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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13장_씨 뿌리는 자의 비유

by 적아소심 2023. 3. 16.

마태복음 제 13장


▣ 1-9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막 4:1-9눅 8:4-8)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Jesus teaches the people by the seashore, James Tisso; 바닷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제임스 티쏘 작품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 제임스 티쏘 작품
Jesus sitting in the boat teaches the crowd, After Johann Friedrich Overbeck(1789-1869); 배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요한 프리드리히 오베르벡 작품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 하인리히 페르디난도 호프만(Heinrich Ferdinand Hofmann, 1824-1911) 작품

예수님의 3대 사역은가르침(teaching), 전파함(preaching), 고치심(healing)입니다(마태 4:23; 9:35). 예수님은 틈만 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한 두 줄로 간단하게 요약한 지문을 그냥 흘러 보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수천년을 기다리시고, 그리고 오셔서 이 일에 모든 힘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의 그 짧은 생애 동안 온 힘을 다하셨습니다.

Pieter Bruegel the Elder, Parable of the Sower, 155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피터 브뤼헬(형) 작품 (위 2개)
The Parable of the Sower, Michel Lasne, French, 1590-1667;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미셀 라스네(1590-1667) 작품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4세기 필사본, 트르노보, 불가리아
The Sower, Sir John Everett Millais, Bt, published 1864; 씨 뿌리는 자, 존 에버렛 밀레즈 경, 1864년 출간

▣ 10-30 비유를 설명하시다(막 4:10-20눅 8:9-15)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설명>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가라지 비유>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설명

오늘은 예수님께서 특이하게 여러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비유는 하늘의 의미를 지닌 이 땅위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은 심오하고 신성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쉽게 기억할 수 있고, 문자가 대범하며, 상징이 풍부하여 의미가 깊습니다. 비유는 유대교에서 흔히 사용되는 가르침의 형태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특정 시점 이전에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일반적인 사물(소금, 빵, 양 등)을 사용하여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으며, 그 의미는 가르침의 맥락에서 매우 명확했습니다. 비유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했고,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어느 시점에서 비유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비유들의 의미에 대해 궁금해하도록 내버려 두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바로 본문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해석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무리들로부터 떼어 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13:10-17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 사역의 이 시점부터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실 때 제자들에게만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지를 계속 거부했던 사람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 그분의 의미를 궁금해했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를 받은 사람들과 불신앙으로 일관하는 사람들, 즉 "항상 듣기는 하지만 실제로 깨닫지 못하고" "항상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딤후 3:7) 사람들을 분명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영의 일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영적 분별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진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요16:13).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진리의 빛에, 귀를 영생의 말씀에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진리가 모든 귀에 달콤한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깊은 것에는 관심도 없고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비유는 신성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이고 기억에 남는 수단입니다. 우리 주님의 비유는 아주 적은 단어에 많은 양의 진리를 담고 있으며, 이미지가 풍부한 주님의 비유는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유는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둔하고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비유는 심판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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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자의 비유(네 가지 흙의 비유라고도 함)는 마태복음13:3-9, 마가복음4:2-9, 누가복음8:4-8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무리에게 말씀하신 후 마태복음13:18-23, 마가복음4:13-20, 누가복음8:11-15에서 제자들을 위해 이 비유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네 가지 유형의 땅에 씨를 뿌리는 씨 뿌리는 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길가의 딱딱한 땅은 씨앗이 전혀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고, 씨앗은 새의 먹이가 될 뿐입니다.
  • 돌이 많은 땅은 씨앗이 발아하고 자라기 시작하기에 충분한 토양을 제공하지만 땅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식물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곧 햇볕에 시들어 버립니다.
  • 가시가 많은 땅은 씨앗이 자랄 수 있게 해주지만, 경쟁하는 가시가 유익한 식물의 생명을 질식시킵니다.
  • 좋은 땅은 씨앗을 받아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은 복음에 대한 네 가지 반응을 강조합니다. 씨앗은 "하나님 나라(천국)의 말씀"입니다.

 

딱딱한 땅은 죄로 인해 굳어져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상징하며, 마귀는 그 메시지를 빼앗아 마음을 무디게 하고 말씀이 감동을 주지 못하도록 합니다.

