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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6장_산상수훈(2)

by 적아소심 2023. 1. 29.

1-4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Concerning Almsgiving)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Woman giving alms by János Thorma (구제하는 여인, 야노스 토르마 )

위 작품은 헝가리의 화가 János Thorma(1870-1937)의 그림입니다. 야노스 토르마는 1896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나기반야(오늘날 루마니아 바이아 마레)에서 시작된 나기반야 예술가 집단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 단체의 자연주의적 미학에서 역사적 주제로 옮겨가며 낭만적인 사실주의와 후기 인상파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을 넘나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헝가리 국립 미술관, Thorma János Múzeum, 지역 박물관 및 개인 수집가들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Collecting the Offering in a Scottish Kirk by John Phillip(1817-1867), 1885년 (존 필립 작품)

타탄(tartan) 체크 무늬 겉옷을 입은 장로(왼쪽)는 모금함을 성인 다섯 명과 어린이 두 명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아이에게 돈을 전달하기 위해 온 사람들입니다. 가장 위쪽 중앙 강단에는 목사가 찬송가를 부르고 벽 쪽에는 희미하게 피아노 반주 모습도 보입니다. 중앙에는 장로나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성경책을 펴 들고 함께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있는 강대상 아래에는 여러 교인들이 서서 아이에게 돈을 주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른쪽 부인의 어린 딸로 보이는 아이를 통해서 중앙의 아이에게 동전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돈을 받는데 그렇게 행복한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은밀한 구제라기 보다는 형식적이고 보여주기 위한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존 필립(John Phillip, 1817 ~1867)은 스페인 생활을 가장 잘 묘사한 것으로 알려진 빅토리아 시대의 스코틀랜드 화가입니다. 그는 1851년 스페인을 여행한 후 이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Spanish Phillip"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필립스의 예술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인정받았습니다. Panmure경은 1836년에 Phillip이 잠시 런던에서 Thomas Musgrave Joy 학생이 되도록 학비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또한 Royal Academy of Arts에서의 교육 비용도 Panmure경이 지원해 주었습니다.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PhillipRichard Dadd가 조직한 아티스트 지망생 그룹인 The Clique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CliqueWilliam HogarthDavid Wilkie를 추종하였습니다. Phillips 자신의 경력은 스코틀랜드 소작인의 삶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동료 Scot Wilkie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Bartolomé Esteban MurilloDiego Velázquez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 생활의 장면을 더욱 다양하게 그렸습니다.

5-15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1:2-4) (Concerning Prayer)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5-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하라"는 προσεύχομαι(proseúxomai; 프로세우코마이)로써  prós(프로스)는 'towards(향하여)', 또는 'exchange(교환하다)'는 의미이고, euxomai(에우코마이)는 '소원하다', '기도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뜻풀이 하자면, 주님께서 믿음을 주실 때 인간의 소원(생각)을 주님의 소원으로 바꾸어 주님과 소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기도(프로세우소마이)는 신약에서 믿음(피스티스)과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조: 행 6:5,6,14:22,23; 엡 6:16-18; 골 1:3,4; 살후 3:1,2; 요 5:13-15; 유 20)

 

기도는 단순히 나의 소원만을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나의 소원을 말하며 기도를 시작하지요. 그러나 기도를 하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고, 주님과 소통이 되면 주님의 소원을 알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나는 나의 소원은 주님께 드리고, 대신 주님의 소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는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교제입니다.(주님, 이 기도의 교제에 참여하게 하소서!) 

