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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11장_세례 요한, 예수님의 초청

by 적아소심 2023. 3. 3.

마태복음 11

 

1-19 세례 요한( 7:18-35) (John the Baptist)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John the Baptist admonishes Herod and angers Herodias. John in prison. Workshop of Jean Leclerc IV (ca.1560-1633), 세례 요한이 헤롯을 책망하고 헤로디아를 화나게 하다 .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 , 쟝 르끌레르 4 세 작업실
Saint John the Baptist in prison visited by Salome, Giovanni Francesco Barbieri, called Il Guercino(1591-1666),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을 방문하는 살로메,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 (게르치노 2세로도 불림) 작품
Saint John The Baptist In Prison Visited By Salome. Italy. 1804 Damiano Pernati, Italiaans (1769-1841)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을 방문하는 살로메, 다미아노 페르나티 작품

위 장면은 세례 요한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 왕을 꾸짖은 후 던져진 감옥에 갇힌 모습을 묘사합니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지금 세례 요한을 방문하는데, 세례 요한은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고 그녀와 대화를 거부합니다. 살로메의 눈초리와 약간 감겨 올라간 입꼬리는 잔인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나중에 그녀는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연회에서 아름다운 춤을 춘 것에 대한 보상으로 요한의 머리를 접시에 올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살로메가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을 방문한 장면은 다섯 가지 버전이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초기의 사인 버전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성 요한의 손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처리한 것은 전적으로 거장의 전형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요세푸스의 사료에 의하면 요한은 거의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합니다. 그 기간 헤롯 파당의 많은 위협과 회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살로메가 세례 요한을 방문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이 책망한 것을 취소하고 그 결혼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 아닐까요? 헤로디아는 정당하지 못한 결혼으로 인해 가시방석 같은 지위에 있었을 것이고 살로메는 그런 어머니를 돕기 위해 세례 요한을 설득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러한 회유에 일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밤이 길면 꿈도 많아지듯, 고난도 오래 지속되면 생각도 많아집니다. 세례 요한 뿐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Saint John the Baptist in Prison Visited by Two Disciples, Giovanni di Paolo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을 방문하는 두 제자들, 지오반니 디 파올로 작품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을 방문하는 두 제자들, 지오반니 디 파올로 작품 (디테일)

요한의 두 제자들이 세례 요한을 방문하는 모습니다. 두 제자는 슬퍼서 눈물을 보입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동안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 즉 메시아로 열렬히 지지하고 선포했던 예수님은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는 것도 서운했을까요?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과 선지자라는 관계 외에도 사촌간의 친척관계도 있는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위해 구명 운동을 하지 않고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오히려 유대 지역에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하나의 사건이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다양한 관계나 문제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Fresco from the Co-Cathedral of St John the Baptist in Valletta, Malta. 몰타 발레타에 있는 세례 요한 공동 대성당의 프레스코화
몰타 발레타에 있는 세례 요한 공동 대성당의 프레스코화(디테일)

두 제자가 세례 요한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그 아래에는 거지가 졸면서 동냥을 하고 있고, 비쩍 마른 개가 그 옆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거물급 인사가 감옥에 갇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거지로서는 명당자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황금으로 도색된 헤롯 성 바로 옆에 감옥이 있는 것을 볼 때 헤롯이 세례 요한의 처리 문제를 두고 백성들의 눈치를 많이 본 것 같고, 또한 중요한 문제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1:29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요한은 여러 차례 예수님과 비교하여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마3:14, 요1:27). 그리고 그는 주님에 대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마태복음11:3과 누가복음7:19에 기록된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사자를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세례 요한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이신지 의심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질문의 다른 동기가 있었을까요?

 

요한의 질문에 관한 가지 주요 이론이 있습니다.

