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1-39
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다(막 12:38-40; 눅 11:37-52; 20:45-47)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 모세를 대신하여 가르치려 했던 유대인 지도자들을 언급하며 모세의 의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복음서는 오래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모세의 의자"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모세의 자리란 무엇인가요? 여러 역사가와 학자들이 이 구절을 조사한 결과, 예수님께서 "모세의 자리"를 언급하신 것은 모세의 "직분"과 그의 유산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프랭크 맥글로인(Frank McGloin)은 20세기 초 그의 저서 『삼위일체의 신비』(The Mystery of the Holy Trinity)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의미에서 위대한 율법 제정자의 계승자임을 의미했다. 그의 직분과 권위가 그들에게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을 때 (즉, 산헤드린에서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 다시 말해, “Ex cathedra”) … 신성한 율법, 즉 성경에서 모세가 칠십인 장로 의회에 전했던 것과 동일한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그들을 인도하셨다."
- ☞ 참고: "Ex Cathedra"는 직역하면 "의자에서부터(from the chair)"라고 옮길 수 있는데, 원래 로마 가톨릭에서 "교황의 지위(cathedra)에서 나오는 권위" 또는 교황의 "무오류성(無誤謬性, Papal infallibility)"을 의미하던 교회법상 라틴어 법률용어이다. 영미법에서는 "권한있는 자로부터, 권위자로부터, 권위를 가지고" 등의 의미로 확대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법률 외에 일반용어로도 사용되고 있다.
의자는 또한 실용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고대 세계의 교사들은 가르칠 때 종종 앉아서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앉았던 실제 의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과 선지자들을 해석할 때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도 그들의 본보기를 따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들은 가르치기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들은 꽤 많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읽을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바리새인과 똑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6, 7절에서 보듯, 현대적 교회의 사람들도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선생, 또는 교회에서의 높은 직급?)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다 보면, 많은 사람에게 은연중에 "지정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일 예배당에 들어가면, 어떤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 안 있으면 잘 알게 됩니다. 특히 나이 드신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이 앉는 자리에 뭣 모르고 앉으면 나중에 지적받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소위 이름 좀 알린 사람이 교회에 오면 관심을 받고, 좌석도 안내해 줍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말씀하시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 "위선자들아! 너희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오직 자신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사람의 법은 많이 알지만 하나님의 법과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문맥의 흐름과는 약간 결이 다른 얘기입니다. 아래 그림은 모세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의 라파엘로 작품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리에 앉은 모세상(像)의 모습에서 해석 또는 번역의 오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의 상은,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조각상은 모세를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린 기묘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상하게 보이지만, 르네상스 시대 천재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참신함, 또는 창조성이 절대 아닙니다. 사실, 뿔 달린 모세 모티브는 중세 채색 사본에서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대개 그렇듯,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초기 오역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롬의 불가타 성경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29-30에 나오는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광채가 나는" 또는 "빛나는"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카란(קָרַ֖ן:qaran)입니다. 이 단어는 "뿔"을 뜻하는 단어인 케렌(qeren)과 같은 어근(qrn)을 공유합니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햇살을 가리키는 단어는 케렌(qeren)으로, 마치 "태양의 뿔"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따라서 제롬(히에로니무스)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모세의 얼굴을 "광채가 나는" 대신 "뿔이 있는"이라는 뜻의 코르누타(cornuta)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번역자의 선택은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들이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는 성경 속 인물을 묘사하는 데 특이한 모티프를 선택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롬의 번역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뿔은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실 고대 세계의 신들 대부분은 뿔이 있었는데, 이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짐승, 즉 황소, 들소, 성경에 나오는 베헤모스를 분명히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뿔이 아직 악마의 전유물로 여겨지지 않았고, 악과도 전혀 연관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제롬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온 후 신과 같은 힘을 얻었다고 주장하려 했다고 추측합니다.
어쨌든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롬이 단순히 실수를 저질렀다고 동의합니다. 사실, 이것이 그의 번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오류는 아닙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은 모세의 얼굴을 "영광을 받았다"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원래 히브리어 "광채가 나는", "빛나는"에 훨씬 더 가까운 번역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7절에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얼굴의 영광 때문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는 뜻)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곧 그의 뿔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뿔 이야기는 우리가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움에 있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말씀을 해석하는 권위를 가졌지만, 그들은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그 말씀을 자신들의 삶을 정당화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증명하는 증거자료(?)로 써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스라이팅 하였습니다. 그들의 영적 권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자신들도 실천하지 못했던 율법을 그들에게 짐 지운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위선)에 대한 책망 (13-34)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devour widows' houses, and for a pretence make long prayer: therefore ye shall receive the greater damnation.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외식, 위선(hypocrisy)이라는 단어는 헬라어(그리스어) ὑπόκρισις(hypokrisis)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질투하는", "연기하는", "연기하는", "겁쟁이" 또는 "가식하는"을 의미합니다. 외식하는 자, 위선자(hypocrite)라는 단어는 헬라어 ὑποκριτής(휘포크리테스)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ὑποκρίνομαι (휘포크리노마이 크리세/κρίση, "판단" ⟶ κριτική(크리티케), "비평가")와 연관된 행위 명사입니다. 아마도 배우가 극적 텍스트(drama text)를 연기할 때 어느 정도의 해석이나 평가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는 이 단어는 "아래(under)"를 의미하는 헬라어 접두사 hypo-와 "체질하거나 결정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krinein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원래 의미는 체질하거나 결정하는 능력의 부족을 암시했습니다. 이러한 결핍은 자신의 신념과 감정과 관련하여 이 단어의 당대적 의미를 형성합니다.