  • 돌밭은 말씀에 기뻐한다고 고백하지만 마음이 변하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소위 믿음이 금방 사라지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 가시덤불 땅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마음은 재물과 쾌락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의 일들로 인해 말씀에서 시간과 관심을 빼앗겨 결국에는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음 그 말씀이 그의 삶에서 그 결과를 이루도록 허용하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구원의 증거는 열매이기 때문에 "좋은 땅"으로 표현된 사람은 네 사람 중 진정으로 구원받은 유일한 사람입니다(마 3:7-8; 7:15-20).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요약하자면, 먼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구원은 비록 기쁜 마음으로 들을지라도, 그 피상적인 것 이상의 것이라는 겁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 성장해 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토양"의 본보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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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면서 예수님은 다시 가라지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24-30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면서 그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The Parable of the Wheat and the Tares, 1540 (Das Gleichnis vom Weizen und Unkraut, 1540) Lucas van Gassel; 밀과 가라지의 비유, 1540, 루카스 반 가셀 작품
The parable of the Wheat and the Tares, Marten de Vos (Flemish, 1532&ndash;1603)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마르텐 드 보스(플랑드르, 1532-1603) 작품
Parable of the Wheat and the Tares, Abraham Bloemaert(1564-1651), 밀과 가라지의 비유, 아브라함 블루마에르트(1564-1651)

위 그림에서는 화가는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게으른 농부들이 잠을 자는 동안 뿔과 꼬리로 식별되는 악마가 밀을 심은 밭에 가라지를 심는 장면으로 묘사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게으름을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 인류가 저지른 일곱 가지 대죄 중 하나로 여겼는데, 두 벌거벗은 부부의 잠자는 모습이 이를 암시합니다. 비둘기장(비둘기나 비둘기를 유인하기 위한 새집으로 번거롭게 키우지 않고도 먹이를 구할 수 있음)은 쉬운 길을 택하는 도덕적으로 게으른 사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욕으로 유명한 염소는 방종을, 공작새는 자부심을 암시합니다. 그림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농부들이 잠자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화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피곤하거나 때가 되면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잠을 자건 자지 않건 마귀는 어찌든지 방해를 할테니까요. 아무튼 작가가 농부들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블루마에르트는 자연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데 재능이 있었지만 교훈이 담긴 그림을 선호하여 순수한 풍경을 그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유트레히트(네덜란드 도시)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다음 세대의 많은 주요 예술가들을 양성했습니다.

 

The Parable of the Weeds, Domenico Fetti, ca. 1622, 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 Madrid; 가라지의 비유, 도메니코 페티, 1622년경, 마드리드 국립 티센-보르네미사 박물관
Parable of the Sower of Tares, Domenico Fetti (c.1589&ndash;1624), The Courtauld, London (Samuel Courtauld Trust);&nbsp;가라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도메니코 페티(1589-1624년), 런던 코트타울드(사무엘 코트타울드 신탁)
Buckwheat Harvest, Summer. Jean-Francois Millet, Boston: Museum of Fine Arts. 1868-1874. 메밀 수확, 여름, 장 프랑수아 밀레, 보스턴: 미술 박물관. 1868-1874.
Parable of the Weeds among the Wheat, Isaac Claesz van Swanenburg. c.1600. (Rijksmuseum, Amsterdam) 밀 사이의 가라지 비유 , 이삭 클레즈 반 스바넨부르그 . (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

위 그림은 이삭 클레즈 반 스바넨부르그의 작품입니다. "밀 사이의 가라지 비유"는 이미지가 여전히 정확하지는 않지만 위에서 본 아브라함 블루마에르트의 작품보다는 좀 더 온건한 접근 방식을 취합니다. 스바넨부르그의 작품에는 블루마에르트의 무거운 도덕적 설교가 빠져 있습니다. 그림에서 선한 농부는 청중에게 말을 걸고, 일꾼들은 밀 단을 나르고 다른 일꾼들은 잡초 단을 거대한 불로 옮깁니다. 그러나 스바넨부르그는 농부의 일꾼들이 고용되어 있다고 가정하여 밀과 가라지를 정확히 누가 거두는지에 대한 세부 사항을 빠뜨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도덕적인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원수인 마귀(사탄)와 악한 사람들의 공격 속에서 살아야 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원수(마귀 또는 사탄)가 성도들 사이에 악한 사람을 심기 위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일꾼들이 잠자는 동안 사탄이 온다는 사실은 단순히 사탄의 교활함과 속임수를 지적합니다. 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꾼들은 악한 사람들과 그들로 인한 영향력을 빨리 없애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28b)" 


