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T01_창세기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창세기 제22장_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시다

by 적아소심 2024. 1. 7.

창세기 22:1-24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시다(1-19)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나홀의 후예

20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21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24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

 

아브라함 일생에서 최대의 위기이자 믿음의 시련이었던 창세기 22장의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사건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또한 하나님 편에서 우리 인생에게 요구하시는 믿음과 순종의 최고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간 고단한 믿음의 여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가나안 땅을 순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삭을 믿음의 축복으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이삭을 걸고 모리아 산에서 일생 최대의 시험을 하셨습니다.

 

지금의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은 당시 하나님께서 엄히 금지하신 인신 제물에 대한 패악을 다시 인정하는 듯한 불합리하고 부당한 명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 간의 부조리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윤리와 도덕과 율법의 차원을 뛰어넘는 시험 즉, 믿음의 최고선()인 순종을 요구하신 것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구속을 위한 희생의 피가 요구되는 사실을 각성시키기 위한 복선이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바로 그 구속 희생의 피를 장차 당신께서 하나님 당신의 독생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흘리실 것을 표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걸고 아브라함(이삭도 포함하여)의 순종을 요구하셨듯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걸고 우리 인생들의 순종이 아닌 그분의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장 소중한 이삭은 결과적으로 살리시고 대신 뜬금없이 옆에 있던 어린 양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끝내 살려내시지 않고 그대로 어린 양으로 내놓으셨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이지요.

 

따라서 이삭 희생 사건의 일차적 목적은 마지막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고 그에게 주신 축복을 재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차적 목적은 이삭을 약속의 씨를 품은 유일한 자식으로 주시면서 인류 구속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장차 그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수난을 통한 인류 구원의 성취를 미리 예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고통과 번민과 눈물 어린 순종의 모습들을 보면서, 또한 같이 먹먹한 가슴으로 번민하고 아파하며 마음에 흐르는 눈물로 우리의 세속적인 욕망을 씻어내는 카타르시스(은혜와 기쁨)를 누리게 됩니다.

 

초대 교부 오리겐(Origen, A.D.185-254)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눈물로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이 감격과 깨달음의 뜨거운 눈물로 나의 무딘 영혼을 정화해 주소서."

 

,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1-2절에서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릴 것을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부르시고,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와는 달리 이제 영적으로 성숙한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에 대답합니다(1). 1a절에서 "그 일 후에"라는 말은 정확하게 복수형으로 "그 일들 후에" 입니다. RSV에서는 "After these things", KJV에서는 "And it came to pass after these things"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일들 후에"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기까지의 아브라함의 수 많은 순례의 여정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21장의 사건은 이삭이 세 살 때쯤의 시기였다면 22장에서의 시점은 21장 사건의 직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보낸 후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본문에서 이삭이 번제물을 태울 땔감을 지고 산에 올랐다는 것을 보면 이삭이 상당히 성장한 시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4-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2). 그것도 번제로, 즉 사랑하는 아들을 양처럼 칼로 죽여서 각을 뜨고 그것을 태워서 드리라니, 참으로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인내하며 기다린 결과 어렵사리 얻은 자식을 다시 가져가신다니 얼마나 가슴 아프고 힘들었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보다 이삭을 더 사랑해서 질투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입을 싹 씻어서 그랬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후의 행동을 보면 아브라함의 신앙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상상을 초월하는 명령의 말씀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불합리한 명령도 놀랍지만, 그의 순종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의 순종에는 무언가 놀라운 믿음의 비밀이 있어 보입니다.

