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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9장(下)_맹인, 말 못하는 자, 많은 병자를 고치심

by 적아소심 2023. 2. 26.

▣ 27-31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다 (Jesus Heals Two Blind Men)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복음서에는 맹인이 치유함을 받고 눈을 뜨는 장면이 본문 외에도 여러 번 나타납니다(마20:29-34; 막10:46-52; 눅18:35-43; 요 9장). 그런데 마태복음 후반부(20:29-34)에 등장하는 맹인 치유 기적은 바디메오라는 맹인에게 발생한 것으로서 막10:46-52과 눅18:35-43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본문의 맹인 치유 사건과 요한 9장의 실로암 사건과는 각기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팔레스틴 지방에는 동쪽으로부터의 극심한 모래 바람과 거기에다 지면에 수분이 늘 부족한 관계로 일어나는 석회석의 먼지 등으로 인해 맹인 및 안질환자가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실 때까지 두 맹인들이 끈질기게 따라왔습니다. 이곳은 마태의 집이거나 아니면 가버나움의 거처 또는 베드로의 집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 두 맹인들은 그 동안 계속 예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참된 메시야임을 믿고 끝까지 자비를 구하며 열심히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아마 이때 예수님께서 끈질긴 그들의 호소에도 침묵하고 집 안까지 들어오신 것은 일반인들에게 정치적 해방자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추측됩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시는 사건을 그린 성화들을 보면 어떤 그림은 맹인 한 사람, 어떤 그림은 맹인 두 사람인데 길거리, 어떤 그림은 집 앞, 어떤 그림은 집 안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과 마태복음 20:29-34, 마가복음 10:46-52, 누가복음18:35-43, 요한복음 9장을 비교하며 그림을 보면서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Jesus and the blind men, Gospel of Matthew is a drawing by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예수님과 두 맹인 , 율리우스 쉬노르 폰 카롤스펠드 작품

위 그림은 맹인들이 예수님을 집 앞까지 따라오면서 계속 고쳐주시기를 간청하는 모습을 보면 본문인 마태복음9:27-31절 말씀에 기초하여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팡이를 짚은 맹인이 따라오자 옆에서 제자인 듯한 사람이 제지하는 모습이고, 그 뒤편에는 다른 맹인이 젋은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따라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가시려다가 따라오는 맹인들을 바라보십니다. 위 그림 이후의 장면으로 예수님은 집안으로 들어가셨고, 맹인들은 거기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신 후에도 맹인들이 끝까지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물어보시고, 그들의 믿음대로 고쳐주셨습니다.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 앞에 남아 있으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주님은 인간적인 예의범절이나 도덕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나아오는 자의 믿음을 보십니다.

Two Blind Men – Matthew 9:27-31, 20:29-34, Duccio di Buoninsegna, 1255–1260 – c. 1318–1319 두 맹인 , 두치오 디 부니세나 작품
healing the blind, by Nicolas Colombel, 1682 맹인을 고치시는 그리스도 , 니콜라스 콜롬벨 작품

위 2개의 그림은  집안이 아닌 길 가에서 두 맹인을 고치신 것으로 보아 마태복음20:29-34에 기초한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사건임에도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맹인 한 사람을 고치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of the Man Born Blind, painted by El Greco in 1567.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심 , 엘 그레코 작품
“Healing the Blind Man,” Václav Mánes, 1832 (National Gallery, Prague) 맹인을 고치심, 바클라브 마네스 작품
of the Blind Man by Jesus Christ by Carl Bloch, 맹인을 고치시는 예수님 , 칼 블로크

예수님께서 길 다시다가 맹인 한 사람을 고치시는 장면은 마가복음10:46-52과 누가복음18:35-43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맹인의 이름은 바디매오입니다.

 

위 그림들을 감상하다보면 같은 사건임에도 어떤 그림은 맹인 두 사람이 등장하고, 어떤 그림은 맹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특히 마태복음에는 모두 2명의 맹인이 등장하는데,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맹인 한 사람만 등장합니다. 