이 질문은 우리로서는 지극히 합당해 보이며, 예수님 사역의 또 다른 장면에서도 이 질문이 반복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한 사마리아 마을에서 거절당했습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눅9:54-55)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악당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열망은 있지만, 그런 정밀한 수술을 할 자격은 없습니다. 우리는 사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악한 자(이단)를 알아차리고, 그들을 피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천사들이 마지막에 추수를 할 것이며, 가라지는 나쁜 열매와 함께 좋은 작물에서 분리되어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Noonday Rest: the Parable of the Tares, Adriaen van de Velde (1636&ndash;1672), The Wallace Collection; 정오의 휴식: 가라지의 비유, 아드리안 반 데 벨데 (1636-1672), 월리스 컬렉션

농부들과 가축들이 쉬고 있는 사이에 저 멀리 언덕에서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고 있습니다. 뜨거운 낮에 일하다가 오침을 즐기는 것은 농부들의 특권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도덕적 비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그 틈을 노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수가 항상 주변에서 우리의 방심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 31-33 겨자씨와 누룩 비유(막 4:30-32눅 13:18-21)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겨자씨 비유, 얀 뤼켄 작품
겨자씨 비유

모든 비유와 마찬가지로 겨자씨 비유의 목적은 일반적이고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다른 것을 나타내는 다양한 이야기 요소 또는 세부 사항을 사용하여 "개념" 또는 "큰 교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비유의 재료(요소) 자체도 중요하지만, 세부 사항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요소에 문자 그대로 초점을 맞추면 일반적으로 해석 오류가 발생하고 비유의 요점을 놓칠 수 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짧은 비유입니다. 천국은 한 사람이 밭에 가져다가 심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지만 자라면 정원 식물 중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듭니다. (마13:31-32).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 중 하나는 개념을 단어 그림으로 묘사함으로써 단어 사용, 기술, 문화적 맥락 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메시지가 쉽게 손실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문자 그대로의 내러티브로서 전혀 고리타분하거나 오래된 스타일이 아닙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미지는 여전히 생생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씨앗이 자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그 단순함이 탁월합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 접근 방식은 또한 융통성 없는 율법 준수보다는 원칙을 가르침으로 더욱 실천적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공관복음서 세 권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마13:31-32, 막4:30-32, 눅13:18-19).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놀라운 성장을 예언하십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높이가 3미터가 넘게 큰 관목으로 자라며, 예수님은 이것이 천국의 성장에 대한 그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 나라의 그 시작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데, 예수 그리스도의 짧은 사역이 얼마나 중요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소수의 추종자만 있었고, 지위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으며, 모두가 세상의 변두리 지역으로 여기는 그런 곳에서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길가에 떨어진 겨자씨처럼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처음에는 하찮아 보였던 일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위대한 역사로 성장했고, 아무도 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행5:38-39 참조).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유익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커질 것이며, 이는 많은 새들이 완전히 자란 겨자나무 가지에 앉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나무로 묘사됩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의 한 구절은 겨자씨의 비유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합니다. 이 예언에서 주 하나님께서는 높고 높은 산에 한 싹을 심겠다고 약속하십니다(겔17:22). 이 작은 가지가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 화려한 백향목이 될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새들이 그 안에 둥지를 틀고 그 가지 그늘에서 피난처를 찾을 것입니다(겔17:23). 이 메시아적 예언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거대한 규모의 나라로 성장할 것을 예언합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왜 작은 씨앗과 큰 식물이 있었는데 겨자씨를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라고 하시고, 자란 겨자나무를 동산 식물 중에서 가장 큰 식물이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수사학적 과장법, 즉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을 사용하셨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식물학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비유(속담)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조하는 것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크기 변화와 그 성장의 놀라운 본질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예수의 겨자씨 비유가 사실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수세기에 걸쳐 폭발적인 성장률을 경험했습니다. 교회는 전 세계에서 발견되며 축복을 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과 안식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박해와 거듭된 멸망 시도에도 불구하고 번성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시온에서 통치하고 다스리기 위해 지상에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작은 그림일 뿐입니다.

