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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1_창세기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창세기 제21장_사라가 이삭을 낳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 아비멜렉과의 맹세)

by 적아소심 2024. 1. 3.

창세기 21:1-34

 

사라가 이삭을 낳다(1-7)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다(8-21)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22-34)

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4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윌리엄 휘태커, 아브라함과 이삭 (Abrahan and Isaac by William Whitaker)

 

드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차매(4:4)' 말씀하신 대로(창18:10,14) 사라를 돌보시고(visited),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did)하셨습니다(1). '돌보셨다(פָּקַ֥ד; 파카드)'라는 단어는 구약성서에서만 285회 사용되었는데, 본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방문하다(visit)', '보살피다(take care of)'란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 즉 창18:14에서 "일 년 후에 아들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친히 사라를 방문하시고(visited) 그 약속을 이행하셨습니다(did).

  • 창세기 17: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 세기 18: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로마서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사라는 90세의 초고령임에도 아들을 낳는 기적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25년간의 긴 세월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응답받았습니다(2). 말이 25년이지 우리는 1-2년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하지 않은지요?

 

이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방문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8:4). 응답 없는 신앙, 체험이 없는 신앙은 삶을 공허하게 하고, 고난과 환난이 닥치면 쉽게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체험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차원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이 오래되면 마치 내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자기확신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지식적인 앎의 단계, 즉 자기 확신의 단계에서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확신과 지적 신앙은 고난과 시련의 비바람이 몰아치면 금방 넘어지고 맙니다. "疾風知勁草(질풍지경초: 출처-후한서(後漢書) 왕패전(王覇傳)"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세찬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강한 풀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보아야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인정하고 영접할 때 우리는 어떠한 시련과 환란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적인(知情義 次元) 앎을 넘어서 삶에서 체험된 신뢰적 신앙으로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속에 구체적으로 증거가 되고, 그것이 나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과의 신뢰관계가 깊어지면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내면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이 삶을 인도하는 삶, 다른 말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또는 기도가 순간순간 묻어 있는 삶, 또는 무슨 일이든 예배적 자세로 임하는 삶으로 변하여 갑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면 말씀을 단순히 암기하고 공부하기보다는 그 말씀을 반추하며 성찰하는데 기준으로 삼아지게 되고, 기도할 때에 내 소원을 들고 아버지 하나님께 올라가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들고 우리에게 내려오십니다.("기도"의 의미에는 서로의 소원을 교환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께서는 주님의 소원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소원을 좇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구하고(적극적으로), 찾고(밑바닥까지 조사하며 찾는다는 의미), 두드리며(문 너머에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마태7:7).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기다리는 믿음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 시편 27: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 시편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 시편 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 이사야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반드시 방문하시고 돌보십니다. "百難之中待人難(백난지중대인난)"이란 말이 있습니다. "백 가지 어려운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약속 때문에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전화도 있고, 중간중간 확인도 가능한데,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약속의 말씀 하나만 붙들어야 하기 때문에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중간중간 헤매기도 했지만 그들은 25년 동안 끈질기게 기다렸습니다. 경수가 끊어지고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고목나무와 같은 상황이 되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가나안 땅에서 장막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절대 식언치 않으십니다.

  •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God is not man, that he should lie, or a son of man, that he should repent. Has he said, and will he not do it?)

시편 기자는 우리 인생들을 자녀 삼으시고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 시편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삭의 할례, 마리아 발트 수도원의 회랑의 작품, 독일(라인강 하류), 1525-30년경 <Circumcision of Isaac(generic title), Clear and coloured glass with painted details and yellow (silver) stain. From the cloisters of the abbey of Mariawald. German (Lower Rhine), c.1525-30>
필립 베레, 보위어 성경 100의 아브라함, 이삭의 할례, 네덜란드어 성경, 메드허스트-코수스-베레 ((Phillip Vere, Abraham in the Bowyer Bible 100. The Circumcision of Isaac. Dutch Bible. Medhurst-Kossuth-Vere) 아브라함 이야기 100. 영국 볼튼 박물관의 보와이어 성경, 3권 437 이삭의 할례에서 발췌. 창세기21:4. 네덜란드 Bi. 해리 코수스의 사진. 필립 베레가 만든 파일. 필립 메드허스트의 연구 (The Story of Abraham 100. From the Bowyer Bible in Bolton Museum, England, volume 3 print 437 Circumcision of Isaac. Genesis cap 21 v 4. Dutch Bi. Photo by Harry Kossuth. File created by Phillip Vere. Research by Phillip Medhurst.)