 

7절에서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중언부언은 'βατταλογήσητε'(battalogēsēte, 바탈로게세테) (기본형: βαττολογέω; battalogeó, 바탈로게오)인데, 이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떠들다’, ‘공허한 (헛된) 단어를 사용하여 (장황하게) 수다를 떨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말πολυλογίᾳ(polylogia, 폴리로기아)로 기도에 기계적으로 양적인 힘을 부여하여 주문을 많이 해야 그들의 기도가 그들의 신에게 들려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전형적인 기도 방법인데, 그들은 반복적인 주문을 할 때 그들의 신이 열심히(의도적으로 깊이)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부모에게 무엇을 요청할 때 계속 같은 내용으로 반복하며 요구하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땡깡이라고 봅니다. 부모가 이미 자녀의 요청을 듣고 그것을 들어주려고 하는데, 계속 그런 요청을 반복하면 아무리 부모라도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기도는 교제이며 소통이기 때문에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하지 않고 혀끝에 남겨둔 것까지도 다 아십니다(시139:4). 기도는 많은 말이나 긴 시간에 있지 아니합니다. 기도는 그 깊이와 친밀함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친밀한 자에게 그 언약을 모두 보여주십니다(시25:14).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방법으로 가르치신 그리스도인의 핵심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두 가지 버전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긴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짧은 형식입니다. 누가복음 11:1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 같이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마태 버전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 초기에 말씀하신 것이고, 누가 버번은 1년 후 유대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일곱 가지 기도 중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나머지 네 개는 인간의 필요와 관심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의 기록에만 "(당신의) 뜻이…이루어지이다"와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탄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1절에는 두 원본 그리스어 텍스트 모두 다른 그리스 고전 또는 코이네 그리스어 문학에는 나타나지 않는 형용사  ἐπιούσιον(epiousios 에피오우시오스)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일용할(daily)", 또는 “매일”로 번역되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예배에서 대부분의 기독교 교단에서 사용되며 거의 예외 없이 예배전례(예전) 형식은 마태 복음의 버전입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주기도문 송영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신학적 차이와 다양한 예배 방식이 기독교인들을 갈라놓지만, 주기도문에 대해서는 논란이 아주 적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주기도문에 대한 여러 강해나 주석은 생략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그 말씀대로 직접 몸으로 기도하는 삶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계속해서 주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묵상하면서,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그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 내 삶을 매일 살아내게 하는 동력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The Lord's Prayer (Le Pater Noster), by James Tissot (제임스 티소의 주기도문)
기도하시는 예수님 (Jesus in prayer)
Sermon on the Mount, Cosimo Rosselli(1439–1507), between 1481 and 1482, Sistine Chapel ( 코시모 로셀리의 산상수훈 )
Praying Hands(Betende Hände), Albrecht Dürer, c. 1508, Drawing, (Location: Albertina, Vienna) (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

알브레히트 뒤러 (1471–1528) 독일의 화가, 판화가, 이론가, 수학자,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판화로 유명하였는데, 북부 르네상스 예술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들 명이었습니다.  14세의 나이에 뒤러는 르네상스의 선두적인 예술가인 헤르만 퓌체의 견습생이 되었습니다. 아웨핀 지역을 6 동안 여행을 , 그는 고향인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자신의 작업장을 차렸습니다. 뒤러의 예술 활동은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주의 시대와 거의 일치합니다. 뒤러는 슈바벤, 티롤, 바이에른, 오스트리아의 도시들에서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스위스 도시들도 좋아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은 신비주의와 상징주의로 가득 르네상스 미술에서 가장 환상적인 작품들 하나입니다. 뒤러의 상상력은 철학, 특히 종교, 점성술, 마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뒤러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는 르네상스 예술가 명입니다. 그의 그림들은 종종 슈바벤 신비주의와 풍경화가들의 학교에서 유래한 방법론으로부터 만들어진 많은 상징적인 의미들을 나타냅니다.

 

독일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Albrecht Durer 1497년에 "기도하는 "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은 수채화로 종이에 검은색 윤곽선을 사용하여 완성되었습니다. 현재 모스카토 와인의 본고장인 오스트리아 알베르티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Albrecht Durer "기도하는 손"은 Albrecht 동생 Albert에게 헌정되었습니다.

