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15장(add)_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by 적아소심 2023. 5. 15.

마태복음 15:13-14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The Blind Lead the Blind)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피터 브뤼헬(형),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1568년 (The Blind Leading the Blind, Pieter Brueghel the Elder, 1568, National Museum of Capodimonte) 마태복음 15장 14절, 누가복음 6장 39절
피터 브뤼헬(동생)이 형의 그림을 Copy하여 그린 작품, 1616년경

'맹인의 비유'라고도 알려진 '맹인을 인도하는 맹인'의 그림은 피터 브뤼헬(형)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기 전 해인 1568년에 완성한 대형 그림입니다(첫 번째 그림). 이 그림은 이미 개울에 빠진 맹인 리더를 따라 점차 균형을 잃어가는 다섯 명의 맹인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극적으로 짧아진 그가 등을 대고 허우적거리며 당시 거지들이 흔히 사용하는 악기를 여전히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아래 그림은 피터 브뤼헬(동생)이 형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린 것입니다. ("브뤼헬"은 네덜란드식 발음, 독일식은 "브루겔") 

맹인들은 마을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나무 지팡이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어 안내를받습니다.

맨 왼쪽에는 마을 외곽이 보입니다. 배경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남자 사이의 확장된 간격 너머에 교회가 서 있습니다. 이 배경의 시골은 브뤼헬이 자주 방문했던 브뤼셀 남서쪽의 페데 계곡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그림 속 교회는 딜베이크 마을에 있는 성 안나 페데 교회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며, 그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열악한 위생 수준과 효과적인 치료법의 부재로 인해 실명이 매우 흔했습니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진단과 치료법은 기껏해야 초보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눈의 문제는 환자의 위장에서 올라와 뇌로 누출되는 독성 증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정향이나 회향을 씹어 달게 한 입김으로 눈을 부드럽게 불게 하는" 등의 치료법은 효과적이기보다는 희망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무지의 배경을 고려할 때, 브뤼헬(형)이 맹인을 눈꺼풀을 감고 있는 일반적인 인물로 묘사한 것과 달리 매우 구체적인 유형의 질병을 가진 개인으로 묘사한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아래 상세 그림 참조). 실제로 브뤼헬은 질병을 매우 임상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하여 후대의 해설자들이 대부분의 남성이 앓고 있는 정확한 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맨 왼쪽의 추종자부터 시작하여 천포창(결막의 흉터), 두 번째 남자의 모자에 가려져 식별할 수 없는 질병, 구안와사(기능이 없는 눈의 위축), 각막 백혈종(벽안), 시청자를 향해 시력을 잃고 돌아가는 남자의 경우 적출(눈 제거)이 있습니다.  

브루겔이 실제 시각장애인을 면밀히 관찰했다는 증거로, 그는 맹인이 후각이나 청각과 같은 다른 감각에 의존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공중에 특징적으로 들어 올리는 모습을 지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브뤼헬의 거침없는 사실주의는 그가 값싼 웃음을 얻기 위해 코믹한 제안을 사용하여 일반적인 태도를 악용하고 있다는 제안에 반박합니다. 브뤼헬이 강하거나 밝은 색상을 피하고 연보라색, 회색, 차분한 녹색과 같은 더 섬세한 색조를 선호한다는 점도 절제의 요소를 강조합니다.

이 주제에 대한 이전의 전통적인 묘사는 다소 정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브뤼헬은 등장인물들을 왼쪽에서 하강하는 대각선을 따라 배치하여 강한 움직임의 느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맹인들은 뻗은 손과 나무 지팡이로 연결되어 있으며,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처럼 불균형이 점점 더 심해집니다.
 
오른쪽에서부터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두 남자는 아직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네 번째 남자는 이제 막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남자는 지팡이가 심하게 당겨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앞사람과 연락이 끊긴 상태이며, 분명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간구의 형태로 교회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남자는 시청자를 향해 얼굴을 돌려 빈 눈구멍을 드러내며 끔찍한 깨달음의 표정을 짓고 있으며, 그의 표정은 거의 보쉬의 저주받은 영혼을 떠올리게 합니다.