 

가설 1: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당신이 오실 분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대해야 합니까?)" (마11:3)라고 물은 것은 현재 상황 때문에 의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메신저를 통해 이 질문을 했을 때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는 사악한 통치자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마 11:2; 눅 3:20). 요한은 이 질문을 했을 때 이미 1년 이상 감옥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결국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실제로 예수님께 메시지를 보낸 직후 처형당했습니다. 마14:1-12 참조). 또한 예수님은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사두개파, 산헤드린 등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데, 아직 그 왕국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군중들에게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이며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고 말했었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가져올 심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하지만 이제 11장에서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도끼도 없고, 타작마당도 없고, 불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메시아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세례 요한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설 2: 세례 요한의 "당신이 오실 분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대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을 가리키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즉, 의심하는 것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을 주님께 보내 주님의 대답을 직접 듣고 보게 한 것입니다. 요한의 믿음은 여전히 굳건했지만,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요한은 제자들을 이제부터 따라야 할 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일반적인 교육 방법인 질문을 하도록 보냈고, 그들이 받은 대답은 믿음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한 이후로 (요1:29)라고 외친 이래로 그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그 사명을 계속했습니다.

 

예수님의 응답은 보여 주고 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그날 요한의 제자들이 목격한 모든 사역은 예수님이 선택받은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61:1절이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한을 위한 말씀이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한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말씀이었을까요? 어느 쪽이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감옥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해 보고합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자신의 신앙에 힘을 얻고 용기를 얻었거나(1설), 제자들에게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할 수 있는 가르침의 순간을 포착했을 것입니다(2설).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나머지 군중을 향하여 세례 요한을 칭찬하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11:7-11; 눅7:21-27).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질문한 것에 대해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요한이 의심을 품었다면, 예수님의 대답은 흔들리는 믿음을 보살피고 부드럽게 다루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마12:20 참조). 요한이 단순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John the Baptist in Prison by Giousto de Menabuoi (1320–1391),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 지우스토 데 메나부오이 작품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관한 말씀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선지자를 기렸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a).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거나(마3:13-14) 심지어는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마3:11)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언급하신 '위대함'은 특별한 재능이나 거룩함, 개인적인 공로가 아니라 역사에서 요한의 독특한 지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하다고 말씀하신 직후에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b)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가장 큰 자"라고 하신 이유 중 하나는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영광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세상을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사역은 이사야40:3절과 말라기3:1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에 선표했습니다(요1:35-36). 세례 요한은 모든 역사의 구주를 세상에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능력으로 설교했다는 점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눅1:17, 3:7-18). 세례 요한은 유대 민족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왕을 꾸짖고, 대중의 오해와 악의적인 박해에도 인내하는 등 엘리야와 많은 자질을 공유했습니다(마 11:16-18; 막 6:14-19).

 

또한 세례 요한은 선지자 말라기 이후 430년 동안 이어진 신성한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다는 점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리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으며 새로운 경륜의 정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율법의 종말이자 약속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예언한 선지자의 긴 계보에서 마지막이었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 이사야, 그리고 나머지 선지자들은 희미하게만 볼 수 있는 먼 곳에 있는 인물을 가리켰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실제 인물을 가리켰습니다. 다른 어떤 선지자도 그런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11:1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면 어떻게 세례 요한이 가장 클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그 답은 그의 개인적인 공로가 아니라 역사에서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위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의 충만함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막6:17~29 참조).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나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조차도 이 사건들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행18:24-26, 19:1-7 참조). 에베소에 있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복음 전체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예언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세례가 필요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 즉 구약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더 완전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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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문 마11: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는 말씀의 해석에 많은 주장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 믿음으로 천국을 쟁취하는 자가 얻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라는 의미로 경계선을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게 해석하는 분들이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다르게 해석하는 근거로, “침노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비아제타이' 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 해석이 가능한데, 이를 이를 수동태로 이해하면 이 어구는 본문과 같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의미로서 천국이 어떤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에 의해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강점(强占)되는 것을 의미합니다(Meyer, Lightfoot). 즉 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아진다는 뜻입니다. 이를 중간태로 받아들이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등의 뜻으로, 이는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the Kingdom is forcefully advancing)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분명 중간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실로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땅에 기습적(奇襲的)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dynamic)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짐으로서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 것입니다.(Ridderbos, Chilton, Hendriksen).