 

현재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는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이 있는 예루살렘까지는 거의 80km가 넘는 거리여서 나귀를 끌고 가더라도 3일을 가야 합니다(4). 모리아 산은 지금의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산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 약 80km 정도임
코넬리스 드 보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데리고 가는 아브라함" <CORNELIS DE VOS, "Abraham Taking Isaac to be Sacrificed">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 등에 땔감과 이삭을 태우고 두 종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4). 아브라함도 이제 노경이 되어 지팡이를 지고 먼길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의 왼손에는 칼이 들여져 있고, 그의 표정은 무척 고뇌에 차 있습니다. 밤새 잠을 못자고 고민을 했는지 얼굴이 부스스 하고 이삭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3a)"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캄(שְׁכֵּ֨ם)'은 사역 능동형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다'는 뜻 외에 '열심히 하다', '정직하게 행하다'는 뜻도 있습니다(참조, 대하36:15; 3:7). 이 말씀을 통해 당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들 이삭을 죽여 희생 제물로 드리러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을 위해 얼마나 자신을 설득하며 독려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칼로 이삭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그 칼이 이삭이 아닌 자신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밤새 느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난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얼마나 정직하고 헌신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순종)의 깊이와 넓이는 하나님의 부조리한(?) 말씀을 소리 없이 안고 흐르는 깊은 강물과 같았습니다. 아마 그는 밤새 강물과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명령을 붙들고 씨름하며 그 말씀으로 인한 모든 장애를 그 눈물로 넘어섰을 것입니다.

페드로 오렌테(Pedro Orrente; 1580-1645), 이삭의 희생의 길: 이 작품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과 아브라함이 제사의 장소로 가는 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7 세기 페드로 데 오 렌테의 공방에서 제작되고 레온 박물관(Museo de Le&oacute;n)에 보관되어 있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관한 9개의 캔버스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구스타브 도레, 아브라함 믿음의 시험, <GUSTAVE DOR&Eacute;, "The Testing of Abraham's Faith">
작가 미상, 모리아 산을 오르는 아브라함과 이삭. 어린이 성경(카셀, 1880년경)의 삽화 <Author Unknown, Abraham and Isaac ascending Mount Moriah. Illustration from The Child's Bible (Cassell, c 1880)>

 

드디어 삼 일째 아브라함 일행은 모리아 산에 이르러, 두 종을 나귀와 함께 산 밑에 남겨두고, 번제 땔감을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fire)과 칼을 손에 들고 둘이서 함께 산에 오르게 됩니다(4-6). 산을 오르는 아브라함은 시종 침울하고 번민이 가득합니다.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길에, 번제 땔감을 들고 가던 아들 이삭의 말이 아브라함의 가슴을 비수와 같이 파고 듭니다. 7절에서 "내 아버지여(My father)!" 이삭의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고 따뜻한지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 역시 다정하고 따뜻합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고 ", ?"라고 대답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들의 대답은 보통의 부자 관계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은 여행 도중에 계속 궁금했던 것을 이제야 묻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굳은 표정과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모습에 조심스럽다가 이제 둘이 함께 걸으면서 묻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얼마나 아브라함에게는 고통스러운 질문이었을까요? 사실은 이삭이 어린 양처럼 드려질 제물인데, 그 이삭이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는 말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묘하게도 앞으로 일어날 기적의 복선을 깔아 놓는 듯한 믿음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8b)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습니다(9a). 이제 아브라함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윌리엄 홀, 아브라함과 이삭 <Abraham and Isaac by William Hole>

 

이제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았습니다(9a). 위 그림에서 아브라함은 제단 위에 나무를 쌓아 벌여 놓고, 불을 지핀 후 칼을 앞에 두고 이삭의 손을 잡고 울고 있습니다. 이제야 이삭은 모리아 산에 오게 된 사연의 전말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삭은 조금도 거부하거나 반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그 일을 행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열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아들인 이삭이 위로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제물이 되시겠다고 십자가로 향하실 때 슬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과 오버랩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픈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귀한 희생의 모습이 너무나 유사하게 우리 마음에 다가옵니다. 어쩐지 아브라함의 시험과 고통은 우리 주님의 아픔과 사랑으로 전이되어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감동과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가혹한 시험을 하신 것일까요?

