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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8장(下)_예수님 산에서 내려오시다(2)

by 적아소심 2023. 2. 20.

23-27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다( 4:35-41; 8:22-25) (Jesus Stills the Storm)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24절에서 원문에서는 καὶ ἰδοὺ σεισμὸς μέγας (카이 이두 세스모스 메가스)로 나오는 데, “And, Behold, a great storm…” 그리고 보라! 큰 폭풍우가…”라는 뜻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자주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해수면보다 약 240m 아래 위치해 있는 반면 주변의 산들은 고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갈릴리 호수의 표면 온도가 갑자기 상승하면 기압이 형성되어 남동쪽의 고원으로부터 거센 바람을 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이 같은 거센 파도를 일으킵니다.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 마가는 "물결이 부딪쳐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 4:3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계속되는 풍랑에 의해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마가는 예수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막 4:38)라고 주무시던 곳을 명시해 놓고 있습니다. 바로 전에 머리 둘 곳 없는 처지임을 말씀하셨던(20절) 예수님께서는 평지의 안식처를 얻지 못한 채 격랑이 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물에 머리를 의지한 채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풍랑이 치고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해 있던 시각은 밤으로서 예수님으로서는 매우 피곤하여 깊이 그리고 조용히 잠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자의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격랑이 이는 상황에서 계속 잠을 청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 자신의 자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요 7:6).

Jesus Christ in the Storm on the Lake of Galilee, Rembrandt van Rhein, 1632 (갈릴리 호수의 폭풍우와 예수님, 렘브란트 작품)

성난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배를 탄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대한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인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통해 깊이 묵상해 본 적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 복음서 이야기에 대한 렘브란트의 걸작 그림과 함께 현장에 머물다 보면 얼굴에 불어오는 폭풍우와 거대한 파도가 우리를 위아래로 뒤흔들고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바닷물이 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배를 침몰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시련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배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것이고 가족, 직장 또는 다른 장소에서 우리 자신이 하는 역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시오 디비나(Visio Divina)

영적 지도자들은 그림에 대한 명상을 "Visio Divina"라고 부릅니다. 성경 구절에 적용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즐거운 형태의 성경 묵상입니다. Lectio Divina와 비슷하지만 말을 통해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신 그림을 사용합니다.

 

개인 예배나 피정(避靜: 조용한 곳으로의 격리)에서 성경을 주제로 하는 명화(名畵)를 감상하다 보면 깊은 개인적 감정과 필요, 심지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종종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성화(聖畵)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자아와 삶의 환경을 투사할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제공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 그림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듣는 메시지는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폭풍에서 렘브란트가 그린 본문 말씀에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에 이것을 하거나 기도 파트너 또는 소그룹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복음 구절을 묵상하십시오

마가복음 4:35-41은 렘브란트의 그림 갈릴리 바다의 폭풍에 영감을 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구절을 천천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특히 끌리는 한 단어나 문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을 영접하기 위해 조용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렘브란트의 그림을 찬찬히 보며 묵상해 보십시오.

이제 본문 말씀에 대한 렘브란트의 묵상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1633년에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를 그렸습니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배에 탄 예수와 제자들을 그린 그의 그림은 어둡고 그림자에 가려져 있지만, 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빛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렘브란트 그림 이미지를 이용하여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볼 때 마음에 일어나는 인상과 생각을 인도하고 지시하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림이나 그 안에 있는 인물의 어떤 부분에 하나님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십니까? 조용히 기도하고 몇 분 동안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아래  이 묵상의 안내 부분을 수행하기 전에 이 부분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인상이나 생각을 주시든 마음을 열도록 하십시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자신 찾기(Part 1)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한 번 더 묵상해 봅시다. 그림에서 흥미로운 점은 배에서 예수님과 동행한 열두 제자 외에도 배를 타고 항해하는 열세 번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렘브란트는 자신의 그림 어딘가에 자신을 그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스트레스, 상처와 희망을 하나님께 가져가면서 우리가 복음 안에서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는 데 필요한 방법입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에서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배에 예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폭풍에 대한 각자의 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족, 교회 또는 다른 그룹에서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과 같은 것입니다. (때때로, 특히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역할과 반응은 매우 역기능적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은 누구와 가장 동일시됩니까? (다른 상황이나 인생의 다른 시간에 나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 그림의 상세부분

