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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18장③_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by 적아소심 2023. 8. 1.

마태복음 18:21-35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 (참조; 12:14-21)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21 Then came Peter to him, and said, Lord, how oft sha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till seven times? 22 Jesus saith unto him, I say not unto thee,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23 Therefore is the kingdom of heaven likened unto a certain king, which would take account of his servants. 24 And when he had begun to reckon, one was brought unto him, which owed him ten thousand talents. 25 But forasmuch as he had not to pay, his lord commanded him to be sold, and his wife, and children, and all that he had, and payment to be made. 26 The servant therefore fell down, and worshipped him, saying, Lord,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ay thee all. 27 Then the lord of that servant was moved with compassion, and loosed him, and forgave him the debt. 28 But the same servant went out, and found one of his fellowservants, which owed him an hundred pence: and he laid hands on him, and took him by the throat, saying, Pay me that thou owest. 29 And his fellowservant fell down at his feet, and besought him, saying, Have patience with me, and I will pay thee all. 30 And he would not: but went and cast him into prison, till he should pay the debt. 31 So when his fellowservants saw what was done, they were very sorry, and came and told unto their lord all that was done. 32 Then his lord, after that he had called him, said unto him, O thou wicked servant, I forgave thee all that debt, because thou desiredst me: 33 Shouldest not thou also have had compassion on thy fellowservant, even as I had pity on thee? 34 And his lord was wroth, and delivered him to the tormentors, till he should pay all that was due unto him. 35 So likewise shall my heavenly Father do also unto you, if ye from your hearts forgive not every one his brother their trespasses.

 

예수님께서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한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와서 범죄한 형제를 어느 정도까지 용서를 해야 할지, 7번까지 해야할지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여기서 ”용서하다“는 헬라어로 ”ἀφήσω“ (aphēsō; 기본형 ἀφίημι, aphiémi)로써, 어원은 apó+hiēmi인데, apo는 "away from"을 뜻하고, hiēmi은 "send"를 의미합니다. 즉, (1) send away, release(discharge). (2) let go, release, permit to depart, (3) remit, forgive, (4) permit, suffer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범죄한 형제가 회개하여 죄의 고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즉시 모든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친구가 자기에게 죄를 범하면 7번까지 용서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데, 이는 삼세번을 넘어서 7번까지 용서를 해야 제자의 수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보통 우리 인간관계에서는 삼세번까지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친한 친구라도 자기에게 3번이나 죄를 범하면 더 이상 관계성을 가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용서의 횟수를 7번으로 올려 말하며 그래도 제자는 그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2절에서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무척 당혹스러운 말씀을 하십니다. 헬라어로는 ἑβδομηκοντάκις (hebdomēkontakis) ἑπτά(hepta) seventy times seven으로 70x7 (490번) 또는 70+7 (77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는 정확한 숫자를 제시하며 그 한도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가 회개할 때까지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3)“ (Therefore is the kingdom of heaven likened unto a certain king, which would take account of his servants).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 ”천국은 ~와 같으니”라고 시작하십니다. 천국이 모습이나 상태를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씨뿌리는 자와 같으니”, 또는 “천국은 결산하는 임금과 같으니”라고 하시면서 어떤 사람이 곧 천국과 같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특성을 알려면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을 잘 관찰하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결산하려 하던”을 헬라어 원본사본에 의하면 “결산하기를 원하는”의 뜻으로 “ἠθέλησεν συνᾶραι λόγον (ethelesen synarai logon)으로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ethelesen의 기본형은 θέλω(thelo)로써, ”누군가가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고 기꺼이 행동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을 원하고 소원하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주님께서 신자들에게 "최고의 제안(best-offer)"을 베푸실 때 사용되며, 주님의 설득(믿음)이 그들에게 힘을 주고, 주님의 임재 등을 나타내기를 소망하십니다. 이 단어는 믿음 즉, "하나님의 내재된 설득"과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조, 고후8:5-7 및 히10:36-39)]. συνᾶραι λόγον 쉬나라이 로곤 (synarai logon; 기본형 συναίρω; synairo, λόγος; logos)은 '계산(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의 의미로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balance)을 살피는 것을 말하지만,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일생 자신들에게 맡기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고후5:10)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 백부장 고넬리우스 또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 1660년경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 The Centurion Cornelius or The Unmerciful Servant, c.1660)
 

 

위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군인의 호위를 받고 임금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모자를 벗고 두 손을 모은 채 초조한 눈으로 임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군인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면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군인이 데려온 것처럼 보입니다. 결산할 때 군인까지 대동할 정도이면 그가 얼마나 큰 빚을 졌으며, 그것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아주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뒤에는 빚진 자의 결산 서류 외에도 많은 서류철이 있습니다결산할 사람이 아주 많겠지요.

