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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와 함께 하는 묵상_Visio Divina

두 교회 이야기_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

by 적아소심 2025. 4. 11.

두 교회 이야기

말씀 : 빌립보서 1:3-8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두 교회 이야기>입니다. 두 교회는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경로 (유럽 교회 개척)

먼저 빌립보 교회에 대해 살펴봅니다.

  • 빌1:3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사는 εὐχαριστέω (유카리스테오), '좋은'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즉, '감사하다'는 '하나님의 선한 은혜가 임하다'라는 뜻입니다. 감사하면 하나님 은혜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 4절,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여기서 간구는 원어로 일반적인 기도(pray)가 아니라, 결핍을 채워주시도록 간절히 구한다(request)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빌립보 성도들을 필요한 것으로 채워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 5절,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참여하다는 말은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ᾳ), 즉 교회의 본질인 교제 또는 연합을 뜻합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교제하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5절은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이 처음부터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날을 말합니다.
  • 7절b,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여기서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말씀은 5절의 '참여'라는 말과 다른 말입니다. 5절은 코이노니아인데, 7절은 쉭코이노노스 (συγκοινωνός)로 '아주 가까운 친구'라는 뜻입니다.
  • 8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란 '창자'를 말하는 것으로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아픔, 그 아련함으로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갈망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1차 아시아 지역 전도 여행을 마치고, 유럽으로 2차 전도 여행하면서 제일 먼저 개척한 유럽 지역의 첫 개척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6:9에는 바울이 유럽으로 가게 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전도 여행을 하고 있는데, 마케도니아 사람이 꿈에 나타나 "마케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는 아시아로 가고자 하는 바울에게 유럽으로 가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리스 카발라 교회 벽화_이리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

고대의 전승이나 미술 작품을 보면 바울의 꿈에 나타난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 가자마자 자주색(보라색) 옷감 장사하는 여사장님 루디아를 만나 그 집에 머물며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빌립보는 1~15천 명 인구의 작은 도시였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가난하였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과 충분히 관계성을 가질 시간도 없이 단지 몇 사람을 전도하고는 박해자들을 피해 데살로니가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아주 짧은 시간, (사실 시간적으로 몇 주 정도 밖에 안됩니다) 함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복음의 스승인 바울을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십시일반 헌금을 모아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기도와 물질로 지원하였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갔을 때도 160km 떨어진 그곳까지 찾아가 지원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865km나 되는 거리에도 그곳에 사람을 보내 지원했습니다. 이후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시아에 있는 에베소로 간 후에도 그곳까지 따라갔습니다. (빌립보에서 아시아의 에베소 교회까지는 769km 정도).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는, 로마까지 사람을 보내어 지원했습니다. 빌립보에서 로마까지는 1,800km가 넘습니다. 어른 걸음으로 최소 40일 이상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 먼 길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까요? 그러나 아무리 멀고 위험해도 빌립보 성도들에겐 그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넉넉지 않은 가운데서도 왜 이렇게 십시일반 헌금을 모아서 끝까지 바울을 지원했을까요? 바울과 그들의 만남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말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처음 그들 가운데 시작하신 것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자신들에게 주신 복음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바울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의리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33(?)

현재 빌립보서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1차 투옥).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개척한 지 어느덧 10여 년이 넘었습니다. 바울이 처음 빌립보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지금 마지막까지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과 함께하였습니다. 이것이 5절에서 말하는 동참, 즉 진정한 교제(코이노니아)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요 의리입니다. (의리는 세상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진정한 사랑과 의리 안에 애틋함과 간절함과 그리움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리고 먹먹하고, 한편으로는 감사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만큼 마음은 뜨겁고 간절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심장이 아리고 아픈 기억이 있는지요?

 

, 이제 고린도 교회를 보실까요?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마지막 시기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고린도는 로마 퇴역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고린도는 25만 명 정도의 큰 신도시로, 졸부들이 많아 빈부격차가 컸습니다. 또한 퇴역 군인, 이방인의 영향으로 음란하고, 우상숭배가 횡행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1 6개월이라는 꽤 긴 기간 머물며 고린도 성도들을 복음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 그들은 뒷담화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개척 전에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_라파엘(Raphael), 1515

  • 고린도전서 3:3-4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들 가운데 파벌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볼로파, 어떤 사람은 바울파라고 하며 서로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고 싸웠습니다.

  • 고린도후서 10: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그들은 바울의 편지 문장은 훌륭한데, 설교는 잘 못한다고 뒷담화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뒷담화를 gossip이라 말합니다. (딤전5:13) 신기하게 뒷담화는 돌고 돌아서 당사자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뒷담화, 즉 gossip은 관계를 해치고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믿음의 사람은 친구와 절교하여서도 그에 대해 악평을 하지 않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조직을 떠나 다른 조직에 가서도 과거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의 의견에 대해 옳다 그르다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화나 회의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 의견의 옳고 그름에 대해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화할 때는 남의 의견이 아닌, 나의 의견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대화와 회의의 원칙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예“, ”아니오“입니다.

  • 마태복음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 (새번역)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작은 빌립보 교회의 지원은 받았지만, 대형 교회인 고린도 교회로부터는 사례를 받지 않았습니다(고후11:8-9). 그러자 고린도 성도들은 왜 자기들 사례를 받지 않은 거냐며 바울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때로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따져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은혜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그냥 덮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큰 교회의 넉넉한 사례비일지라도 뒷담화가 많은 사례를 받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 그리스도의 편지(고후3:3)라고 칭찬하며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위대한 사랑 을 전해 주었습니다.

 

위와 같이 우리는 <두 교회 이야기>를 통해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 의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뒷담화를 경계해야 함도 배우게 됩니다. 빌립보 성도의 끝까지 가는 사랑과 의리, 그리움의 영성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장 난해한 모순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상식에 맞서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패배한 것 같은데, 승리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무너져야 세워지고, 죽어야 살고, 비워야 채워지는 질서가 십자가입니다. 증오와 저주로 복수해야 하는데, 사랑과 용서로 귀결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내 자신이, 그리고 공동체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 어디를 가든지 마음에 심어진 복음을 끝까지 간직하길 기도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간직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것을 끝까지 완성하실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내가 있었던 삶의 자리, 사역의 자리에 대한 좋은 추억만 소중히 간직하고 그리워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에서 나 때문에 고통받으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기롭고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가실 것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삶에서 함께 교제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으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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