가장 윗부분의 제자

뱃머리에 있는 남자가 거대한 파도를 타고 맨 위에 있습니다. 열심히 앞 돛을 붙잡고 매진하는 리더이자 프로 어부로 보입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큰 모험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니면 그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제자

남자 3명(아마도 경험 많은 어부일 것임)은 돛대에서 메인 돛을 고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있습니다. 강풍이 그것을 찢고 금속 와이어를 부러뜨려 붐이 마스트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간신히 매달려 있는 제자

거대한 파도가 중앙의 왼쪽에 있는 남자를 두드리고 있고 그는 필사적으로 가이 와이어(guy wire)에 매달려 있습니다!

 

혼자 있는 제자

배의 왼쪽 하단 중간쯤에는 놓치기 쉬운 백의의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등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혼자 앉아 있습니다. 그는 배 안에서 그를 둘러싼 무서운 폭풍과 혼돈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 같은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비전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천사일까요?

렘브란트 그림의 상세부분

두려워하는 제자

대부분의 선원들이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특히 배 오른쪽 부분 위쪽에 있는 제자가 특히 두려워합니다. 그는 몸을 웅크린 채 배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파도를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불안으로 떨고 있는 것을 거의 느낄 수 있습니다.

 

뱃멀미 하는 제자

뒤쪽 왼쪽 하단에는 이마에 손을 얹고 보트 측면에 기대어 괴로워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곧 토할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한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예수님께 화를 내는 제자

두 제자는 폭풍 속에서 주무시는 예수님께 화를 내며 깨웁니다. 한 사람은 그를 흔들어 깨우고 다른 사람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 우리가 익사해도 상관없습니까?”

 

멍하게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제자(시청자를 보고 있는 제자)

배 왼편 뒤쪽(그림상으로는 앞쪽)에 파란색 셔츠를 입은 제자가 가이 와이어(guy wire)를 잡고 서 있습니다. 어두운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다른 손은 이마에 얹혀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감정의 폭풍에 휩싸여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마치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지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주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제자

화난 두 제자와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제자 외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은 제자만이 신뢰와 경외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제자의 머리에 후광을 그려 끔찍한 폭풍 속에서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키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제자

예수님과 함께 배에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선미 맨 뒤에 제자가 키를 잡고 있습니다. 그는 배를 책임지고 있으며, 경험 많은 어부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베드로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확실히 리더입니다. 그는 배의 진로를 안내하고 선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할 책임이 있습니다. 배를 계속 조종하려고 애쓰느라 손이 키를 꽉 쥐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마도 지금 그는 친구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온 주의가 주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키를 들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폭풍에 대해 기도하십시오

이제 우리 자신의 폭풍우를 복음 이야기로 가져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경험하는 폭풍과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일부 폭풍은 위험합니다. 다른 것들은 스트레스의 폭풍이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폭풍우가 우리의 가족, 직장 또는 사역에 어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개인적인 것. 개인 폭풍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우리는 어떤 인물과 동일시됩니까? 이것에 대해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Part 2)

