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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9_사무엘상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사무엘상 제7장_사무엘이 블레셋을 물리치다

by 적아소심 2023. 11. 3.

사무엘상 7장 (7:1-17)

 

여호와의 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물다 (1-2)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영서성경에서는 lamented라고 하여 애곡하였다고 번역한다)

 

사무엘이 블레셋을 물리치다 (3-14)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다 (15-17)

15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17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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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서 돌아온 여호와의 언약궤를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아비나답의 집에 가져다 놓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궤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2절 상반절에서는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7개월 동안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 도시에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결국 기럇여아림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럇여아림은 벧세메스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로서 당시 이스라엘에 속한 지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곳으로 법궤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벧세메스는 제사장 또는 레위인의 성읍이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고대로부터 거룩한 곳으로 유지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럇여아림은 이스라엘이 정복하기 전에는 바알을 숭배하는 장소로 높은 지대에 있던 곳이었습니다. 법궤를 그곳에 두기로 결정될 때 이러한 점도 적극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산에 사는"이라는 말은 그곳이 여전히 오래된 "높은 곳"이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됩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은 레위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엘르아살과 웃사, 그리고 같은 가문의 아효라는 이름(사무엘하 6:3)은 레위인의 호칭입니다. 사무엘은 이 일에서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감독이었을 것이며, 여호와의 궤를 지키는 일을 위해 레위 지파의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다윗 왕이 숲의 도시에 있는 "산에 있는 집(언덕 위에 있는 집)"에서 처음에는 오벳 에돔의 집으로, 그다음에는 자신의 왕국 시온으로 가져올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사무엘하 6장, 시편 132:6 참조)

 

삼상6:1절에서 읽었듯이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에서 7개월을 머물렀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 당신의 의지대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기럇여아림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근 2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머물게 됩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슬프고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었고,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어려서 이 사건이 일어나고,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 장성하는 동안 하나님은 기럇여아림에서 20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철없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의기양양하게 나갔던 아벡의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언약궤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선지자이자 대제사장 엘리의 죽음, 거룩한 성소 실로의 황폐화, 블레셋의 끔찍하고 지속적인 압제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젊은 사무엘의 눈을 뜨게 했을 것입니다. 형극의 쓰라린 교훈을 통해 그는 소수의 용감하고 대담한 지도자들의 행동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아벡에서의 대패(大敗) 이후 인간적인 노력과 열심은 오히려 나라를 더 깊은 타락과 불행의 늪으로 빠뜨릴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변하기 위해서는 전쟁이나 개혁 이전에 다른 것들이 필요했습니다. 사무엘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는지, 20년간의 기다림 중에서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블레셋의 압제 통치를 피해 다니며 선지자 및 사사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영적 삶에 대한 소망의 싹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2절 하반절이 좀 난해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애통해하다"로 번역했습니다. 시리아 성경은 "그들은 모두 여호와를 따라 자신을 버렸다"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로 ‘와이인나후’(וַיִּנָּה֛וּ) (기본형: נָהָה/나함)로써 ‘to lament’, ‘to wail’ 즉, ‘애도하다, 울부짖다’는 의미입니다. 이 "애통"은 "여호와를 갈망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백성들이 이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사무엘의 지치지 않는 오랜 수고의 결과였습니다. 삼상3:19절에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가 자라면서 활동하던 시기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내포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20년 동안 그들 사이에서 충실하게 말씀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블레셋 통치 아래에서도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그들을 일깨웠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습니다.

에벤에셀 돌을 세우는 사무엘; 그림 왼쪽 배경 - 양 희생 제물과 물을 붓는 모습; 그림 가운데 - 에벤에셀 돌; 그림 앞쪽 중앙 전경 - 회개를 설교하는 사무엘 ; 그림 오른쪽 멀리 보이는 배경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림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물리치기 전 미스바에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모습 (European School, 17세기 작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삼상7:9-10)
사무엘과 사울 시대의 이스라엘 지도

3절에서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촉구합니다. 이때 사무엘의 나이가 약 40세쯤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제하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불러 그들이 회개하고, 여호와께 금식하며 기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다스렸습니다.

 

본문에서 여러 가지 묵상할 내용이 많지만 오늘은 “미스바(Mizpah)라는 장소를 통해 하나님 통치의 역사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미스바

 

미스바는 역사적으로 많은 언급이 있지만, 적어도 두 가지가 사무엘상 7장과 10장의 사건을 예고합니다.

