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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8장(上)_예수님 산에서 내려오시다(1)

by 적아소심 2023. 2. 15.

1-4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다( 1:40-45; 5:12-16) (Jesus Cleanses a Leper)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말씀 마태복음5: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내용은 하나의 문학적 구조를 형성합니다. 이는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2 율법 수여자로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 것처럼 산에서 내려오신 것으로 부분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분이시지 그것을 받으신 분이 아니신 것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5:1절에서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고 제자들에게 산상 수훈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때에 제자들뿐 아니라 많은 무리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같은 말씀인데도 말씀의 권세가 다르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를 들은 후에도 예수님을 따라 위에서 내려왔고, 소문들 듣고 아래에서 많은 무리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2절에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 영어의나병(leper)”이란 단어는 헬라어의비늘 (λεπρός; lepros)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고대 용어는 오늘날 우리가 명명하는 것보다 많은 종류의 피부병을 일컫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레위기 13 ~14 장은 구약에서 나병을 다루는 실례를 보여주는데,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 자체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신학적으로 적절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나병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생긴 질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점에 대한 구약적 신학적 근거는 웃시아 왕의 경우입니다(대하 26:16-23).

 

4절에서 예수님은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고치는 자로만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조, 17:9; 9: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고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방향으로 믿음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나병에 걸린 사람의 상태를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의 상태에 비유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나병은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죄의 더러움을 상징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대신 밖으로 나가 소식을 퍼뜨리며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이상 공개적으로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사방에서 그에게 왔습니다.

Rembrandt: Jesus Heals a Leper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렘브란트)
Christ cleansing a leper by Jean-Marie Melchior Doze, 1864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 쟝 마리 멜키오르 도즈 작품 )
Jesus Healing the Leper(1864), Jean-Marie Melchior Doze (1827 - 1913)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쟝 마리 멜키오르 도즈 작품)
Jesus heals the leper by Alexandre Bida(1813-1895) (예수님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알렉산더 비다 작품)

알렉산더 비다는 툴루즈에서 태어나 오리엔탈리즘을 전공하고 Eugène Delacroix에게 공부했지만 정확성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눈으로 곧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비다(Bida)는 젊었을 때 이집트, 그리스, 터키,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여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성경 삽화가로서도 활동하였습니다. 성서 삽화가로서 Bida의 Les Saints Evangeles는 1873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안에 있는 4개의 복음서는 그의 28개의 에칭 그림이 들어 있습니다. 비다의 작품은 그리스도를 경건하고, 세련되고, 위엄 있고, 강하게 잘 보여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5-13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다( 7:1-10; 4:43-54) (Jesus Heals a Centurion’s Servant)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2)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5절에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였습니다. 마태복음4:13절에 이어 예수님 사역의 중추지였던 가버나움이 두 번째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마태복음4:13절에 언급된 1차 갈릴리 사역이 마태복음 5-7장에 언급된 산상수훈으로 잠시 중단되고 제 2차 갈릴리 사역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한편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로마의 군단급(1군단은 700명의 기병을 포함한 3,000- 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은 아니지만 팔레스틴의 분부왕 헤롯 안디바의 보조 부대가 주둔(stationing)했던 곳이었습니다. 팔레스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는 타국에서 징집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비 유대계열, 여기서는 사마리아 정도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Pulpit Commentary), 레바논 또는 시리아와 같은 이방 지역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쩌든 그들은 이방인들임에 틀림없습니다.

 

8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이 백부장은 분명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님을 전능한 절대자로 믿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사실 예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말씀으로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기록은 요한복음 4:46-53절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경우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은 더욱 돋보이는 것입니다. 한편 만약 그가 예수님을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 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도나 안수 등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었으며, 이것은 그가 예수님에 대해 신적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백부장 그가 진정한 군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군인은 명령에 죽고 사는 존재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목적을 즉시 이루어 내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런 명령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말씀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실행되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 하시면 그것은 현실에서 즉시 이루어 질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 '기이히 여기다'란 말의 헬라어는 '다우마조'(θαυμάζω ; thaumazo)로서 본문에는 단순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ἐθαύμασεν ; ethaumasen). 이 말은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 등으로 번역됩니다. 본문에는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기셨던 반면 마가복음6:6절에는 예수께서 고향에 가셔서 권능을 행하고 병자도 고치셨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신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믿음과 불신 모두가 놀라운 경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이에게 특별한 관심(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을 가지고 계십니다.

Jesus healing the servant of a Centurion, Paolo Veronese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파올로 베로네세)
Jesus healing the servant of a Centurion, Paolo Veronese, 16th century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파올로 베로네세 작품, 16세기)

14-17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다( 1:29-34; 4:38-41) (Jesus Heals Many at Peter’s House)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14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태4:18-20). 그리고 요한복음1:44절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빌립과 마찬가지로 벳세다였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벳세다에서 출생하여 결혼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이거하면서 어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버나움과 벳세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설사 고향이 가버나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베세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마태8:20) 베드로의 집에 자주 들러 거기서 거처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Jesus Healing Peter's mother-in-law by John Bridges, 19th century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예수님, 존 브릿지 작품, 19세기)
All the City Was Gathered at His Door, James Tissot(1836-1902), between 1886-1894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 앞에 모이다. 제임스 티소 작품)

18절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 – 마가복음에서는 여기에 '그 날 저물 때에'란 말을 명기해 놓고 있습니다(마가4:35). 아마 이때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지(14, 15절)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병 고치는 이적을 보고는 떼를 지어 그에게로 모여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무리 중에 자기도 끼워달라고 간구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에워싼 군중들을 피하여 건너편으로 떠나고자 하셨는데 이는 아마 수면을 취할 시간을 가지기도 해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예수님은 제자들을 인격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무리를 떠나 제자 훈련의 시간을 가지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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