 

Albrecht 그의 형제 Albert 모두 18명의 자녀를 겸손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년 모두 예술가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부모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아카데미(미술 학교) 다닐 있는 비용을 지불할 없었습니다. 사실 그런 학교에 청년을 명이라도 보낼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형제는 어느 서로 장래에 대한 deal 하였습니다. 그들은 동전을 던지고, 던지기에서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근처 탄광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4 후에 다시 역할을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학교에 사람이 졸업 돈을 벌어서 나중에 학교 가는 사람을 돕기로 것입니다

 

Albrecht 동전 던지기에서 이겼고 학교에서 4 동안 자신의 기술을 배우고 완성했습니다. 그는 연필, , 주머니칼을 다루는 있어서는 스승을 능가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알브레히트가 동생을 학교에 등록시킬 때가 되었을 , 알베르트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난 4 동안 고된 노동의 결과로 망가진 자신의 일하는 손을 형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손은 탄광에서 힘든 일을 했기 때문에 거칠고 변형되었으며 관절염이 생겼습니다. 그의 손에 있는 모든 뼈는 힘든 노동 조건으로 인해 적어도 번은 부러졌습니다. 그의 손은 거칠고 기형이 되었고 아팠습니다. 그는 이제는 예술가로서 섬세하거나 정밀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동생의 희생을 알게 알브레히트는 알베르트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할 포즈를 취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고객을 위해 돈을 받고 제작한 제단화의 모델로 "기도하는 " 유명한 잉크와 연필 스케치를 그렸습니다.

 

형제애, 희생, 관대함을 가슴에 품고 있는 단순한 그림은 수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었으며 여전히 많은 기독교 가정의 벽에서 우리의 기도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또한 가장 희생이 종종 가장 눈에 띄지 않으며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앨버트는 형을 위해 4년을 희생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상당한 영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6:5)

16-18 외식으로 금식하지 말라 (Concerning Fasting)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기도, 구제와 금식의 은밀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회퍼(Bonhoefer) 나를 따르라 설명되어 있습니다(그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논외로 할 때,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는 제자도의 비범성과 은밀성에 대해 잘 설명한 것 같습니다). 제자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알기에 기도와 구제와 금식을 은밀하게 행합니다. 이것이 제자도의 은밀성입니다.

누구의 작품인지를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위 그림과 같이 금식을 표시 내며 하지 말라는 것이 위 말씀의 요지입니다.

금식에 대한 논쟁은 마9:14절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주 금식을 하지 않으셨는가에 대해서였습니다.

 

마태복음9:14-15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불러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신 직후, 마태는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9:10-11).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죄인"으로 여겼던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데, 바리새인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에 대해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9:11-13). 그러나 이후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로 식사하시는 날이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는 날인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마가복음 2:18-22 누가복음 5:33-37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서 질문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후에 "어떤 사람들"에서 질문이 나왔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일반적인 금식의 영적 실천에 대해 물었습니다. 속죄일 외에 율법에서 요구되는 금식일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금식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은 금식하는 다윗(삼하 12:17-23). 또한 금식은 종종 기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구하면서 금식했습니다(6:18; 9:3; 10:1-3; 참조, 1:4-10). 금식과 기도는 종종 시편에서 연결됩니다(35:13; 109:21-24). 금식은 종종 회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요나서 3:4-9에서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을 듣고 금식했습니다. 에스더에서 유대인들은 하만의 위협을 들었을 금식하고(4:3) 하나님께서 하만으로부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축하하며 잔치를 벌였습니다(9:25-32).

 

이러한 금식의 이유는 2성전 시대의 문헌(외경)에서도 찾아볼 있습니다. 예를 들어, 토빗 12:8 금식과 기도를 연관시킵니다(비록 구제가 낫긴 하지만). 요셉서3:4-6에서 요셉은 그의 주인이 떠나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힘이 필요했을 7년의 기간 동안 금식하며 보디발의 유혹을 견디었다고 했습니다.

 

토빗 12:8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좋지만 의롭게 하는 구제는 이 둘보다 나으니라

요셉서(Testament of Joseph) 3: 4-6 그 칠 년 동안 내가 금식하였으나 애굽 사람에게는 사치하는 자 같이 보였나니 이는 하나님을 위하여 금식하는 자들이 얼굴에 은혜를 받음이니라. 내 주인이 없을 때 나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노라. 사흘 동안 나는 음식을 먹지 않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내가 일찍이 일어나 나를 심히 격분케 한 멤피스의 애굽 여자를 위하여 여호와께 울며 기도하였더라

 

다니엘의 금식에 근거하여 일부 2성전 본문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금식이 필요함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묵시록 9:7-10에서 아브라함은 불과 포도주로 요리한 음식과 자신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을 40 동안 삼가라고 들었습니다.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인류의 악에 어떤 심판이 임할지 계시하실 것입니다.