 

또한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혹자는 본문의 “침노하는 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앞 구절의 “침노당하다”란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아 '강탈자'나 '난폭한 자'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자로 이해하려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어구를 '하늘나라는 맹렬한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난폭한 자들은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란 의미로 해석합니다(Hill, Meier, Hobbs 등). 그러나 이 어구는 앞의 동사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해석함과 연결하여 '용기 있는 자' 또는 '강한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렬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Pamment, Kummel)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논리입니다. 실로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 있는 자인 것입니다. 한편 본문의 '빼앗느니라'(하르파주신 아우텐)는 말은 마치 야수나 거친 도적들 마냥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뜻합니다. 물론 여기서는 순전히 선한 의미로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遺業)을 얻기 위해 온 정열로써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단정 지으며 멸시했던 세리나, 창녀, 각종 범죄자들 및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간절히 갈구(craving)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눅 7:28-30). 실로 그들은 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나라를 얻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와 악한 동료들과의 단절(斷絶)이라는 수동적 변화와 더불어 난폭할 만큼 격렬한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천국은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이상 내용은 호크마 주석의 12절 설명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20-24 회개하지 아니하는 도시들( 10:13-15) (Woes to Unrepentant Cities)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위 본문에서 언급된 세 도시는 갈릴리 바다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라신은 복음서에서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벳새다는 빌립, 안드레, 베드로의 고향이자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곳입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은 복음서에서 여러 번 언급되며 예수의 많은 치유와 기적이 일어난 곳으로, 한동안 공적 사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도시입니다. 소돔은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 사악함으로 인해 종말 심판처럼 멸망시킨 도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표적을 행한 유대인 도시 세 곳과 하나님의 멸망을 받아 마땅할 정도로 악이 극심한 이방인 도시 세 곳을 대조하면서 심판의 날에 회개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더 강하기 때문에 전자가 더 가혹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도시들은 중세 자료에서 적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위의 복음 구절에 대해 언급 한 Pseuto-Methodius의 묵시록(apocalypse)은 적그리스도가 "고라신에서 잉태되고 벳새다에서 태어나 가버나움에서 통치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Otto Dix original lithograph "The Woes of Unrepentant Cities"

 

25-30 자들아 내게로 오라( 10:21-22) (Jesus Thanks His Father)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멍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제자들, Photo from the En-Gedi Resource Center, 엔게디 리소스 센터
Come Unto Me, by Carl Bloch (1834-1890), 내게로 오라, 칼 블로흐 작품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1:28-30)

 

30절의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에게 자신에게 와서 쉬라고 말씀하시는 마태복음11:28-30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육체적 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의 등에 짊어지고 있는 율법 제도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서 덜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 것에 대해 책망하십니다(마23:4).

'바리새인의 멍에'는 자기 의와 율법주의적 율법 준수의 부담스러운 멍에입니다. 성경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일하는 것"에 대해 600개 이상의 규정을 추가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엄청난 짐이요 부담입니다. 예수님께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서기관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마22:36). 그 사람의 질문의 행간은 결국 "우리가 가진 모든 율법 중에서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율법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율법도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거룩함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율법은 부담스럽고 억압의 "무거운 멍에"에 해당한다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우리의 모든 의로운 행위가 "더러워진 옷"과 같다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그분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자기 의와 율법주의의 억압적인 멍에에서 안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격려하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회개와 믿음, 그리고 그분을 따르겠다는 단 하나의 헌신이 뒤따르는 멍에이기 때문에 가볍고 쉽게 짊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0: 11-14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1:3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과 유대 율법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이 둘 다 책임지시는 것 아닌가요? 엄밀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오히려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에서 모세 율법을 재구성한 예수님의 계명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외형적 준수를 넘어 내면의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계명이 훨씬 더 부담스럽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그분의 짐이 가벼운 이유는 예수님 자신의 적극적인 순종(즉,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짐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교환된 것처럼(고후 5:21),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이전)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은 우리의 "영적 예배"가 됩니다(롬 12:1). 또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시므로 예수님의 멍에를 쉽게 메고 그분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무겁고 부담스러운 자기 의의 멍에보다 훨씬 가벼운 멍에이며 훨씬 쉽게 짊어질 수 있는 짐입니다.

중동지역의 멍에(yoke)의 실례(實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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