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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1_창세기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창세기 제20장_아브라함과 아비멜렉

by 적아소심 2023. 10. 21.

창세기 제20장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8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4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돌려보내고 은으로 보상하다. Pieter van der Borcht, 1573-1608, Abimelech has Sarah returned to Abraham and gives him a purse of silver. Herzog Anton Ulrich-Museum

 

본문 말씀을 아브람과 창세기12:10-20절의 말씀을 비교하여 아비멜렉이 바로왕보다 더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다음 사항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은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2)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왜 거짓말을 했는지 묻지만, 바로는 자기 말만 하고 아브람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3) 아비멜렉은 아브람이 자신의 영토에서 원하는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반면, 바로는 아브람을 이집트에서 추방합니다.

(4)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에게 저지른 해악을 개선하기 위해 돈을 주지만, 바로는 아브람이 사라의 형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돈을 줍니다. 

 

창세기 20장은 아브람과 아비멜렉 사이에 벌어졌던 긴박한 사건들이 happy ending으로 귀결되는 것을 위해 바로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아비멜렉을 경계하지만,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하고 그들은 그의 영토에서 계속 살게 됩니다.

안토니오 카르네오,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다 (Antonio Carneo, Abimelech Restores Sarah to Abraham.)

 

위 그림에서, 왕관을 쓴 인물이 동전으로 가득 찬 접시를 가리키는 모습은 성경 본문(창세기 20:14-16)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합니다. 주인공인 사라의 복귀는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오른손을 잡고 있고, 사라는 왼손을 부드럽게 아브라함의 어깨에 얹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비멜렉 왕은 왼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뭔가 의문을 품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중재를 해서 모든 일의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은 표정입니다. 이것은 사라가 아직 복귀하기 바로 직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창세기20:9-10). 아브라함과 사라는 10살 차이인데 세상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사라와 아브라함의 모습이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사라는 분명 임신한 상태일텐데 하나님의 집중적인 관심과 은혜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Draughtsman: Constantijn Daniël van Renesse, Abimelech Returning Sarah to Abraham, circa 1650-1655
By Nicolaes Berchem, Abraham receives Sarah from King Abimelech. 1665-1670
Abimelech returns Sarah to Abraham; painting by Elias van Nijmegen (1667-1755). Date: 1731

 

1절에서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즉 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마므레에서 떠났습니다. 그는 온 땅을 횡단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창세기 13:17-18), 그가 그곳에서 떠나야 할 이유를 굳이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축 때문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이 그의 삶의 규칙이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땅을 점령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엘, 마므레, 비어-세바와 같이 그의 중요한 본부가 된 특정 장소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들에 속한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어떤 이유로 떠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소돔의 멸망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일부 유대인 저술가들이 말했듯이 롯이 딸들과 근친상간 한 것과 가나안 사람들이 그의 친척을 위해 그에게 던진 비난에 슬퍼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랄 왕은 사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자기 침대로 데려갔습니다.

 

남쪽 나라를 향해 - 팔레스타인의 남부 지역인 느굽Ne-gob(창세기 12:9, 창세기 13:1), 하호르Hahor 또는 고지대the Highlands라고 불리는 유대 중앙 지역, 동쪽의 사해 쪽인 미드바르Midhbar, 서쪽의 세펠라(랑게)Shephelah (Lange)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가데스Kadesh와 수르Shur 사이에 거주했고(창세기 16:14 및 창세기 16:7 참조), 그랄Gerar에 머물렀습니다(창세기 10:19 참조).

 