 

첫째, 창세기 31장에서 야곱과 라반이 돌을 쌓아 경계를 정하고 서로의 땅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한 장소입니다. 사무엘이 에벤에셀 돌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 예배(제사)를 드리기 위함도 있지만 백성들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사사기 20장에서 기브아 사람들이 레위 사람의 첩을 성폭행하고 죽인 후 이스라엘이 베냐민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모인 장소입니다. 이는 과거 오래되지 않은 그들의 아픈 역사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공동체에 큰 상처가 남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두 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인해 이 지명이 사무엘상 7장과 10장을 읽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지명의 높은 빈도(사무엘상 7장에 7번 등장)는 이 지명과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에 주목하게 합니다.

 

먼저, 사무엘상 7장에서 미스바는 5절, 6절(2번), 7절, 11절, 12절, 16절에 등장합니다. 이 장소의 빈도는 마치 번쩍이는 불빛처럼 이 장소가 이야기에서 중요한 장소임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할까요? 이 장소는 창세기 31장에 나오는 야곱과 라반의 언약 계약과 사사기 20장의 지파간 내전을 뒤집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야곱과 라반이 미스바에 돌기둥을 세웠을 때(창31:46) 평화가 이루어진 것처럼(미스바는 "망대"라는 뜻),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신 것처럼 이 기념 돌 "에벤에셀"(삼상7:12-13)은 창세기 31장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허락하셨습니다.

창31장, 야곱과 라반의 언약의 돌(미스바)

동시에 사무엘상 7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마지막으로 모였을 때와는 놀라운 반전입니다. 사사기 20장에서 베냐민은 창세기 31:49~50절에 미스바에 대해 언급된 바로 그 일, 즉 딸 중 한 명을 학대하여 형제들의 진노를 샀었습니다. 미스바라는 돌에 대해 라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미스바(돌무더기)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창31:49-50).”

 

사사기에는 이스라엘의 딸을 토막 내어 온 땅으로 보낸 사사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온 나라(지파)가 베냐민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아들 4만 명과 베냐민의 2만 5천 명이 죽는 잔인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사사기 20장 참조).

 

이 유혈 사태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이 모두가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했던 사사 시대의 특징입니다(사사기 17:6, 21:25). 사무엘상에는 이 무정부 상태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을 세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백성 중에서 어리석은 왕이 선택된 후에야 이루어지며, 여기서 미스바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둘째, 회개의 장소로서의 미스바

 

사무엘상 7장에서 미스바는 사무엘이 온 민족을 이끌고 회개와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동시에 주님을 경배하는 동안 전쟁의 나팔 소리가 다시 울립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되십니다. 사사기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소집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천둥을 치시며 블레셋의 침략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십니다. 홍해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는 동안 백성들은 조용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도하였습니다(출14:14).

 

사무엘상 1장의 흐름에서 미스바는 사무엘의 사역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사사로서 그는 나라를 전쟁이 아닌 회개와 평화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8:1-3에서 알 수 있듯이 사무엘은 늙었고 그의 아들들은 악했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세상을 떠날 것을 예상한 백성들은 이방 나라와 같은 왕을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일은 온 백성을 다시 미스바로 인도합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들이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지 않았으나, 이방과 같은 왕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은 이 왕이 그들을 노예로 삼고 그들의 사랑하는 아들들과 재산을 빼앗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에 굴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왕을 달라고 외치고,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향할까요? 미스바로 돌아갑니다. 안타깝게도 백성들의 회개는 미스바로 돌아와서 다시 베냐민 지파에 초점을 맞추면서 오래가지 못합니다.

 

셋째, 어리석음의 장소로서의 미스바

 