얀 빅토르, 희생 전의 아브라함과 이삭 <JAN VICTORS, "Abraham and Isaac before the Sacrifice">

 

아브라함이 이삭의 손을 잡고 뭔가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둥그렇게 뜨고 뭔가 확신을 주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고, 이삭은 이를 조용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이삭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먼저 가서 기다리면 나도 곧 가서 만날 것이라는 이별의 말일까요?

 

이 시간이 지나면 아브라함과 이삭은 영원히 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불태워 번제로 드리기 때문에 완전히 소멸하여 그 뼈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불가능한 가운데 주셨기 때문에 또한 불가능한 가운데 이삭을 다시 살려주시든지, 아니면 조금 후에 아브라함이 이 땅을 떠나 하늘 본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습니다.

  • 히브리서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았지만, 이미 그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라의 죽은 태를 부활시키셔서 그로부터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죽은 이삭, 불태워 뼈만 남은 상태에서 얼마든지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믿음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설득되었습니다. (계속 말씀드리만, 믿음은 하나님의 설득(God’s persuation)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설득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이삭도 그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900년대 초의 성경 삽화,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포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얀 리벤스(1607~1674), 기도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캐슬 하워드, 칼라일 백작 컬렉션 경력 초기에 렘브란트와 스튜디오를 공유했던 네덜란드 화가. <Jan Lievens (1607 &ndash; 1674), Abraham and Isaac Praying, Castle Howard, Collection Earl of Carlisle Dutch painter, who shared a studio with rembrandt at the beginning of their careers.>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은 끌어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거의 115세 이상 되었을까요?(당시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약 137세이고 이삭은 37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당시 이삭의 나이를 13~20세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으로 어린 이삭을 안고 그의 볼에 키스하며 기도합니다. 이삭은 아무리 순종하며 그 길을 따르지만 죽음의 공포가 눈에 가득합니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요?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내용을 보기 때문에 일련의 과정들을 짧은 시간 속에서 잠시의 감동으로 스쳐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 삶의 현장에 있는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깊은 심연의 나락(奈落)에서 영원히 시간이 멈춘 것과 같은 고통과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왜 이리 길고 깊고 어두운 것일까요? 죽음의 순간에 이른 공포와 전율(두려움과 떨림),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하였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주마등같이 흘렀을 것입니다지금 안고 있는 이 사랑하는 아들이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내 품에 돌아올까? 이런 생각을 하면 이 시간이 영원히 멈추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필립 메드허스트의 그림으로 보는 성경 009 아브라함과 이삭. 해롤드 코핑(1863-1932) 작 <Phillip Medhurst's Bible in pictures 009 Abraham and Isaac. By Harold Copping (1863-1932)>

 

이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9). 바닥에 이삭에게서 벗긴 옷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왼손을 아들 이삭의 가슴에 올려놓고 하늘을 향해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굳은 결의에 차 있는 것 같습니다. 눈물로 한 없이 적셔진 마음을 설득하고 설득해서 바위같이 굳게 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두 할 터인데, 그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아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창세 전부터 십자가의 제물로 주시기로 약속한 아버지 하나님만이 그 심정을 이미 아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바로 아브라함이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의 씨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신다는 약속의 말씀 의미를 아브라함도 알도록 하기 위한 배려일까요? 아무튼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외아들을 어린양으로 드리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연합이 아닐까요?