"그는 내 누이이다"는 말을 다시 읽게 되는데, 20년 전에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고, 바로는 그를 책망했지만 큰 선물을 가지고 그를 돌려보냈습니다(창세기15장). 위 본문(20:13절)에서 보듯이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두 번이나 곤경에 처하게 한 거짓 진술을 습관적으로 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아브라함은 자신이 잘못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근 100세에 가까이 된 그야말로 백전노장이 아내를 그처럼 사소한 거짓말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 참 비겁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계시와 말씀이 그에게 주어지는 바로 그 시기, 특히 25년간 기다려온 아들이 이제 이제 아내의 뱃속에 있는 때에 속임수에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영웅들을 완벽하다고 묘사하지도 않고, 당대의 수준보다 더 높게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특징은 지속적인 성장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에게 이전보다 더 성숙한 사람, 더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촉구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범을 본보기로 삼고 성령의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높은 영적 수준에 있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사라를 이집트의 모든 위험에서 구해 주셨다는 과거의 사실이 그에게 미래의 어려움에서도 동일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보증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과 삶의 궤적은 언제나 이상하게 엮여져 있지만, 아브라함이 실제 위험에 두 번이나 얽힌 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장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또한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창세기 26:1에서 블레셋의 왕으로 불림)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사라의 나이는 이제 90세였으므로 당연히 그녀의 아름다움은 퇴색했을 법도 한데, 바로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창12:15), 그녀가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보다 스무 살이나 더 나이가 들었지만 그렇게 더 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창12:11 참조) 그녀가 약속의 씨를 잉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더욱 젊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비멜랙은 그녀를 통해 자신의 영토에 들어온 부유하고 강력한 유목민의 족장과 동맹을 모색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체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보는 앞에서 아브라함을 책망하시는 대신 아브라함의 편을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에 아비멜렉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그는 선지자라"고 적극 옹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잘못했고, 아비멜렉이 옳음을 아셨지만(6절) 하나님은 아브라함 편을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아니면 왕뿐만 아니라 그 나라 백성들까지 결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선언하셨습니다(7). 이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도덕과 윤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의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편118:6-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개인의 성품에서 발견되는 약점이나 흠으로 인해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훼손된다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는 지속될 수 없고, 또한 인간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아담도 실패했고, 노아도 실패했고, 아브라함도 실패했고, 롯도 실패했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의 다름아닌 인간의 본성입니다. 바로는 아브라함보다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면 아비멜렉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에 언급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비멜렉의 현재 최고의 모습과 아브라함의 최악의 모습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역사를 읽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며, 성경을 읽는 올바른 방법도 아닙니다. 우리는 행위와 행위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삶을 비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유명한 인물들의 명백한 고통스러운 진실, 즉 인간 본성은 그 모든 자질과 에너지와 봉사에 있어서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인간 본성은 오랜 기간의 가혹한 수련을 통해서만 온전해지며,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명인으로 선택될 때, 비록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는 비참하고 안타깝게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항상 전체적으로 그러한 사역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한편으로 위안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계획을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실수는 나의 실수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시야는 좁고 어두우며, 인간 본성의 제한된 부분 이상을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였습니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우리처럼 인간의 본성을 알면서 성경의 위인들이 불완전하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때만 위대하고 강하다는 것, 즉 하나님께 진실할 때만 위대하고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Johann Heinrich Roos, Abraham and Sarah before Abimelech, 1681, Baroque

위 그림에서 사라가 오른손을 볼록 나온 배 위에 얹고 있습니다. 아마 임신한 모습으로 안심한 얼굴이 확연합니다. 20년 전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약속의 씨를 잉태한 상황이라 얼마나 놀랍고, 한편으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였을까요? 사라는 참 내면성이 있는 여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열방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을만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좀 멋쩍은 모습이지만 한쪽 다리를 계단에 올려놓고 당당하게 자기 잘못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10)”라고 하면서 은근히 블레셋 왕국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결국 17절에서와 같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 의해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심판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호의로 그 땅에 함께 거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삶 속에서 혹독한 연단을 거쳐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비범했기에 그의 삶이 평범하게 보인 것 뿐입니다. 사실 그의 삶은 비범했고, 그의 믿음도 비범했습니다. 그런데 비범한 그도 그 과정에서는 형편없이 실수를 하며 엎어지고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어서서 손을 탁탁 털고 가던 길을 갔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평범한 삶을 산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고, 비범함 속에 평범함이 있음을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늘 실수하고, 반복하여 죄를 범합니다. 죄는 징하고 고질적이어서 웬만해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가 아니면 죄를 이기기가 벅찹니다. 영적 슬럼프에 빠지면 죄책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가 온전해질 때까지 하나님의 훈련을 받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은혜의 값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덮어버리신 것입니다. 내 피 값으로도 안 되고, 모든 인류의 피 값으로도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 은혜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시편 78:38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Unknown artist, Kingdom Bible, Old Testament: Abimelech punished by God. Abimelech (Abimelec or Ahimelech or Ahimelek), King of Gerar, having taken by force Sarah (Sarah), Abraham's wife, but whom he believed to be only his sister, is deluded by God, and gives her back to

 

번외로 성화에는 동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본문에 별 의미가 없을 법한 개나 강아지들이 자주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를 부정하게 여기고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목축업을 주로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개가 유용할텐데 말이지요. 성경에서는 대부분 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참조; 잠26:11, 삼하9:8, 마7:6, 마15:26-27, 벧후2:22) 

 

그러나 이방 나라에서는 개를 애완용으로 기르며, 가족과 같이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 헬라(그리스) 세계에서는 애완견이 아주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화를 보면 애완견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도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헬라의 영향으로 애완견을 많이 키우는 것을 충분히 알고 계시고, 이를 감안하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수로보니게 여인(헬라인)과의 대화에서 "개"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게 수치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대화의 장면에서도 개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들도 "부스러기 은혜(?)"를 사모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은 저만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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