누룩의 비유, 얀 뤼켄 작품
Parable-The Leaven by John Everett Millais, ca.1860, Aberdeen Art Gallery; 누룩의 비유, 존 에버렛 밀레스, 1860년경, 애버딘 아트 갤러리

예수님의 누룩 비유는 복음서 두 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매우 단순한 이야기이며, 사실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국은 한 여인이 가져다가 많은 양의 밀가루에 섞어 반죽이 될 때까지 발효시키는 누룩과 같습니다(마13:33; 참조. 눅13:20-21).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천국을 설명하기 위한 실물 교훈으로 사용하십니다. 한 여인이 누룩(효모)을 가져다가 반죽에 섞습니다. 결국 반죽 전체가 누룩이 됩니다. 무슨 뜻일까요?


먼저 천국을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자신의 영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대에 천국은 영적인 것으로, 신자들의 마음 속에 존재합니다(눅17:21). 나중에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실 때 그 왕국은 물리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계11:15).


누룩의 비유에서 우리는 현 시대의 왕국의 역사에 대해 몇 가지를 배웁니다. 이러한 각 교훈은 누룩의 본질에서 비롯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은 미미할지 모르지만 점점 커질 것입니다. 누룩은 크기가 아주 작아서 반죽에 아주 조금만 넣어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누룩은 모든 반죽에 퍼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영역도 갈릴리의 외진 구석에서 열두 명으로 시작했지만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복음은 성장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누룩은 내부에서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그 내적 변화는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한 문화에서 복음의 영향력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한 문화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변화의 주체가 되어 그 문화를 내부로부터 서서히 변화시킵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은 포괄적입니다. 누룩이 반죽이 완전히 부풀어 오를 때까지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유익은 전 세계에 미칠 것입니다(시72:19, 단2:35).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땅이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합2:14).

 

넷째,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효과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합니다. 누룩은 천천히, 은밀하게, 조용히 그 일을 하지만 빵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룩의 본질은 그것이 접촉하는 모든 것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분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나서 우리를 안팎으로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삶을 변화시킬 때, 복음은 전 세계에 널리 영향을 미칩니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34-35 비유로 말씀하신 까닭(막 4:33-34)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Christ preaching on the Sea of Galilee, by Jan Bruegel the Elder (1568&ndash;1625). When the audience heard the parables of Jesus, &ldquo;such a very large crowd gathered&rdquo; that he preached from a boat while his audience remained on the shore (Matthew 13:1&ndash;2//Mark 4:1&ndash;2). "갈릴리 바다에서 설교하시는 그리스도", 얀 브뤼겔(형) (1568-1625)의 작품. 청중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을 때 "매우 많은 무리가 모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청중들이 뭍에 남아 있는 동안 배 위에서 설교하심(마13:1-2; 막4:1-2).

비유는 말 그대로 다른 무언가를 "곁들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진리와 함께 던져진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가르침을 위한 보조 수단이었으며, 확장된 비유 또는 영감을 받은 비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비유가 하늘의 의미를 지닌 지상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한동안 비유에 크게 의존하셨습니다. 실제로 마가복음 4장 34절에 따르면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약 35개의 예수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는 비유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비유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고, 왜 비유로 말씀하시느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도 예수님은 놀랍게도 비유만 말씀하셨습니다(마13:10).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는 두 가지 목적, 즉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드러내고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감추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이전 장(마12장)에서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성령을 모독했습니다(마12:22~32). 그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영적으로 눈이 멀었습니다(사6:9-10).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비유로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은 비유를 무의미한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만 있을 때 모든 것을 설명하셨습니다(막 4:34b).


비유를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공부하는 독자에게 몇 가지 도전 과제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직접 비유를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해석이 쉬울 때도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는 모두 마태복음 13장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다른 비유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원칙입니다:

  1. 제시되는 영적 진리의 범위를 결정해야 합니다. 때때로 비유 앞에 문맥을 제공하는 몇 가지 소개 단어가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종종 비유 앞에 "천국은 마치 ~와 같으며"라는 말로 비유를 시작하셨습니다. 또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앞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8:9). 이 말씀은 비유의 주제가 "자기 의와 영적 교만"임을 암시합니다. 
  2. 이야기의 '핵심'과 주변적인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비유의 모든 세부 사항이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세부 사항은 단순히 이야기를 더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에서 예수님은 흙의 종류가 네 가지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세부 사항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체적인 요점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3.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야 합니다. 이 해석학의 기본 원칙은 비유를 공부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요12:49).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예수님께서 조명하신 가르침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는 복음서 외에도 다른 비유들이 있습니다. 잠언은 비유로 가득 차 있습니다. 솔로몬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비교를 사용할 때마다, 특히 상징적인 비유를 사용할 때마다 그 결과는 단순한 비유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20:2절에는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자의 부르짖음(포효)은 비교를 위해 왕의 진노와 '함께'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유적 언어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후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4:9, 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비유를 "대충"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비유를 "자세히" 들으라는 요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진정으로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 28: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 36-43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다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Wheatfield with a Reaper, Vincent van Gogh(1853-1890), Saint-R&eacute;my-de-Provence, September 1889, Van Gogh Museum, Amsterda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추수꾼과 밀밭,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생 레미 드 프로방스, 1889년 9월,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재단)