 

한편,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이삭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이삭은 얼마든지 아버지의 말을 듣거나 행동을 보고 도망치거나 거부할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얌전하게 죽음의 길을 순종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이는 그가 평소에 이미 변화된 아버지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알게 되고 그 또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곧 신뢰이며, 하나님의 설득을 말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믿기 위한 지적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신앙적으로 양육을 받으며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희생(Abraam' s sacrifice), 지아니 데 로사(Gianni de rosa)의 작품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는 알 수 없음

 

드디어 아브라함은 제단 위에 뉘어있는 이삭을 도살하기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이삭을 묶고 제단 위에 올려 뉘어 놓고 칼을 들어 도살하는 것은 순간의 시간입니다. 아들 이삭을 죽여 각을 떠서(조각을 내어) 불태우는 그 순간이 마치 슬로 모션(slow motion)처럼 다가오고 있습니다. 느린 화면으로 다가오는 듯한 아브라함과 이삭의 표정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두려움과 떨림'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은 '공포와 전율'이라는 말로 번역된 적이 있었습니다)의 순간에 들어갑니다. 서슬이 시퍼런 칼날 앞에서 이삭의 눈은 두려움으로 떨립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인다는 두려움과 하나님의 급격한 현현(顯現)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떨며 칼을 떨어뜨립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케에르케고르는 "두려움과 떨림(공포와 전율)"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바로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그 장면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목은 빌립보서 212b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55:5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가 현재 아브라함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무한한 체념은 신앙 이전의 마지막 단계"라고 말했습니다. 무한한 체념을 통해서만이 그의 영원한 의로움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영원한 의를 깨닫고 나서 믿음의 문에 이르렀고 믿음에 따라 행했습니다... 이 행동으로 그는 믿음의 기사가 되었습니다. , 사람은 무한한 체념으로 이 땅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 하며,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포기해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두려움과 떨림(2:12b)"의 전제는 바로 빌립보서 2:5-11절 말씀입니다. 바로 무한한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에서 오는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장자(莊子)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 만물(萬物)에 매달려(: 매달현)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만물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풀려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무한한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는 바로 이 현해(懸解;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풀려남)의 단계(, 죽음과 같은 공포와 전율을 느끼는 단계)라는 것입니다(莊子 第3篇 養生主 第4참조). 우리 인간은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를 통해서 진정한 해방의 경지(장자의 표현으로 '현해')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 빌립보서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성자 예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특권과 신성(神性)을 버리신 것은 자기 비움의 상태로 가신 것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자기 포기 즉,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는 태연하게 그리고 폼나게 가는 겸손하고 멋진 위인(偉人)의 길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두려움과 떨림의 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 그리고 예수님과 이삭의 모습은 표징적인 상호 관계를 보여주는 위대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참조, 9:7-8)

피터 티스, "이삭의 희생" <PIETER THIJS, "Sacrifice of Isaac">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아브라함을 막고 있는 장면에서 아브라함의 눈에는 물기가 그렁그렁하게 남아있습니다. 자기 비움과 자지 포기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브라함의 촉촉한 눈에서 이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는 세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윤리와 도덕, 죽음까지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의 최고 단계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씨에서 다윗이 나오고, 다윗의 씨에서 그리스도가 나오고, 그리스도 예수님 또한 이 최고 믿음의 단계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시며,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원대한 구속의 역사 측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를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사람으로 연단하시고 마지막 관문의 시험을 통해서 그를 최고 믿음의 단계로까지 단련하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예표하여 주심으로 우리의 신앙의 모범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칭의와 하나님의 자녀됨이 나오고, 우리 신앙의 본류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은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거대한 인류 구속의 역사를 여는 시점에서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거대한 산맥과 같은 그 죽음의 순간을 극복하게 하는 위대한 믿음의 의()를 이루는 대전환점(the great turning point)을 이루었습니다.

렘브란트, 아브라함과 이삭, 1634년작 <Abraham and Isaac (oil on canvas), Rembrandt, 1634>
바로크 양식의 테네브리스트 방식으로 그려진 카라바조의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by Caravaggio, in the Baroque tenebrist manner>
마르크 샤갈(1887-1985), '이삭의 희생' <Sacrifice of Isaac by Marc Chagall(1887-1985)>

 

아브라함이 막 이삭을 죽이려 할 때, 하나님께서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연속적으로 두 번이나 부르신 것은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음을 의미하고, 하나님은 이제 진정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그를 제지하신 것입니다(11a).