히포크리시스(ὑπόκρισις)는 수사학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공개 공연'에 적용되었습니다. 반면에, 히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ής)는 무대 배우를 지칭하는 전문 용어였으며 공인(public figure)에게 적합한 역할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서 위대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 성공적인 배우였던 경쟁자 아이스키네스를 위선자라고 조롱했습니다. 무대에서 인물을 흉내 내는 그의 재주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히포크리테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아마도 로마인들의 배우에 대한 경멸과 결합 되어, 이후 본래 중립적이었던 히포크리시스(hypokrisis)로 변질되었습니다. 히포크리시스가 "연기", 즉 가짜 페르소나를 가장하는 것으로 해석된 후대의 의미에서, 현대적 단어인(modern word) 외식, 위선(hycrisy)이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 위선은 "신약성서에는 나오지 않는 연극"에서 배우의 연장선으로 보아, 오만함과 마음의 완고함을 의미하며, 진심과 진실성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심하게 책망하시며 말씀하신 요지는, 모세 율법이나 규칙보다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에 대해 들어서 대부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누구일까요?
서기관은 학식이 풍부하고 모세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그 결과에 따라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의 의미를 알려주고, 율법의 문제에 관해 설명을 해줍니다. 이 서기관들은 산헤드린에 고용되어 있었으며, 자신의 직분에 대한 자부심이 컸습니다.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손으로 베껴 썼고, 율법을 해석하는 능력 때문에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으며 사람들의 종교적 삶을 통제했습니다. 그들은 길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는데, 넓은 테두리나 술 장식이 있어 자신들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회당이나 교회에서 가장 좋은 자리, 상석에 앉아야 했으며, 자신들의 중요성을 과시했습니다. 또한, 대중 앞에서 장황하고 장황한 기도를 드리며 자신을 과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드러내기 위해 "랍비" 또는 선생님으로 불렸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대교의 통치 의회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 땅의 최고 종교 기관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된 71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큰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율법의 최종 권위자였으며, 모든 종류의 종교적 율법 위반자를 심판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도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유한 가문 출신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부활하거나 죽음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으로 바리새인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토라라고 불리는 히브리 성경의 율법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전통은 거부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이었고 대개 바리새인들과는 반대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산헤드린의 통치 의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대했고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배척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부활이나 천사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12절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하늘로부터 온 표적이나 증거를 보여 달라고 예수님을 자주 유혹했다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 위선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외식하는 자, 위선자는 마치 무대 배우처럼 모든 답을 아는 척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 닫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다른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과부의 집을 빼앗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긴 기도를 함으로써 의로운 척하는 등 비열한 짓을 합니다. (마태 23:13-1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이 모세의 율법을 따르도록 하려고 곳곳을 다니며,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전(또는 교회)을 두고 말하거나 맹세하는 눈먼 인도자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리석고 눈이 멀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보다, 금 자체를 더 크게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제사보다 제삿밥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마태 23:15-2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쉬운 일만 하고 율법의 더 중요한 것, 즉 마땅히 해야 할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버렸습니다. 그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도적질과 방탕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겉으로는 바르고 완벽해 보이지만 속은 더럽고 악하고 비열하였습니다. (마태 23:24-29).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당시 도덕적 종교적 생활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우리가 그분의 뜻과 길을 따라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문자 그대로를 따르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첫째로 율법을,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둘째로 두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생각을 따르지 못하게 하며, 삶에서 다른 것을 우선순위에 두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계명은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 계명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진리의 삶에서 벗어남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분의 뜻을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조차도 하나님 아버지를 삶에서 최우선으로 두셨습니다.
② 예루살렘을 두고 이르시다(눅 13:34-35)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성전 뜰에 서 계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과거의 선지자들뿐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배척한 것을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을 어미 새에 비유하는 구약성경 구절을 떠올리시며(신 22:6), 예수님은 잃어버린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려는 어미 새(암탉)에 비유하십니다. 마치 자식을 잃은 어머니처럼 예수님은 큰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배척하면서 예루살렘은 황폐해지고 생명수조차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후에 감람산(올리브 산)에서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의 건물들을 보고 감탄합니다. 이 시점(서기 30/33년경)에는 헤롯이 성전의 본채를 재건하는 작업이 완료되었지만, 일부 구간에서는 소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성전의 모습은 경이로웠습니다. 하얀 대리석과 금으로 된 베니어판이 햇빛을 반사했을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성전을 “구조, 규모, 모든 세부 사항의 풍부함 등 모든 면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 중 가장 경이로운 건축물”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충격적입니다. 성전 전체가 파괴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서기 66년에서 70년 사이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반기를 든 후 일어날 것입니다. 남은 것은 초석 몇 개, 즉 통곡의 벽뿐입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은 시편 118:26절에서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그들은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엄숙하게 입성하실 때 군중이 예수님을 구주로 환호하며 외쳤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 말씀이 다시 한번 외쳐질 때까지, 즉 순간적인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가 아니라, 일시적 군중심리로 호산나를 외치면서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외쳐질 때까지, 그들은 그때까지(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시편 118:26절의 말씀은 다시 한번 선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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