반 고흐는 병실에서 위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처음 몇 달 동안 병실 밖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추수꾼은 뙤약볕 아래서 수고하고 있습니다. 두꺼운 노란색 덩어리로 칠해진 밀이 그의 주위를 휘감고 있습니다. 반 고흐에게 밀은 자연의 영원한 순환과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소재였습니다. 그는 인류는 곧 추수되는 밀과 같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추수꾼을 죽음의 이미지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죽음이 거의 미소 짓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 줄의 보랏빛 언덕을 제외하고는 모두 노란색, 즉 옅은 금발의 노란색입니다. 감방같은 병원의 철창을 통해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 자기 자신도 우습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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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영적인 의미와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마13:36-43), 이 비유는 종종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주석과 설교에서 이 비유를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는 예로 사용하면서, 교회 전체와 개별 지역 교회에 참된 신자(밀)와 거짓 교사(가라지)가 모두 존재한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이 사실일 수 있지만, 예수님은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분명히 설명하십니다(38절).


예수님께서 특별히 세상이 이야기의 배경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더라도 그 사실은 분명합니다. 밭의 주인은 종들에게 밭의 가라지를 뽑지 말고 세상 끝날까지 그대로 두라고 말합니다. 만약 밭이 교회였다면, 이 명령은 교회에서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즉 교제에서 내쫓고 불신자로 취급해야 한다는 마태복음 18장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모순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세상 끝날까지 우리 가운데 두라고 지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세상에서의 천국(24절)에 대해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 시대의 많은 농부들은 농작물의 품질에 아주 민감합니다. 가라지를 심는 원수는 사업을 방해했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가라지는 귀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라지는 자랄 때까지 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제초제가 없는 상황에서 현명한 농부라면 이런 딜레마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이 비유에 나오는 토지의 주인은 가라지와 함께 밀을 뽑아내는 대신 추수 때까지 현명하게 기다렸습니다. 밭 전체를 수확한 후 가라지를 분리하여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밀은 창고에 저장될 것입니다.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씨 뿌리는 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속받은 씨인 참된 신자들을 세상 들판에 뿌려 주십니다. 그분의 은혜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갈5:22-24). 신자들이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에 천국이 세상 들판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웠다(마3:2, 4:17)고 말씀하신 것은 이 땅에 악한 자의 영역과 나란히 존재하는 영적 영역(하나님의 통치)을 의미하였습다(요일5:19). 천국이 실현되면 천국은 현실이 될 것이며 알곡 가운데 가라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서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이 모두 자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원수는 사탄입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많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신자와 교사를 세상에 뿌려두어 그리스도의 사역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경건하지 않은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파괴하기 위해 그들을 뽑아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미성숙하고 연약한 신자들이 상처를 받을지 모릅니다.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분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인간이 스스로 그 책임을 떠맡게 되면 그것은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거짓 신자들을 세상에서 뿌리 뽑고 그 과정에서 미성숙한 신자들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요구하는 대신, 재림하실 때까지 남아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분할 것입니다.

 

또한 참 신자와 거짓 신자의 차이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를 뿌리 뽑는 일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가라지는 특히 성장 초기 단계에서는 밀과 비슷합니다. 마찬가지로 거짓 신자는 참 신자를 닮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7:22절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믿음을 고백하지만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각 사람은 그리스도와 자신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고후13: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참된 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믿음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환난이 끝나고, 모든 불신자들은 죄와 불신에 대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가라지에게는 저주와 심판이지만 밀에게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희망입니까!