사무엘은 사울을 백성의 왕으로 인정한 후 온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모으라고 부릅니다(10:17). 그리고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아이러니하고 상징적입니다. 먼저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에서 구원하신 방법을 상기시킵니다(10:17-20). 그런 다음 제비를 뽑아 베냐민, 므낫세, 사울을 선택합니다. 미스바에서 베냐민의 아들 사울이 제비뽑기로 선택됩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사기 20장에서 베냐민에 대한 심판을 위해 온 나라가 모였는데, 이제 하나님은 베냐민 왕을 통해 베냐민에 대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 왕은 창세기 49장에서 왕권을 가진 지파로 언급된 유다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확인됩니다. 오히려 베냐민 왕의 선택은 사울 왕국에 다가올 재앙을 예고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의 지도력 아래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지만(삼상 7장), 이제는 사울의 악한 욕망에 그들을 넘겨주십니다. 미스바의 지리적 위치는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그를 신뢰하고 용서를 구할 때 그들을 구속하실 수 있지만, 그들이 자신과 자신의 선택을 신뢰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잃게 될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자주 위협받았던 이방인 왕이 그들을 다스리는 대신, 이제는 '이방인 왕'이 내부에서 통치할 것이며, 하나님의 왕이 왕좌에 앉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에서 또 다른 내부 투쟁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실 사사기에서 베냐민에 대한 공격을 주도한 것은 유다 지파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상에서도 베냐민과 유다 사이에 경쟁이 벌어지지만,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전쟁은 비대칭적인 양상을 띠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의 머리에 창을 던지지만, 다윗은 (두 번이나)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다윗과 사울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왕국을 이끌 두 가지 유형의 왕으로 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어떻게 이 대비를 분명히 하기 시작했을까요? 미스바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묘사함으로써 말입니다.

 

이제 그러한 지리적 인식 없이도 사무엘상 1-2장의 요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명에 익숙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지명이 갖는 의미와 무게가 더해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에는 평판과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 사무엘상에서도 저자 사무엘은 미스바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전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더 풍성하게 읽고 묵상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지리적 세부 사항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기록에 역사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문학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장소의 역사를 알면 이 단어가 원래 청중에게 주려고 했던 효과를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미스바(사무엘상 7장)에서처럼 저자가 일곱 번이나 사건을 조명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우리는 이 장소의 이전 역사를 파악하여 미스바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를 본문에서 일정 부분 들을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데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위 미스바에 대한 글은 Occoquan Bible Church (Woodbridge, Virginia)의 목사이자 인디애나폴리스 신학교, 보이스 칼리지, 남침례교 신학교 겸임교수인 데이비드 슈록(David Schrock)의 “Mizpah: A Clue for the Storyline of 1 Samuel and for Reading the Bible Better”라는 글을 적절하게 각색한 것입니다.)

 

7-12절 말씀에서, 오랜 시간 후에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미스바로 불러 모아 하나님께 온전히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회개와 예배의 회복이 일어날 때에 사탄은 이를 지켜보지 못하고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도록 합니다. 이처럼 죄인들이 회개하고 개혁하기 시작할 때,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반대하고 낙심시키기 위해 그의 모든 힘과 도구들을 모두 동원하여 방해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간청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적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사무엘의 기도를 받으시고 천둥과 번개로 블레셋을 물리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 승리의 기념하기 위해 돌을 쌓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무엘을 통해 중보기도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영어로 “intercession”이라고 하고, 딤전2:1절에서는 “도고(禱告)”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도(禱)는 빌 “도”, 기원할 “도”인데 특별히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중보(도고)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사무엘, 히스기야, 엘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다니엘의 경우를 보면 기도를 통한 중보의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본문에서도 사무엘의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약 성경에서 궁극적인 중보 기도자로 묘사되고 있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에 중보기도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을 제거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중보자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중보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다른 그리스도인 및 잃은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간구하며 기도로 중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당신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대속의 제물로 드림으로 그 값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중보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모든 믿는 이들 속에 직접 역사하시며 지키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보혜사(돕는 자, 위로하는 자, 상담자, 변호사)가 되시어 직접 중보사역을 감당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는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윌리암 H. 바틀렛, 베들레헴(근처), 라헬의 무덤 - 라헬의 무덤가에서 낙타와 함께하는 가족의 풍경

위 그림은 19세기 예루살렘 성공회 학생이었던 윌리엄 헨리 바틀렛(William Henry Bartlett)의 “예루살렘 도시와 주변 산책”에 나오는 삽화와 에세이 중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사실 라마에서 베들레헴은 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위 베들레헴에 있는 라헬의 무덤 그림을 삽입한 것은 아이를 오랜 세월 낳지 못하여 많은 고통을 겪었던 라헬과 한나의 비슷한 상황을 생각해 보려는 의도입니다.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라헬의 무덤, 1836년 작품