 

아브라함은 아들과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을 모두 순종하여 사라가 않은 아들 이름을 이삭(웃음)’으로 불렀습니다(3). 그리고 이삭이 난 지 8일 만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4).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의 나이는 100, 사라는 90세였습니다(5). 사라는 이삭을 해산함으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큰 기쁨(큰 웃음=이삭)을 주셨음을 고백하였습니다(6). 사라는 기적적으로 아들을 해산함으로 거의 일평생에 걸친 무거운 고통과 짐에서 일시에 해방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들 문제라는 평생의 인생문제에 묶여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녀의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씨와 약속을 받지 않은 씨가 같이 자라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때는 세월이 어느 정도 흘러 이삭이 젖 떼는 날이 되어 큰 잔치를 베풀게 되었습니다(8). 보통 3세 정도까지는 젖을 먹이기 때문에 아마 이삭이 3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9). 이것으로 인하여 집안은 아주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아비멜렉에게서 돈을 받으면서 아브라함에게 돌아오고, 아들을 나은 후 사라의 위세가 대단했는데 말이지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는 것은 '차하크(מְצַחֵֽק)'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조롱하다', '가지고 놀다'라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86세에 낳은 아들이니 이삭과는 나이 차이가 14살이 나니, 지금 이스마엘은 17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같은 나이면 거의 부모처럼 이삭을 돌보아야 할 시기인데 아이를 놀리고 조롱한 것을 보면 이삭으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동안 아버지에게 받던 사랑을 모두 이삭에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얀 루이켄(북부 네덜란드 화가; 1649-1712), 이스마엘이 할례 잔치에서 이삭을 조롱하다, 1700년, 레이크스 박물관 <Jan Luyken(Noord-Nederlands; 1649&ndash;1712), Ishmael Mocks Isaac at the Circumcision Party, 1700, Rijksmuseum>
프란체스코 주카렐리(이탈리아, 1702-1788), 이삭을 조롱하는 이스마엘 <Francesco Zuccarelli (Italian, 1702-1788), Ishmael mocking Isaac>

 

결국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을 요구하게 됩니다(10a). 그리고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하나님의 기업을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10b).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부합되지만, 사라의 요구는 한편으로 무척 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이미 과거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한번 쫓아냈던 사건으로 인해 아브라함과 하갈, 이스마엘에게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아브라함은 무척 고민이 되었습니다(11).

 

11절 원문을 보면,

첫 단어인 와예라(וַיֵּ֧רַע)는 '근심하게 하다(displease)' 또는 '악하다(evil), 해치다(hurt)'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매우(very)'라는 말과 '눈앞에(in the sight of)'라는 말도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사라의 말은 아브라함이 보기에 무척 악하거나 또는 상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원문에 대해서는 King James Version이 적절하게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 Gen 21:11 And the thing was very grievous in Abraham's sight because of his son. (KJV)
  • Gen 21:11 And the thing was very displeasing to Abraham on account of his son. (RSV)

결국 사라의 말이 아브라함의 눈에는 심한 악으로 보여지고 또한 그에게 깊은 근심을 가져다 주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쫓아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떡과 물 조금 주고 광야로 내쫓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갈의 남편이고, 또한 이스마엘의 아버지로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는 결과가 어떠할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광야로 나간다면 바로 죽음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의 추방을 동의하시고 사라의 말에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12a). 그리고 오직 이삭의 후손만이 아브라함의 씨, 즉 약속의 씨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12b). 또 한편으로 아브라함의 근심의 핵이었던 이스마엘도 하나님께서 보살피시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심으로 아브라함을 안심시키셨습니다(13).