 

▣ 44-50 세 가지 비유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감추인 보화의 비유, 얀 뤼켄 작품
Parable of the Hidden Treasure by Rembrandt (c. 1630) 감추인 보화의 비유, 렘브란트 작품
감추인 보화의 비유, 제임스 티쏘 작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을 막 마치신 후, 이 두 가지 짧은 비유는 "천국"에 대한 말씀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씨와 씨 뿌리는 사람(3-23절)과 밭의 가라지(24-30절), 겨자씨(31-32절)와 누룩(33절), 감추인 보화(44절)와 값진 진주(45-46절) 등 세 쌍의 비유로 천국에 관한 진리를 표현하셨습니다.


이 두 짧은 비유의 유사점을 보면 천국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동일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두 비유 모두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넘긴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보화와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제공하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을 팔아서 구원의 대가를 지불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 보물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얻는 것은 1그램의 쓰레기를 1톤의 다이아몬드와 맞바꾸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빌3:7-9).


두 비유에서 보물은 숨겨져 있는데, 이는 영적 진리는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으며 지성이나 힘 또는 세상적인 지혜로는 찾을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13:11-17절과 고린도전서 2:7-8절, 14절은 이러한 진리를 듣고, 보고, 이해할 수 없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불신앙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영적 소경이 됩니다. 성령으로 눈이 열린 사람들은 영적인 진리를 분별하며,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그 진리의 큰 가치를 이해합니다.


상인이 값비싼 진주를 발견하자 더 이상 진주를 찾지 않은 것을 주목하십시오. 영생, 썩지 않는 기업,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일단 발견하면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는 진주를 구성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큰 필요를 채워 주시고, 갈망을 충족시켜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고, 마음을 평온하고 고요하게 해 주시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십니다. 물론 큰 대가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대가입니다. 그분은 영광을 비우시고 비천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우리 죄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물의 비유, 얀 뤼켄 작품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unto a net that was cast into the sea, and gathered of every kind. From New York hired by Pacific Press Publishing Company expressly to illustrate this book (page 8) &ldquo;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47절)&rdquo;

예수님은 마태복음 13:47-50절에서 그물의 비유 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가 천국의 한 측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이 비유는 어부들이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밑 바닥을 따라 끌리는 무게가 있는 그물인 투망을 사용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그물을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가득한 채로 해안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런 다음 어부들은 물고기를 좋은것과 나쁜 것으로 분류하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보관할 가치가 있는 물고기는 그릇에 모으지만 나머지는 모두 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이 비유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49-50절을 읽어보십시오. 

이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13:36-43)와 유사합니다. 두 비유 모두 천사의 도움을 받아 신자와 불신자가 완전히 분리되는 종말론적 분류에 관한 것입니다.

그물이 바다에 던져져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처럼, 복음의 메시지가 세상에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이끌립니다. 그물이 가치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모은 것처럼, 복음은 회개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지도 않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그물을 해변으로 끌어올릴 때까지 물고기를 분류할 수 없었던 것처럼, 참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한 거짓 신자들도 세상 끝날 때까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쁜 물고기, 즉 거짓 신자들은 마태복음 13:5-7절의 돌밭과 가시밭, 40절의 가라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여, 주여"(마7:22)라고 말하며 예수님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비유의 냉정한 요점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와 가짜 신자를 구별하실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거짓으로 판명된 사람들은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 51-52 새 것과 옛 것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 53-58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다(막 6:1-6눅 4:16-30)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Jesus rejected at Nazareth, Alexandre Bida;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알렉산더 비다 작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 근처 언덕 위로 데려가서 예수님을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언덕이라고 하지만 절벽같이 매우 위험스러운 광경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날개 있는 천사가 예수님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자라 할지라도 담당 천사를 붙여 주셔서 늘 보살피십니다(마18:10) 

James J. Tissot, The Brow of the Hill Near Nazareth(1886-94), Brooklyn Museum, New York. 나사렛 근처의 언덕마루, 제임스 티쏘 작품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 나사렛으로 가신 것은 다음 아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 마태복음12:46-47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 마태복음13: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 마태복음13:53-54a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마 고향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장 나사렛으로 가지 않으시고, 거기에서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다 가르치신 후에야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도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집 목수 아들이라고 폄하하였습니다. 영적인 알지 못하면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도덕과 관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Familiarity breeds contempt."라는 말이 있습니다. 익숙함이 경멸함을 낳는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익숙해지면 존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라 즉 두려워하라(Fear God!)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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