임금은 탁자에 놓인 결산 서류를 본 후에 빚진 자를 부른 것 같습니다탁자 위에는 서류 자료가 있고접혀진 종이도 있습니다임금은 누군가를 시켜서 조사한 내용을 별도로 보고 받은 것 같습니다. 빚진 자의 옷이 많이 헝크러져 있습니다이는 그가 얼마나 황망히 이 자리에 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그는 모자를 벗고 두 손으로 모자를 모아 잡고 주인을 바라봅니다왼쪽에 있는 사람은 결산의 증인이거나결산을 돕는 전문가일 수도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라고 했습니다.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와서 자신의 빚을 자신 신고하거나 고백한 것이 아니라 군인이 임금 앞에 데려와서 마침내 그것이 드러났음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속일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회개하지 않고 숨겨놓은 죄악에 대해서는 모두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입니다.

 

한 달란트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으로서(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노동자 한 사람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노동자 한 사람이 1년에 300일 노동을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1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 연봉에 해당합니다. 1만 달란트는 노동자가 20만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또 다른 계산으로, 1만 달란트는 금 340톤에 해당합니다. 2019년 1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은 104.4톤에 불과합니다. 세계 금 협회는 2017년 말 기준으로 채광된 금의 총량을 190,040톤으로 추산했습니다. 따라서 1만 달란트의 빚이 얼마나 큰 액수인가는 상상이 잘 안될 정도입니다. 더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액수는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예시적 숫자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엄청난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예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에게 빚진 것은 1백 데나리온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 진 빚(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25절에서 그는 그 빚을 도저히 갚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여도 엄청난 금액을 모두 충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는 드디어 임금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7절을 보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주인의 마음은 한없이 너그럽고 측은지심이 풍성하였습니다. 빚진 종이 철퍼덕 바닥에 엎드려 무조건 긍휼을 구하자 그서이 주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고, 인내와 오래 참음만이 아니라 기꺼이 용서하는 연민으로 종이 요구한 것 이상을 충족시켜 준 것입니다. 종은 용서받았고, 결코 갚을 수 없었던 막대한 채무를 값없이 면제받았습니다. 믿음이라 이처럼 내면으로부터 주님의 마음을 신뢰하는 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헬라어의 빚은 δάνειον(daneion, 다네이온)으로, 대출을 통해 계약된 빚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기회를 가진 삶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준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자와 함께 원리금 상환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도메니코 페티.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1619-1621년경 (Domenico Fetti. The Parable of the Unforgiving Servant. Around 1619-1621. Oil on poplar, 55 x 44 cm. Gemae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18장), 1877년에 출판된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독일 화가, 1794~1872)의 그림을 따라 목판화한 작품. The Parable of the Unforgiving Slave (Matthew, Chapter 18). Woodcut after a drawing by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German painter, 1794-1872), published in 1877.

얀 루이켄,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마태복음18:28 (Jan Luyken, The Parable of the Unforgiving Servant, Matthew18:28)

러나 28-30절에서 그 종은 위와 같이 은혜롭게도 엄청난 빚에서 해방되어 주인의 면전에서 나가자 마자 동료 종 중 그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 때 바로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는 돈을 갚으라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그는 엄청난 빚을 주인의 관용과 자비로 탕감을 받은 후 궁전에서 나오자 마자 많지 않은 금액을 그렇게도 거친 방식으로 요구함으로써, 이기적이며 무감각하고 잔인한 성향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ἔπνιγεν(에프니겐)이라는 단어는 그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는 의미로, 거의 목을 졸라 죽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의 동료 종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 그가 주인의 발 앞에서 했던 것처럼 - 그에게 간구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바로 전에 동일한 상황에서 사용했던 바로 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과 같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 전의 상황에서 주인이 자신에게 보여준 훨씬 더 큰 자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무 빨리 주인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그는 무례하고 냉혹하고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그와 함께 재판장에 가서 그를 고소하여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있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것은 하찮은 것이라도 크게 여기고, 남의 것은 큰 것이라도 하찮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는 자신의 탕감받은 빚 1만 달란트는 금방 잊어버리고, 받아야 할 일백 데나리온은 크게 여기는 마음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부언하자면, 자신의 독감은 엄청 크게 여기고, 남의 말기 암은 크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악하고 간사합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게 대하고, 남에게는 원칙과 기준에 의해 판단합니다.

 

明心寶鑑 存心篇, 小學 嘉言篇(명심보감 존심편, 소학 희언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范忠宣公 戒子弟曰 人雖至愚라도 責人則明하고 雖有聰明이라도 恕己則昏하느니라. 爾曹는 但當以責人之心責己하고 恕己之心恕人하라 (범충선공, 계자제왈, 인수지우라도 책인즉명하고, 수유총명이라도 서기즉혼하느니라. 이조는, 단당이책인지심책기하고 서기지심서인하라.)

 

사람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을지라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비록 총명하더라도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어두우니, 너희는 다만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써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써 남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범중엄范仲淹이 아들인 범순인(范宣公, 范純人)이 자녀들에게 가르친 말)

 

같은 곳에서 계속 말합니다.

以責人之心責己則寡過, 以恕己之心恕人則全交. (이책인지심 책기 즉 과과요 이서기지심 서인 즉 전교니라.)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써 자기를 책망하면 허물이 적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써 남을 용서하면 사귐이 온전하리라.

 

매일 말씀에 비추어 마음과 생각을 다듬지 않으면 마음 가운데 잡초가 무성하여 어지러워지고, 결국 마음과 혼과 영을 해칩니다. 물론 그 결국은 하나님의 판결을 받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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