 

12절 하반절에서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이스마엘을 구별하시고, 이삭을 통해 약속의 씨를 보내실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원어에 보면 이삭 안에씨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씨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 Gen 21:12b “for in Isaac shall thy seed be called.”
  • Gen 21:12b “for through Isaac shall your descendants be named.”

그리고 이스마엘은 따로 축복하시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아버지로서의 정()보다는 하나님의 역사 편에서 크게 보고 근심과 슬픔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돌보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섬세하고 안전하게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마엘도 어느 정도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계속 데리고 살았다면 아마 가정에 다툼과 분쟁이 많아져 아브라함은 날마다 갈등 구조 안에서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집안의 갈등 때문에 아들 낳은 하나님의 은혜는 다 까먹고 나이 많은 사라와 아직 어린 이삭은 스트레스 받으며 제대로 양육이 이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정의 불화를 미리 해소하시고, 모두가 잘 되는 쪽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집에서나 학교에서, 직장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 갈등으로 고통받고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갈등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신 후에는 반드시 그 갈등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께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길과 방법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28:23-29)

 

결국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떡과 물을 주어 내보냅니다(14a). 그동안 함께 살았던 정이 있고, 게다가 첩과 피붙이를 같이 보내는데 살림 세간을 주는 것도 아니고 떡과 물만 주어 내보내는 것은 어딘지 야박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내보냈을 것입니다.

조지 소퍼, 하갈과 이스마엘 추방(창21:9-10, 12-14). Hagar and Ishmael Expelled, by George Soper. (Gen. 21:9-10, 12-14).
얀 빅토르,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 아브라함은 먼 곳을 응시하며 이스마엘의 머리 위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질린 하갈은 손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사라는 집안 그늘에서 득의양양(得意洋洋)하게 지켜보고 있다. 창세기 21장, 캔버스에 유채 143.5x178.7, 이스라엘 박물관, 예루살렘, 1650년 (Jan Victors - The Expulsion of Hagar and Ishmael, Abraham stares into the distance and holds a hand above Ishmael`s head. Fearful Hagar wrings her hands. Sarah watches smugly from the shadows of the house. Genesis 21, Oil on canvas 143.5x178.7, Israel museum, Jerusalem, 1650)
일 구에르치노(지오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 1591-1666),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아브라함, 1657 <Il Guercino(Giovanni Francesco Barbieri; 1591&ndash;1666), Abraham Casting Out Hagar and Ishmael,1657>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하갈과 이스마엘, 1840년대 후반 (Jean-Fransois Millet(1814-1875), Hagar and Ishmael, late 1840s)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1696-1770), 하갈과 이스마엘 ("아브라함과 천사"와 대응) -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 1732년경 <Giovanni Battista Tiepolo(1696-1770), Banishment of Hagar and Ishmael, circa 1732>
구스타브 도레(1832~1883)의 삽화,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고 성공한 책 삽화가. 구스타브 도레는 『단테의 지옥』(1861), 『돈키호테』(1862), 『성경』(1866) 등의 책 삽화로 널리 알려졌으며, 대형 삽화책에 유럽 화폐를 발행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한 때 40명이 넘는 목판화 조각가를 고용할 정도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미켈란젤로식 누드, 북부의 고상한 풍경 전통,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한 것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절충적으로 혼합된 것이 특징입니다.
에마누엘 크레센츠 리스카, 사막의 하갈과 이스마엘, 1883 (Hagar and Ishmael in the Desert by Emanuel Krescenc Liška, 1884)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1796~1875), 광야의 하갈, 1835년 <Jean-Baptiste Camille Corot(1796-1875), Hagar in the Wilderness, 1835>
렘브란트(1606-1669), 사막에서 천사와 함께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 1640-42년경 <Rembrandt(1606-1669), Hagar and Ishmael with the Angel in the Desert, c.1640-42>