 

성서 학자들이 때때로 "마태의 이중화"라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한 인물이 나오는 것은 마태복음에서는 두 명으로 바꾼 것처럼 보이는 곳은 본문 말씀 외에도 몇 군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에는 분명히 한 사람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는 심지어 그의 이름인 바디매오까지 알려줍니다. 이야기의 세부 사항은 세 복음서에서 모두 동일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 남자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군중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들으시고 그를 불러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는 시력을 회복해 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은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참조, 마 20:29-34; 막10:46-52; 눅18:35-43).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군중은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더 크게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들은 시력을 회복해 달라고 요청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 사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한 사람입니다. 세 저자 모두 예수님이 생애 말년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여리고 외곽의 길이라는 동일한 배경과 같은 시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슷한 사건인 본문은 이른 사역으로 묘사되지만) 따라서 마태는 별도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같은 사건에서 한 인물을 두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 지역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어떻게 고치셨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그를 제지할 수 없었고, 그가 어떻게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는지, 그리고 그 안에 있던 귀신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자신을 고문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대신 근처의 돼지 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은 동의하셨습니다. 귀신들은 사람을 떠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갔고, 돼지 떼는 언덕을 내려가 호수로 달려가 익사했습니다. 마태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관여했다고 말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세부 사항과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참조 마8:28-34; 막 5:1-20; 눅 8:26-39).

 

또 다른 사례는 종려주일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워지자 제자 두 명을 인근 마을로 보내 나귀 새끼 한 마리를 구해 도시로 데려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도전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나귀를 가져와 망토를 등에 두르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군중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나귀와 새끼 나귀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세부 사항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누군가 그들에게 도전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필요로 하신다"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마태는 제자들이 "나귀와 새끼 나귀를 가져와 망토를 입히고 그 위에 앉으셨다"고 보고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마태가 예수님이 한 번에 두 마리의 동물이 아니라 망토 위에 앉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두 배"의 또 다른 사례입니다(참조, 마21:1-11; 막11:1-11; 눅19:28-38; 요12:12-19).

 

그렇다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유대 문화에서 둘은 증인의 수이며, 마태는 주로 유대인 청중을 위해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일은 두세 증인의 증언으로 확증하라"는 모세 율법의 규정을 어떻게 강조하셨는지 기록한 유일한 복음서 작가입니다(마18:16).

 

이 세 가지 에피소드는 모두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와 복음서가 기록된 시대 사이에 널리 퍼진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시간과 장소, 심지어 관련된 일부 이름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는 누구도 속이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마태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도록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입니다. 대신, 그는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세부적인 차이에 놀랄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고, 주의 깊게 읽으면 그의 복음에서 바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증인의 증언이 문제를 입증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특별한 사례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증거한다는 의미로 등장인물을 "두 배로" 등장시킵니다. 흥미롭게도 각 사례에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귀신들은 "우리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를 맞이하는 군중들은 그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마태는 이러한 사례를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증거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 분명한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와 문화에서는 여전히 이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의 세부 사항을 변경할 권리가 있을까요? 하지만 마태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상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마태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의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32-34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다 (Jesus Heals One Who Was Mute)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Christ Healing a Deaf and Mute Man”, Domenico Maggiotto (1713-1794)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도메니코 마지오토 작품
Christ healing the deaf mute of Decapolis, by Bartholomeus Breenbergh, 1635. 데가볼리의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 바돌로메우스 브린베르흐 작품

