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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와 함께 하는 묵상_Visio Divina

오늘의 묵상_신의 한 수, 에벳멜렉_예레미야 38:1-13, 38:15-18

by 적아소심 2024. 3. 7.

예레미야 38:1-13

1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4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5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6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1)왕의 아들 말기야의 2)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7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8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9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10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11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헝겊과 낡은 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밧줄로 내리며 12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13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예레미야 39:15-18

15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6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 앞에 이루리라 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18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개역개정)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바둑 용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묘수, 무리수, 승부수, 자충수, 꼼수, 국면, 수순, , 사활, 정석, 초읽기, 패착 등 친숙한 바둑 용어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으로 잡은 신의 한 수라는 말도 일본 바둑 만화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신의 한 수라는 뜻은 어떤 일을 처리하거나 해결하는 데에 매우 뛰어나고 기묘한 수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이 둔 것 같은 바둑의 한 수라는 뜻이지요. 우리 하나님은 정말 수()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만약 어떤 예언자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서, 북한이나 중국의 침략에 대항하지 말고 절대적으로 복종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현재 반공을 넘어서 멸공을 외치고, 자주국방과 자주외교를 외치는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아마 그런 예언자가 있다면 온갖 비난을 받고, 테러당하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 예언자는 매국노로 낙인찍혀, 당장 그를 처벌하라는 촛불시위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딱 그런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과 왕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친북과 친중을 넘어, 북한과 중국에 복종하라는 것보다도 훨씬 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며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런 예언 때문에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 핵심은 렘 38:2-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살길이라는 것이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열심히 싸워 난국을 극복하자고 해도 역부족인데 말도 안 되는 망국적인 메시지의 내용을 듣고 가만히 있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자신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말에 순종할 의무가 있었습니다(18:19). 또한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언한 대로 유다의 멸망이 곧 현실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할 고통과 비참함이 눈앞에 선하여 그는 개인적으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이러한 갈등이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렘 38:1절에서 이스라엘의 고관들은 시드기야 왕에게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청합니다. 유다의 마지막을 향한 멸망의 초시계는 이제 거의 다 돌아간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왕과 고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입장 때문에 예레미야를 죽이기를 꾀합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죽이고자 하는 명분은 렘 38: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먼저는, 예레미야가 백성의 샬롬(평안)을 구하지 않고 재난을 구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레미야가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한다는 것, 즉 군인과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에 대한 항복이 예레미야의 주장이라면, 거기에 맞선 민족주의적인 저항과 국가의 안보가 이들의 항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국가정책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렘 38:6절에서,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잡아서 줄로 매달아 시위대 뜰에 있는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다행히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었습니다. 근동 지방에는 물을 저축하기 위하여 구덩이를 파서 이용했는데 입구를 좁게 하여 구멍을 덮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구덩이 안의 공기가 탁하고 바닥에는 진흙만 남아 있어서, 예레미야가 오래 버티기 힘든 위중한 상황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포함한 그림 성경 - 많은 삽화가 포함됨(1896) <The art Bible, comprising the Old and new Testaments - with numerous illustrations (1896)>

이때 갑자기 에벳멜렉이 등장합니다. 에벳멜렉은 ‘에베드(Ebed)’와 ‘멜레크(Melech)’라는 두 글자로 된 단어로, 단순히 문자적으로 ‘왕의 신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고유명사로서 사람 이름을 가리킬 수도 있고, 단순히 왕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시중을 나타내는 직분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이 예루살렘 포위 공격하는 동안 시드기야 왕의 궁전에서 봉사했습니다. 에벳멜렉은 유다 사람이 아닌 구스(에티오피아)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시드기야 왕의 측근까지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는 유대인들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렘 38:9절에서 그는 왕의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우물에 던져 빠뜨렸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시드기에 왕에게 달려가 예레미야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고관들의 눈치를 보는 줏대 없고 연약한 왕이었습니다. 에벳멜렉이 왕에게 예레미야를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 고관들에게 알려지면, 그 자신조차도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지체없이 담대하게 왕에게 나아가 예레미야를 위해 탄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즉시 사람들을 데리고 구덩이로 가서 예레미야를 구출합니다. 그는 구출하러 갈 때, 헝겊과 낡은 옷을 가져갑니다. 밧줄로 들어 올릴 때, 예레미야가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요, 배려와 긍휼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감동적이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예레미야는 그토록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쳤지만, 남은 것은 내려진 낡은 헝겊을 댄 줄에 자기 몸을 의탁하여 간신히 구덩이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동족인 이스라엘 왕과 고관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지만, 이방인이었던 에벳멜렉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때로 이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보게 됩니다.