예수님을 자세히 보십시오. 얼어붙는 비가 그에게 쏟아지고 파도가 배를 덮치고 바람이 그를 휘몰아치며 배를 요동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그 위험한 폭풍을 모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는 척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낮잠을 자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평화롭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처럼 큰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그렇게 편안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 폭풍을 진정시키기 위해 계속 계획하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본 대로만 했으며 항상 아버지께 복종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 안에 계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폭풍 속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께서 그들을 돌보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폭풍 속에서도 평안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이 복음서 이야기에 숨겨진 기적이며, 예수님께서 폭풍을 잔잔하게 하신 후 제자들에게 “왜 그렇게 두려워하느냐?”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서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오, 바다에서 우리 모두를 거의 익사시킬 뻔한 것은 폭풍이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님은 진심이셨습니다. 제자들이 천국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면 무서운 폭풍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편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화가 그분의 몸에 스며들었습니다. 그가 폭풍 속으로 말했던 것은 그의 몸 안에 있는 이 평화였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예수님은 하늘의 구멍과 뚫고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에 있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폭풍우를 바라보고 있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하려는지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하늘에 있는 빛의 근원을 보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하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서도 빛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시며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제자가 예수님의 빛을 봅니다! 아마도 키를 잡고 있는 제자도 예수님의 빛에 이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렘브란트의 그림 한복판에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징을 보셨나요? (돛대로 쓰인 십자가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폭풍우 속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개인적인 권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해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 두 사람 또는 그룹과 함께 이 묵상 경험을 하고 있다면 세 번의 주요 침묵 기간 후에 서로 경험을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 번째 공유의 경우 사람들이 아무 설명 없이 자신의 단어나 문구만 소리내어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 나눔은 다른 사람들이 묵묵히 중보기도하는 개인기도로 효과적입니다. 세 번째 나눔은 모든 사람이 주님의 초대에 대해 대화를 나누도록 초대한 다음 그룹 구성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Christ i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 Ludolf Bakhuizen(1630-1708), 1695 (갈릴리 바다 폭풍 가운데의 그리스도, 루돌프 바퀴젠 작품)

 

28-34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 5:1-20; 8:26-39) (Jesus Heals the Gadarene Demoniacs)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28절 “가다라 지방”은 마가(마 5:1 - 20)와 누가(눅 8:26 - 39)의 기록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가다라'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데가볼리(Decapolis, 팔레스틴에 있는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로서 10개의 도시를 의미함)중의 한 도시였습니다. 반면 거라사는 가다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가다라 지방이란 표현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 상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다라'는 베레아 지역의 수도(首都)였으므로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거라사'까지 가다라 지방으로 호칭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복음서 기자들은 이 지역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명칭을 통일시키지 않아도 무방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이 지역은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이었습니다(4:25). 이는 돼지 떼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로(30절)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생각했으므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돼지를 거의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린 자 들이” - 마가와 누가는 예수 앞에 등장한 귀신들린 자를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습니다(막 5:2; 눅 8:27). 이는 아마 이들이 다른 한 삶은 제쳐두고 증세(症勢)가 보다 더 심각한 한 사람에게만 주의를 집중시켜 초점을 맞춘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Augustine, Calvin). 한편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들은 주로 정신적 결함이나 자폐적 환자로서가 아니라 악한 영의 지배권 아래 놓인 자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대항키 위한 사단의 극렬한 저항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The Two Men Possessed with Devils, James Tissot (1836-1902), between 1886 and 1894 (귀신 들린 두 사람, 제임스 티소 작품)
Serbia. Kosovo. Visoki Dečani. XIV century (세브리바, 코소보, 비소키 데카니, 14세기)
Jesus Heals Two Demoniacs, David Martin(1639-1721) (예수님 두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시다, 데이비드 마틴 작품)

29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Καὶ ἰδοὺ ἔκραξαν λέγοντες Τί ἡμῖν καὶ σοί Υἱὲ τοῦ Θεοῦ) – 여기에서도 “And, Behold!라는 말이 빠져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Υἱὲ τοῦ Θεοῦ)”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지칭할 때, 특히 신성을 지닌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칭호입니다(3:17). 이 말을 통해서 살펴볼 때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영적 감지력(感知力)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행 19:15).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도 이 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있다고 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Τί ἡμῖν καὶ σοί; What to us and to you?) 이 말을 직역하면 '우리와 당신(사이)은 무엇입니까?'란 말로서, 그 속뜻은 '왜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당신이 우리를 괴롭히며 방해하느냐?' '제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냐?'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관용어입니다(삼하 16:10; 왕하 9:18; 스 4:3). 아무튼 사탄의 세력들은 영원한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 상대적이며, 제한적인 자유가 허락되어 있었던 까닭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엡 2:2; 6:12).

 

예수님은 두 광인을 고치셨지만 많은 돼지를 희생시키는 물질적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한 생명의 가치는 계산할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돼지들은 생명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물질적 손해로 인해서 도저히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는 잠시 있는 세상의 삶과 물질들을 위해 영원을 포기하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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