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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1_창세기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창세기 제19장②_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그리고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

by 적아소심 2023. 9. 14.

창세기 19:23-38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다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

30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31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3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4 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5 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6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37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38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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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극적이고 종종 19금의 아슬아슬한 이야기로 많이 있지만 롯과 그의 딸들의 이야기만큼 충격적이고 도덕적으로 문제 많은 이야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위 본문인 창세기 19:30-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과 그의 아내, 두 딸은 두 천사의 방문을 받았는데, 천사들은 소돔이 하나님의 임박한 멸망을 받기 전에 도시를 떠나라고 촉구했습니다. 미적거리다가 심판이 임박하여 어쩔수 없이 도망치듯 떠나던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천사들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롯과 그의 딸들은 소알 산골 마을 근처의 동굴로 피신했습니다. 살아남은 남자가 없다고 믿은 두 딸은 하나님의 그 다음 은혜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버지를 포도주에 취하게 한 후,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 각각 아이를 임신하기로 모의했습니다. 근친상간으로 인해 모압과 암몬 족속의 시조인 모압과 벤암미가 탄생하게 됩니다.

 

수 세기에 걸쳐 예술가들이 이 암울하고 불안한 에피소드에 끌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욕망과 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성서 이야기는 지난 세기의 예술가들에게 분명한 매력을 주었지만, 영성, 믿음, 자유 의지, 권리와 의무, 희생, 의지, 환경에 대한 보다 심오하고 복잡한 질문도 제기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었으며, 그 중 많은 부분이 예술에 반영되었습니다. 옛날부터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는지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니콜라스 샤프롱 Nicolas Chapron  샤토둔 (Chateaudun),  프랑스  1612~1656  로마 ),  소돔을 탈출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의 모습

니콜라스 샤프롱(Nicolas Chapron, 프랑스 1612~1656)이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에 의해 처형된 바티칸 로지아(Vatican Loggia)를 위한 라파엘(Raphael)의 디자인을 따라 조각한 작품입니다. 작품의 왼쪽 하단에 "R.V.I.(Rapheal Urbino Invented it, 라파엘 우르비노가 창작하다)"라고 새겨져 있고, 오른쪽 하단에 "N.C.F." (Nicolas Chabron made it, 니콜라스 샤브론이 제작)이 새겨져 있습니다. 1649년 로마에서 샤브론에 의해 처음 출판되었으며, 유명한 인쇄물 발행인이자 수집가인 피에르 마리에트(프랑스, 1694-1774)의 주소가 적혀 있지만, 이는 마포지에 인쇄된 후기 판본의 것이라고 합니다.

한스 콜라르트(Hans I Collaert, 브뤼셀, 1525/30-1580), 천사들이 롯과 그의 딸들을 소돔의 멸망과 롯의 아내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습입니다. 1560년대 후반 프란스 망통의 판화
 

롯과 그의 딸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이지요. 또한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는 오르페우스(Orpheus)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도 돌아섰기 때문에 이 자비에서 제외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존 마틴(John Martin),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1852년 작품
 

위 그림의 왼쪽 아래쪽에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봄으로 말미암아 소금기둥으로 변해있고, 롯은 회한과 슬픔으로 얼굴을 가리며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긴급했든지 롯은 빈손이고, 두 딸은 그래도 금빛 술병을 지니고 갑니다(술병이라는 것에서 후의 사건의 암시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 아닐런지요? 심판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불의의 사고일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제임스 티소(James Jacques Joseph Tissot, French, 1836-1902), 불꽃이 일어나고 있는 소돔을 보고 있는 아브라함, circa 1896–1902
 