우물에서 나온 예레미야 <동판화-아드리앙 콜라에르(Adriaen Collaert), 원작품-마르텐 드 보스(Maarten de Vos), 출판- Gerard de Jode, 1585년 작품>
우물에서 예레미야를 구해내는 에벳멜렉

렘 39장으로 가면, 예레미야가 시위대의 뜰에 갇혀 있을 때, 예루살렘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하여 불타고 멸망합니다. 시드기야는 도망가다가 붙잡혀 그의 두 눈앞에서 아들들과 모든 고관대작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본인은 두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지(B.C.722), 136년 만에 다시 남유다마저 파괴되고 많은 사람이 죽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B.C.586).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불타는 예루살렘, circle of Juan de la Corte, 1630-1660년
제임스 티소,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1896년

하나님은 바벨론의 칼을 허용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타락을 심판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지속적으로 바벨론에 의한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회개하고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당시로 보면 매국노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나 심판으로부터 백성들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설교에 빠져 회개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포와 두려움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한 날들 가운데 하나님은 한 사람을 기억하셨습니다. 바로 에벳멜렉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레미야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렘 39:18b에서 하나님은 에벳멜렉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에벳멜렉은 대부분 사람이 죄악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결정적으로 행동으로 나서 예레미야를 구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벳멜렉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삶으로 구체화 되어 나타났습니다.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예레미야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에벳멜렉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보면서 우리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에벳멜렉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쓴 것을 모두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이나 방법을 뛰어넘어 신묘막측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이라는 히든 카드를 가지고 계실 줄을 예레미야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울지라도 믿음으로 계속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신의 한 수, 하나님의 한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의 역사를 위해, 불신자와 적대자들이 가득한 시드기야 왕궁에 에벳멜렉을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전혀 뜻하지 못한 곳에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바로 신의 한 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도 예레미야가 진흙 구덩이 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에벳멜렉이라는 이방인을 보내어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에벳멜렉을 준비시켰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에티오피아에서 이스라엘까지 와서 왕궁의 고위 관리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전혀 추측할 수 없습니다. 에벳멜렉은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으로 등장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예레미야를 보호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예레미야가 살아날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극적인 신의 한 수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분이실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눈여겨보십니다.

  • 시편 33:18 "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원문으로 보면, “보라, 여호와의 눈은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과 그분의 자비를 바라는 자들 위에 있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눈물을 보셨고, 그의 죽음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에벳멜렉의 믿음과 그가 감수한 위험을 보셨고, 예레미야에 대한 배려와 긍휼을 보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출할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바빌론 포위 공격의 혼란과 혼돈 속에서 에벳멜렉을 보호해 주실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에벳멜렉은 어떤 댓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옳은 일, 즉 예레미야를 죽음에서 믿음으로 구해 내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옳은 일을 선택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눈여겨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준 것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보답하십니다. (10:42; 9:41).

 

둘째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은 문제해결을 위해 많은 수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신의 <한 수>가 아니라, <많은 수>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수는 우리 인간의 수와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 인생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 시편 139:17-18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고,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우리 사역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온전히 보호하시고,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가장 합당한 동역자들과 물질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도 샬롬으로 인도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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