다(마16:21-28). 예수님은 아직 공개적으로 당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예수님이 "오실 분"(마11:4-6)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만한 일련의 강력한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분명하고 명백한 표적을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니면 마귀인 바알세불과 한통속인지 의심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제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직접 행하시는 기적들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직접 행하시는 기적이 아닌, 하늘로부터 즉, 천둥 번개를 마음대로 내리는 것처럼 외부적인 초자연적 표적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예수님이 다시 바리새인들을 만날 때 그들은 이혼법에 대한 해석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마19:3),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체포하려고 하였습니다(마21:45).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서로 공동 협력하는 것은 성경 외의 문서에서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매우 특이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신학적, 신앙적으로 물과 불과 같아서 서로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사두개파가 예루살렘에서 그 먼 변방의 갈릴리까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8:11절에는 바리새파만 나오는데,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두개파가 예루살렘 외 지역에서는 활동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마태는 종교 당국이 예수님의 사역이 전국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의 이 시점에 사두개파를 추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3:7에 따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파 모두 예수님의 사역이 전국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정확하게는 조사 및 검증하기 위해) 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단체의 대표들은 세례 요한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요한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이 바로 그 "오실 분"이냐고 물었을 때에도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에 예언된 메시아의 표징을 지적하며 답변하셨습니다(마11:1-24).

광야에서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의 맥락에서 마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을 기억하기를 원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17:2에서 백성들이 물 부족으로 다투었을 때,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wherefore do ye tempt the LORD?)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민수기의 주요 주제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평으로 하나님을 끊임없이 시험하였습니다.

 

출애굽기17:2,7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마태복음4:3절에서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는데, 이는 분명히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권위의 근원을 보여줄 수 있는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행하라는 요구를 강화한 것입니다(12:38,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만 보여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12:38절에서 "우리가 표적을 보고 싶다"는 요구가 됩니다.

표적에 대한 요구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두 가지 대조적인 이야기에 근거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7장에서 주님은 아하스 왕에게 적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겠다고 말씀하시며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아하스가 원하는 어떤 표적이라도 행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하스는 표적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어쨌든 임마누엘의 표적을 주셨습니다.

 

이사야7:10-12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 38장에서 히스기야는 병에 걸려 주님을 부르자 살아서 십오 년을 더 살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주님은 38:7절에서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시는 표적을 주셨습니다. 해가 거꾸로 가는 것은 "하늘로부터 온 표적"입니다.

나중에 마태복음24:27절에서 예수님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임함의 표적"은 하늘에서 명백한 우주적인 표적이 될 것입니다. 마태는 다시 한 번 구약성경의 장대한 이야기, 광야의 모세, 심지어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처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당장 보여주지 않으시고, 다만 선지자 요나의 표적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보고 배우거나 깨닫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내용이 필요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요나의 표적"만을 말씀하시고 그들을 떠나 호수 건너편(갈릴리 호수 북동편, 벳새다 지역)으로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5절에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누룩 이야기를 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누룩(leave)이란 다른 음식물에 들어가 그 음식물을 발효시키는 효소입니다. 즉 누룩이 들어가면 음식물은 본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성질이 변합니다. 성경말씀에서는 주로 나쁜 관점에서 남에게 강한 정신적, 영적 전염을 시키는 것을 누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출12:5; 레 2:11; 고전5:6-9; 갈 5:9). 여기서 누룩은 율법과 계명을 인본주의적(율법적, 도덕적)으로 해석하여 일반 백성을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습니다(12절).

 

한편 본문에서 누룩은 단수로 쓰였는데 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누룩이란 측면에서 동일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전통과 외적 행위에만 치중하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모세 오경 외의 모든 성경과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하고, 특히 사탄의 실체와 부활을 부인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함으로써 철저히 현실 지상주의적인 삶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두 부류의 누룩은 시대를 초월하여 극단의 보수와 극단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예전부터 계속 있어왔던 사상들입니다.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막 8:15에는 '사두개인' 대신 '헤롯'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치, 경제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사두개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헤롯 당원으로 활용했던 것을 미루어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천사를 믿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을 중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현실 정치와 타협하여 영적인 것을 부인하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깊이 뿌리내리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모두 본인들의 가치관 대로 살면서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마저도 속이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위선자, 즉 "회칠한 무덤(whited sepulchres; 마23:27)"이라며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를 속이려는 사탄의 모든 시도와 시험 및 "바리새인의 교훈"의 뿌리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성이나 종교라는 위선으로 가려져 있더라도 여전히 교만이 그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교만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왕으로 믿는 믿음에 대한 반항이며,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주되심에 굴복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마음 속 깊은 것입니다(본인도 잘 모를 수 있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종교적 전통을 더 높이 평가하고(마15:1-9), 자신들도 하지 않는 무거운 종교적 의무를 사람들에게 부과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23장 참조)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사랑(긍휼) 부족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딤후3:5)은 있었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유일한 수단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정욕 때문에 유혹을 받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그러나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든 안목의 정욕이든 이생의 자랑이든(요일2:16)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연약한 영역에서 사실상 예수님이 아닌 '자기'를 삶의 왕좌에 앉히도록 유혹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영적 교만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노력(위선)"(마23:5)에 대해 책망하시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에 대해 가르치셨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마태복음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1:3)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의로움을 입혀 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분만이 권능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며, 그분의 일을 위해, 그분의 왕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영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주신 일을 우리는 육신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영적 교만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항상 내 삶에서 사랑의 부족으로 분별하거나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신비를 이해하거나 영적 은사를 행사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동기를 부여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러한 자기 동기에 의한 능력과 선행의 표현을 "죄"라고 하셨으며 그러한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