 

전후 사정을 묵상하지 않고,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쫓겨나 광야에서 죽음의 방황을 하는 것을 보면 참 시험 들기 딱 맞습니다. 사라는 그렇다치고 아브라함까지 동조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것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라와 하갈,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 모두를 살리는 방법, 모두가 잘 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갈등을 해소하지 않고 간다면 모두가 상처받고 공멸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약속의 말씀을 따라 방향을 주시고, 또한 하갈과 이스마엘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갈등은 화평 가운데 해결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시에는 아프고 괴로워도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할 때 모두에게 만족한 해결방향이 나온다는 것을 본문 말씀에서 배우게 됩니다. 

 

본문 8-21절에서는 하갈이라는 이름의 애굽 하녀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가족으로부터 어떻게 쫓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성경 기록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의 신앙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게 믿음이 있었던 것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쫓겨나자마자 한 치 앞의 삶을 확신하지 못한 채 브엘세바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의 삶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과일 열매도 없었고 생명을 유지하고 연장할 수 있는 물조차 부족했습니다. 친척도 없고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주셨던 만나와 같은 구호 식량도 없었습니다. 피난처도 없었습니다. 삶은 너무나 비참하고 왠지 모르게 불공평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갈은 사랑스러운 아들의 죽음을 예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의 죽음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며 아들을 멀리했습니다. 하갈이 얼마나 슬프고, 스트레스를 받고, 실망하고, 후회했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 눈물, 절망이 그녀의 영혼을 뒤덮었습니다. 얼마나 후회스러운 미래였을까요? 예전에 한번 쫓겨났다가 하나님의 중재로 다시 돌아가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잘 했다면 좋았을텐데... 한 순간의 시기와 질투를 참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킨 과거의 행동이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그리고 매정한 아브라함을 얼마나 원망했을까요? 하나님은 정말 자기 백성을 걱정하신다면 어디 계실까요? 아마 그녀의 마음에서는 수많은 질문이 그녀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드디어 가죽부대의 물도 떨어지고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갈은 관목덤불 아래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울부짖었습니다(15-16). , 정말 절망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절망의 끝에서 다시 기적이 일어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모든 것이 사라지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도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큰 소리로 외치며 울부짖는 기도도 들으시고, 너무 괴로워서 차마 말로 내뱉지 못하고 혀끝에만 말을 두어도 주님께서는 그것도 알아 들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너무 섬세하시고 자비하셔서 우리의 모든 내면의 소리까지 모두 들으시고 돌아보십니다. 이 주님의 관심을 받는 순간, 우리의 인생 문제는 모두 해결이 됩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을 아시고, 우리 말을 들어주시고, 한마디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오시면 모든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기" 때문입니다(새찬송가 2883).

  • 시편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뜨게 하시고 광야에서 우물을 공급해 주셨을 때 하갈은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에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쉬며, 희망과 기쁨의 기적을 경험했을까요? 광야의 환난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살면서 보고 배운 그 믿음을 이론이나 타인의 것이 아닌 자신만의 체험적 믿음으로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고 한 민족의 조상으로서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에 빠진 많은 이들에게 항상 삶의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오래 광야에서 방황했습니까?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많이 하지 않았는지요? 스스로 죽을 수는 없고 죽는 순간이 오면 행복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지 않았나요? 한번 안 되는 일들은 계속 안 되고, 불행 위에 불행이 겹쳐 오면서 정신없이 이곳저곳 땜빵질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요? 건강 문제, 빚 문제, 진로 문제, 또는 끝없이 어긋나가는 자녀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 않은지요? 마음이 아파 본 사람은 마음 아픈 것이 아떤 상태인지 잘 알 것입니다. 빚이나 법적인 문제로 고통 당하지는 않는지요? 어떤 분은 인생에서 끔찍한 순간과 깊은 슬픔을 경험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락에 까지 오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도 수천 년 전에 같은 상황에 처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거나 심지어 어려운 상황을 겪었지만 결국에는 극복했습니다. 오직 오직 고난 속에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다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도 위로하지 못하지만 오직 하나님 그분만 우리를 이해하시고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간증을 시작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광야에 생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생수를 공급해 주시고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출처 - WordPress.com
필립 메드허스트 그림 토라 108,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창세기 21:22-27. (The Phillip Medhurst Picture Torah 108, Abimelech and Abraham. Genesis 21:22-27)