 

브뤼헬은 이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두 남자가 망토와 모자, 지팡이 등 순례자의 전통적인 복장을 하고 있고 왼쪽에서 두 번째 남자가 십자가를 들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브뤼헬은 불쌍한 맹인의 모습을 통해 그들은 사실 실제 맹인을 통해서 당시 영적 지도자들의 맹인과도 같은 모습을 비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세상입니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경제불황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총체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정치, 사회적으로 왜 이렇게 나뉘어서 서로에 대해 적대적이고 분노를 표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에 좌파와 우파가 있고 서로를 미워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판단합니다. 구약의 사사시대보다 못한 시대적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삿17:6; 21:25)"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것이 진리인양 상대방을 무섭게 몰아세웁니다. 양들을 먹이고 살려야 하는 사명자들이 서로 ‘옳다’ ‘틀리다’를 외치며 이판사판으로 싸움질을 합니다. 그들을 따라가는 양들을 어떻게 될까요?

첫 번째 인도하던 맹인은 악기를 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넘어지자 두 번째로 따라가던 맹인이 넘어지며 머리에 썼던 군모(안전모?)같은 모자가 벗겨졌습니다. 눈은 없지만 무척 당황하는 표정입니다.

 

두 번째로 따라가는 맹인은 완전히 눈이 파여 있습니다. 그는 선두의 인도자가 구렁텅이에 빠져 넘어지자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상황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앞에서 보고 있는 청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자기는 인도자를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결과는 구렁텅이에 같이 빠지는 것입니다. 리더를 잘 못 만나면 결국 같이 파멸로 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변명도 핑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시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선포되어 있어서 조금만 관심 갖고 찾으면 길이 있습니다.

위 두 사람은 심한 눈병을 앓아 결국 실명되어 맹인이 된 것 같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 얼마나 억울하고 슬펐을까요? 게다가 친구(또는 인도자)를 잘못 만났습니다. 맹인 인도자와의 잘못된 만남이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그것은 시대의 책임인가요? 자기의 책임인가요? 아니면 창조주의 책임인가요? 그리스도인은 여기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나요? 세상의 지도이론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다섯 번째 사람은 모자를 푹 눌러써서 소경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만, 그도 이 대열에 끼어 있습니다. 속에 자주색 옷을 입고, 십자가 목걸이를 한 것으로 보아 좀 한 때 잘 나갔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결국 맹인의 무리에 들었습니다. 바로 멸망 받을 무리에 말이죠…

교회가 멀리 보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없는 황량함이 묻어나 있으며, 앞에 있는 나무는 앙상하게 말라 있습니다. 조금만 앞에 가면 조그만 시내가 흐르는데도 말라 있는 것을 보니 제대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가 봅니다. 아마 당시 시대의 교회의 모습(아니 지금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화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들을 양육하지 않고 정치, 경제에 집중하고 자기들 살길을 찾는 영적 지도자들의 모습을 한탄하며 그렸겠지요. 황량한 모습을 통해 지금 주일 외에는 한산한 교회의 모습일 것 같습니다. 교회의 모습은 버림받은 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이 미래의 교회의 모습이 되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이 듭니다.

황당한 표정의 이 소경 머리 바로 위에 하얀 붓꽃이 보입니다. 하얀색 붓꽃의 꽃말은 “믿는 자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 행복은 바로 지척에 있는데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도 바로 성경 속에 있는데, 지금은 성경책에 먼지만 쌓여 있을 뿐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성령을 아는데, 그냥 주일 예배 때 설교 한번 듣고 그것을 삶의 지표로 삼기에는 영양분이 너무 적습니다. 성령파, 말씀파, 경건파…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은 공허함을 낳을 뿐입니다.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치열한 성경읽기와 묵상, 그리고 기도가 더해져야 합니다. 말씀 읽기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내려오셔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요, 기도와 묵상은 내가 갈망과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과 영혼육의 진정한 교제가 이뤄지게 됩니다. 문제는 조금 하다가 효과가 없다고 그만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가장 뚜렷한 성품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신실하심: Faithfulness)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시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약속을 말씀을 기억하시고 그대로 행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나”입니다. 나는 성실하지 않습니다. 죄악된 본성으로 말미암아 조금 방심하면 어둠에 갇혀 ‘촉’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믿는 자의 행복”은 의외로 가까이 있고, 쉽게 얻을 수 있는데 우리는 바로 지척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길 위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시대를 분별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내 몫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세바스찬 브랑크스, 맹인을 인도하는 맹인, 17세기 초반 (Sebastian Vrancx, The blind leading the blind, early 17th century)

제임스 티소,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The Blind Leading the Blind by James Jacques Joseph Tisso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