위 두 개의 그림은 베들레헴에 있는 라헬의 무덤을 그린 것입니다. 모두 라헬의 무덤은 18세기, 19세기 화가의 작업 당시에 모두 이슬람 모스크로 덮어져 있는 사실 그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라헬은 오랜 세월을 기다려 요셉을 낳았고, 고향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야곱을 따라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들어가서 여정의 길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고 맙니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하여 그녀를 얻기 위해 7년을 2번이나 보내면서도 14년을 7일같이 보냈는데, 어머니 리브가처럼 라헬은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언니 레아는 애를 쑥쑥 잘 낳기만 하는데, 레아는 오랜 세월 아이를 갖지 못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야곱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지만,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요셉을 낳았을 때의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그만 죽고 맙니다. 무엇보다 야곱이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잃고 얼마나 상심되었을까요? 아마 그 못다한 사랑이 요셉에게 전부 가다보니 형들은 모두 삼베 옷을 입었을 때, 요셉 혼자 채색 옷을 입었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볼 때마다 죽은 라헬이 생각나서 베냐민도 가까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화가는 위 라헬의 무덤을 그리며 창세기 야곱과 라헬의 이야기를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언덕에 덩그라니 남아있는 무덤, 그것도 이슬람식 모스크로 남아 다른 후손들의 추모를 받고 있는 라헬의 마음은 어떨까요? 또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후손들은 마음이 어떠할까요? 

 

한편으로, 라마는 아버지 엘가나와 한나가 살았던 지역으로 사무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 지역에는 아버지 엘가나와 어머니 한나가 살고 있습니다. 동변상련(同病相憐)이랄까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오랫동안 아이를 낫지 못하다가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다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힘들게 사무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을 엘리에게 맡긴 후 한나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의 이후의 삶은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진행형으로 되지 않았을까요? 사무엘은 오랜 세월동안 실로에 있는 성소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성소에서 거하며 해마다 벧엘, 길갈, 미스바로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다가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인 라마로 돌아왔습니다. 장남으로서 부모가 죽은 후에 그 가업도 이어야 하고, 또 남아 있는 것들을 관리하기 위해 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거기에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았습니다(삼상7:15-17).

사무엘의 인생 여정
사무엘

사무엘의 삶의 반경은 그렇게 넓지 않았습니다. 요즘 관점으로 보면 그는 견문이 넓어 보이지 않습니다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그는 사사 시대 마지막 사사(삼상7:6)이자 최초의 선지자(3:20, 3:24, 13:20)였습니다그는 제사장으로도 활동했으며(삼상2:18) 무엇보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11:32).

 

그렇다면 사무엘상 7장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이 주제는 8장에서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7: 9, 13, 17절에서 사무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으로 신실하시며, 신뢰와 의리(신앙적 차원에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하셨으면 끝까지 신뢰와 의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택하시고, 그를 허수아비와 같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지금은 신정정치의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사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직접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일은 꼭 사무엘을 통하여 하십니다. 급한 상황이 오면 직접 나서서 하시기 쉬운데 하나님은 절대 서두르지 않으시고, 세운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떤가요? 우리는 오너가 있는 대기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너가 바지 사장을 세워놓고 뒤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보통 세상의 이치입니다. 번듯하게 대표이사를 세우지만 실제로 큰 권한이 없습니다. 대부분 기간제 바지사장에 불과한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무엘을 단순히 심부름꾼이나 바지 사장으로 세우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를 통해 일하시고, 또한 사무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시고, 그를 세워주십니다. 그의 권위의 근거가 되어주십니다. 주님은 사무엘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기도할 때 그 권능과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의 말에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데에도 바로 이런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삼상 2:20절에서 엘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삼상2:30)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의 자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경외하는 것입니다. 즉,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두려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극도로 존경함으로 인해서 그분의 존전에서(before presence) 매우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매사의 삶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듯 조심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의 삶이 바로 예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실로에서 떠나 고향 라마에 가서도 실로의 성소에서 하듯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무엘의 삶을 기뻐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으로 존중하고, 그를 높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잡고 있는 손을 먼저 놓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 안에서만 있으면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가장 위대한 성품 중의 하나가 신실하심(이는 성실함도 되겠고, 은혜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헤세드"도 됩니다 - 헤세드는 신실함을 전제로 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실하심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수만번 넘어졌다가도 수만번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뻔뻔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이나, 우리가 얼마나 삶의 열매를 맺었는지 실적을 보지 않으십니다(혹시 실적이 안보인다면 결과보다는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태도와 방향, 그리고 소속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소속을 분명히 하고,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방향때로 따라간다면 주님은 기꺼이 우리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실적이나 열매도 보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열매는 영적이고 내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통치)에 들어가려면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즉 정체성을 점검해야 합니다....

 

시편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111:5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말3:16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계11: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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