창세기 19:27-29: 불타고 있는 소돔을 바라보는 아브라함, 출처 Samuel Ashwood 블로그

창19:27-28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의 동역자인 아브라함도 이 대격변의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섰던 곳(27절)"으로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 그 산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부지런히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 장소를 찾아 주님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주님이 자신에게 계시해 주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그가 본 것은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였습니다. 그가 평원 지역인 소돔과 고모라 방향을 바라보았을 때, 무성하고 풍성한 평원은 보이지 않고 용광로 연기처럼 어둡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거룩한 열방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실제로 심판의 모습을 목격한 그의 마음은 큰 충격으로 덜컹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중보기도가 성공하지 못했음을, 즉 소돔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 열 명도 살지 못했음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소돔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악을 추구함으로써 신속하고도 완전한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과연 롯이 탈출할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의 중요하고도 가장 시급한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29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평야의 도시들을 멸망시키실 때 동시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그를 위해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서 내보내셨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은혜의 보좌 앞에 우리의 이름을 올려드리며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위험과 재앙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의 중보기도로 인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이 아실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보기도는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너무나 중요하여 또한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 우드포드(1763-1817), 롯과 그의 딸들(루이 장 프랑수아 라그레네 작품 모방), 내셔널 트러스트, 스터헤드 Samuel Woodforde(1763–1817), Lot and His daughters (after Louis Jean François Lagrenée), National Trust, Stourhead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을 때 롯의 아내는 천사들의 명령을 거역하고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제 딸들은 자신들만이 세상에 남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손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딸들은 아버지를 취하게 한 후 그와 동침하여 각각 아들을 잉태했습니다. 여기서 딸 중 한 명은 유혹의 일환으로 아버지에게 잔을 내밀고 서 있고, 다른 한 명은 포도주가 더 들어 있는 암포라를 들고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게리에리(Giovanni Francesco Guerrieri, 1589–1656), 롯과 두 딸, 1617–1618, 맨체스터 아트 갤러리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게리에리의 캔버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롯의 딸들이 아버지와 인류의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 불안하지만 필수적인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여성의 속임수라는 주제가 여전히 크게 다가오지만 - 롯의 맨 어깨에 놓인 위로와 설득의 손길을 주목해 봅니다. 두 딸은 모두 감정 없이 효율적으로 계획을 실행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세 사람 모두 의도적으로 죄악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상황의 희생자임을 암시하는 것일까요? 또한 구약성서의 도덕적 맥락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면 피해야 할 사회적 낙인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오반니 F. 게리에리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의 그림은 이야기의 도덕적 딜레마와 모호함을 모두 효과적으로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17세기 내내 예술가들에 의해 계속 그려졌지만, 이전의 예술적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수준의 높은 드라마는 종종 없었습니다. 마르칸토니오 프란체스키니(Marcantonio Franceschini)의 버전은 거의 우아한 고전주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르칸토니오 프란체스키니 (Marcantonio Franceschini, 1648–1729), 롯과 두 딸, 1676-1677, 둘위치 픽처 갤러리(Dulwich Picture Gallery)
 

편안한 포즈, 흐르는 듯한 의복, 부드러운 색감이 어우러져 장면의 감정적 강도를 낮춥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불안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롯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소극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사건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앉아있는 딸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오른손은 딸의 상체 위로 조심스럽게 머물러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롯의 과실은 종종 술에 취한 상태로 인해 변명되지만 프란체스키니의 캔버스에서는 그가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한 그는 약하고 연약한 인물로 묘사되는 일반적인 모습보다 훨씬 육체적으로 강하고 튼튼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이 이야기에 대한 예술적 묘사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예술에서 이 주제를 다룬 드문 예는 에드워드 번 존스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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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이 아브라함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까지 그리고 아브라함과 헤어져 소돔으로 간 이후까지의 긴 여정으로 보건데, 그의 삶도 녹록치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거의 대부분의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살며 그에게 많은 믿음의 삶을 배우며 익혔을 것입니다. 평생 아브라함과 살 수는 없을지라도 근거리에서 교류하며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다면 인생 마지막 비극은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을 끝까지 놓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죄악된 도시 소돔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내적(신앙적) 갈등을 하며 살았을까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세상도 같이 사랑하게 되면 늘 마음에 갈등과 번민이 따릅니다. 세상의 대세(大勢)와 믿음의 삶의 결은 많이 다릅니다. 믿음의 삶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이유는 세상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매인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벧후 2:7-8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대로 의인 10명이 있으면 소돔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소돔에서 의인은 롯 단 1명 뿐이었습니다. 롯의 삶은 의인과 세상 사람 사이에서 늘 왔다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롯도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결국 그 가족만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어거스틴의 사상이나 칼뱅의 5대 강령의 영향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전적인 타락(전적 타락과 무능력, Total depravity, 5:12-21),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4:4-8), 제한적이며 특별한 속죄(Limited atonement, 1:4 1:21),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6:37-40, 8:18-39), 성도의 견인(굳게 참고 견딤, Perseverance of the saints, 벧전 5:10). 이러한 신학적 내용은 물론 우리의 신앙을 잘 설명해 주는 중요한 것이지만 성경 말씀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많은 성경 말씀, 특히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에 대해서 결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세상 끝날까지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복음5:19-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18:2-3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가복음10:14-15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요한복음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에베소서5:3-7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얻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그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나의 구원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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