 

그때 아브라함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11b)".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령하셨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순종은 그의 삶에서 온전히 드러난 증거였습니다. 심지어 아들 이삭이 7절에서 "내 아버지여!"라고 불렀을 때도 그는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도,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언제나 변함없는 자세와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기뻐하시고 인정하신 것이 아닐는지요?

"즐거운 이야기; 또는 원더풀 북에서 나온 홈 토크(home talks)", 127페이지의 이미지, 1888 <Image from page 127 of Delightful stories; or, Home talks out of the Wonderful book. (1888)>
팻 니콜, 패트릭으로도 알려진 영국인 (1907-95), 이삭의 희생 <Pat Nicolle, also known as Patrick, English (1907-95), The Sacrifice of Isaac>

 

긴급하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손대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12a).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사자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을을 확인했다고 선언하십니다(12b). 그리고 그 때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발견하고(13a), 그 숫양으로 이삭을 대신해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13b).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게 됩니다(14).

얀 리벤스(1607-1674), 아브라함과 이삭, 1637년경, 헤르조그 안톤 울리히 박물관, 브라운슈바이크 <Jan Lievens(1607-1674), Abraham and Isaac, c.1637, Herzog Anton Ulrich Museum, Braunschweig> 이 작품은 창세기 22:15과 관련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테비에(동생), 아브라함의 희생 <DAVID TENIERS the Younger, "Abraham's Sacrifice">

 

이제 이삭을 죽여 번제물로 드리려던 계획은 하나님의 긴급한 제지로 폐기되고,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어린 숫양을 대신하여 번제물로 드린 후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다시 한번 안아주고,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도록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믿음을 확증하고, 다시 한번 그에게 약속의 말씀을 재확인하십니다.

  • 창22:16-18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8절에서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라는 말에서 히브리 원어 문장의 첫 단어로 나오는 '에케브(עֵ֕קֶב)'는 명사로 사용될 때는 '끝'. 또는 어떤 일의 끝에 주어지는 '보상'이란 뜻입니다(19:12; 22:4; 5:23). 그리고 본문에서는 '~ 때문에'라는 뜻으로 어떤 일의 근본적인 이유를 이끄는 접속사로 쓰였습니다(14:24; 7:12; 4:12). 본문 말씀에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까지도 아끼지 않고 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그 믿음의 행동의 '끝'으로, 다른 말로 하면 그 행동의 '보상'으로 17-18절의 축복이 주어졌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은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로 가서 거기에서 거주하였습니다(19). <終>

 

 

[번외 - 참조]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드리려던 시기의 이삭의 나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당시 이삭의 나이를 13~20세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건에 대해 기록한 외경 또는 다른 기록(특히 '야살의 책')에 의하면 이삭의 나이는 37세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성경에서 야살의 책을 두 번 언급을 하였는데(10:13; 삼하1:18),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야살의 책에 나온 족보의 연대와 창세기의 족보 및 연대기는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다만 그 내용중 일부가 문명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면도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야살의 책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사라 및 충성스러운 종 엘리에셀에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 몰래 아침 일찍 이삭을 데리고 떠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에 도착할 쯤에 악마(사탄) 또는 악마의 하수인 중 하나가 사라에게 와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여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악마는 어쩌면 이삭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사라는 이삭을 잃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크게 상심하여 울며 아브라함과 이삭을 찾으러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녀는 헤브론 쯤에 와서 너무나 큰 슬픔과 절망으로 인하여 탈진하여 죽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줄도 모르고 이삭과 돌아왔다가 사라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따라서 23장에 나오는 사라의 죽음은 이삭의 희생 제물 사건과 바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사라가 죽을 때의 나이가 127세였으므로 아브라함은 137, 이삭은 37세 정도가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삭의 나이가 이미 장성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는 성경 이외의 자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정설은 아니고 하나의 가설 정도로만 참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야살의 책'은 오래 전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