32절 “말 못하는 자(헬, 코포스)” - 이 말의 원어는 '귀머거리'(deaf), '벙어리'(dumb), '귀 먹고 말 못하는 자'(deaf-mute)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귀가 먹어 듣지 못할 경우 자연적으로 말을 배우지 못해 벙어리가 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자, 그리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자들 역시 벙어리 귀신에 사로잡혀 말 못하는 벙어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말 못하는 자의 원인이 귀신 들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귀신에 사로잡힌 중풍병자나 맹인 또는 벙어리가 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즉 사탄의 무리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런 질병이나 불구를 이용하여 침투하고는 교묘하게 자기들의 모습을 감추곤 합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벙어리 병이 귀신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아셨습니다. 한편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종종 기록하는 신약성경의 언급들이 조잡하고 원시적인 미신에 근거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 발병과 귀신에 의한 병증을 구분할 줄 아는 영적 통찰력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막 9:14-29).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때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면서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사35:6)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된 이적은 메시야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사야 35:5-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33절에서 무리들은 예수님의 이런 기적을 보고 기절할 듯이 놀랐습니다.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한 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냄과 동시에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신 이적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 언급되는 바리새인들의 반응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부자와 학자들보다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더 쉽게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5-38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다 (The Harvest Is Great, the Laborers Few)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모든 마을과 마을을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모든 질병과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보시면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곤경에 처해 있고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항상 가르침과 행함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가르치고, 선포하고, 치료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가 행동하는 것만큼이나 말로 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상대방의 눈과 마음을 통해 보는 것으로 정의되는 연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목자 없이 흩어진 양과 같이 불쌍히 여기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치고 치료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 속에는 또한 우리 시대 우리 마음 속에도 때때로 길을 잃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교회를 통한 그 분의 지속적인 사역에서 우리는 우리 주변 세상을 향한 평화의 도구이자 자비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도 들여다보시며 연민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연민으로 감동되시며 그 연민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연약한 자녀를 불쌍히 여기며 대하는 마음과 같이 말입니다.

Jesus Teaching the People by the Seashore, by James Tissot 해변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제임스 티쏘 작품
The Lord’s Teaching 주님의 가르치심
"Jesus Christ Healing the Sick", Rembrandt's 17th-century etching.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 렘브란트 작품

다음은 위 렘브란트 그림에 대한 "렘브란트의 하나님"(홍성사, 2014)의 저자 안재경씨의 설명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무엇 때문일까? 무슨 소문을 들은 걸까? 위 에칭화의 중심에는 한 사람이 후광이 둘러진 채 양손을 들고 서 있다. 왼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오른손은 사람들을 향해 내밀었다. 자신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걸까? 이 사람의 옷자락에 두 손 모아 기도하듯 빌고 있는 여인의 그림자가 선명하다. 옷자락이라도 만지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의 권위에 짓눌려서일까? 아니면 아직까지도 이 사람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일까?

 

두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오른쪽 무리와 왼쪽 무리가 나뉜다.

 

오른쪽 무리는 질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이분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처지인 듯 하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함을 안고 있다. 들것에 실려 나아온 이들도 있고, 지팡이를 짚은 이들도 있고, 바닥에 아예 뉘여 있는 이들도 있다. 

 

왼쪽 무리는 대조적으로 냉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기들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애쓰고 있다. 이 사람들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들에게 숙제로 제시된 듯 하다. 렘브란트 자신이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것이 흥미롭다. 우리를 이 기대와 숙고 속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35절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한 곳에 정체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도 사역을 진행하셨음을 암시합니다. 한편 '성'이란 성곽으로 둘러싸인 비교적 큰 성읍을, '촌'은 성곽이 없거나 '성'에 영향을 받는 모든 촌락들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모든'이란 수식어에는 단지 '성'에만 제한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때 모든 촌을 샅샅이 다니신 것이 아니라 많은 곳을 두루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태는 잠시 분위기를 바꾸어 예수님께서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잠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35-38절은, 마태4:23-25이 첫 번째 강론(5-7장)을 위한 전제였듯이, 두 번째 강론(10:5-42)의 전제가 됩니다. 이는 시간적으로 정확히 언제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제별 기사 배열을 자주 사용했던 마태의 기술 방식에 따른 갈릴리 사역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 본문은 사도 파송(派送)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며...전파하시며...고치시니라" - 이는 마태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한 것을 돌이켜 보고 난 다음 그것을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정리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환영하는 무리로부터 얼마든지 좋은 안식처와 훌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갈릴리 전 지역을 순회하며 한 시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니(에스플랑크니스데)", 이 말은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라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렇기 때문에 창자란 감정을 가진 기관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말의 뜻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내부의 창자에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다'로서 이 말은 격한 동정심에 대한 강조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동기부여는 바로 인생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바라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이 있는데, 그들을 감당할 만한 일꾼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목자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채 오히려 백성들의 짐이 되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후 마태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는 부족한 제자들이라도 추수할 일꾼으로 보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잃은 양들을 찾으시는 주님의 열망이 너무 크기에 아직 부족한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시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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