 

1세기까지 유대인의 금식 관습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유대인처럼 금식" 1세기 로마 세계에서 속담이었습니다(Suet. 8. 76).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디다케 8:1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선자, 바리새인처럼 보이지 않도록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라고 명령합니다. (“디다케또는 열두 사도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주님의 가르침또는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초대 교회에서 사용한 문서입니다. 내용이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금식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의 여러 관행들을 보시고 그들을 위선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12에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금식하는 자신의 의로운 습관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 동안 금식하셨지만 당시 유대교에서 경건한 영적 관습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금식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안식일 준수와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안식일을 지키셨지만 바리새인의 전통에 도전하셨습니다. 금식과 관련하여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은 속죄일에 금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처럼 일주일에 금식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원하시든 원치 않으시든 끼니를 거르는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의 발단도 예수님께서 아침 일찍 베다니에서 나오시면서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사로 등이 살고 있었던 베다니는 끼지 걱정을 만큼 가난한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찌 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찌 아침 식사를 요구하실 있었겠습니까?  혹여 식사를 하셨다 하더라도 식사는 너무나 부실했을 것입니다.(이는 단순한 제 생각이니 크게 오해없으시길...)

 

마가복음11:12-14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럼에도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잔치에 참석하시는 모습이 자주 나와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잘 드셨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묘사합니다.

 

이사야 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초기 유대 기독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금식을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훈련으로 금식을 계속했습니다(디다케 8:). 마태복음9:15절에 나오는 신랑의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 금식을 다시 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리스도인의 금식이나 잔치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때때로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영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재정의해 주십니다( 6:16-18).

(Homeless Jesus : 노숙자 예수님 조각상, Timothy P. Schmalz(캐나다)

노숙자 예수(Homeless Jesus 또는 Jesus the Homeless)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 공원 벤치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 예수님을 묘사한 청동 조각품입니다. 원래 조각품은 2013 초에 토론토 대학의 레지스 대학에 설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교회 성당에서 거부당하기도 하였지만 2016 이후로 세계적으로 1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설치되었습니다. 마태복음25:34-40 말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40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입니다.

 

19-34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11:34-36; 12:22-34; 16:13) (Concerning Treasures)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Illustration of Matthew6:19(also Luke12:21): "do not lay up earthly treasures" by Karel van Mallery(1593)

보물에 대한 말씀 본문부터 주제가 변경되었습니다. 이전 부분에서는 예배를 위한 절차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경건함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했지만, 부분에서는 부와 물질적 재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며 그것들이 유용하지 않은지 설명합니다. 19-34절은 "보물(소유물)"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보물"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보물 상자나 창고의 내용물을 가리킬 있습니다. “(moss; 나방)” 종종 직물의 파괴와 관련이 있으며, 시대에는 의류(섬유) 주요 투자처였습니다. 때때로 "동록(rust)"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brosis 의미하는 바는 확실합니다. 단어는 일반적으로 "먹다" 의미합니다. 이것은 금속을 먹어 치우는 산화를 의미할 수도 있고, 곡물 공급을 소비하는 , 나무를 통해 먹는 벌레 또는 앞서 언급한 (나방) 반복과 같은 해충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파괴되거나 도난 당할 있는 모든 재물과 달리 천국에 대한 투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위협받을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것이 가장 안전한 투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보물을 위한 창고로서의 천국에 대한 생각은 예수님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시대의 여러 유대인 작품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구절은 특히 구제에 대한 격려, 사치보다는 구제에 (보물) 써야 한다는 주장일 있다는 점에 주목할 있습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구제에 관한 마태복음 19:21절과 매우 유사한 문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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