 

아비멜렉은 블레셋 왕들의 일반적인 이름이지만, 여기서는 다신교를 믿는 게라의 왕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그랄 왕 외에도

  1. 아버지 기드온이 죽은 후 왕으로 선포된 아비멜렉(사사기 9:1-6),
  2. 아비아달의 아들이자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역대상 18:16),
  3. 시편 34편의 제목에서 아비멜렉 또는 아히쉬로 더 잘 알려진 가드 왕의 이름에도 이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비멜렉과 그의 군사령관 비골(이 사건의 목격자)은 아브라함에게 다가와 서로 성실하게 대할 것을 약속하는 맹세, 즉 일종의 휴전을 요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제안에 동의했지만, 아비멜렉의 하인들이 우물을 폐쇄한 것에 대한 불만을 언급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 사건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대답했습니다. 서로의 불만을 털어놓으며 두 사람은 조약을 맺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소와 양을 선물로 주었고, 아비멜렉은 우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그 지역에 타마스크 나무(또는 나무 숲)를 심어 블레셋 땅에 오래 머물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첫 번째 발판을 보여줍니다. 이 협약은 참여자 개개인의 개인적 관계를 넘어 그들의 상속인에게까지 확대되어 사실상 두 국가 간의 조약이었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근동지역에서 당시의 유력한 국가였던 블레셋과 대등한 위치로까지 성장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족장 시대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당시 그 지역에서 유력한 왕과 같은 힘을 지녔습니다.

 

당시 우물은 귀중한 재산이었기에 이 지역에서 이 협약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우물을 소유하면 그 땅에 대한 재산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맹세 즉, 조약이 체결된 곳에 형성된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베레르는 우물을 뜻하는 히브리어이고, 셰바는 일곱’(뒷장에서 설명할 이삭의 일곱 우물에서처럼) 또는 맹세’(히브리어 슈부아에서 유래)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일곱의 우물또는 맹세의 우물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브엘세바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65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지중해와 사해 남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남부의 네게브 사막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오늘날 이 지역에는 직경 45피트(13.7m)의 거대한 우물을 포함하여 여러 개의 우물이 있습니다. 이 우물을 파려면 약 15피트(4.6m)의 단단한 바위를 뚫어야 했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우물 내부에서 우물을 수리한 날짜가 기록된 비문을 발견했는데, 한 비문은 서기 12세기에 우물을 수리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다른 유적들은 이 지역이 기원전 4,000년부터 사람이 거주했음을 시사합니다. 마을의 현재의 경계 바로 외곽에서 발굴을 통해 고대 요새 도시가 밝혀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맹세의 증거로 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나무(히브리어로 에셀 나무, 영어로는 tamarisk tree)는 아브라함이 그 지역에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물 공급을 전제로 하고, 그 지역에 오래 머물겠다는 의도를 나타냅니다. 타마리스크 나무는 건조하고 건조한 지역뿐만 아니라 개울이나 습지처럼 물이 풍부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 또는 관목입니다. 이 나무는 염소의 먹이와 건축용 목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됩니다. 특히 나무는 숯의 좋은 공급원입니다. 이러한 물리적 특성 외에도 이 나무는 그늘을 만드는 데 탁월하여 장례/매장을 위한 장소로도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브엘세바의 우물터
에셀 나무(영어로 타마리스크 나무; tamarisk tree)
에셀 나무(타마리스크 나무) 꽃 핀 모습

 

삼상2:30b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을 두려워하며 존중할 때, 주님께서 또한 우리를 높여주시고 부끄럼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날마다 이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행하신 그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찬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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