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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1_창세기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창세기 30장_레아와 라헬의 자식 낳기 경쟁 그리고 야곱과 라반의 품삯 정하기

by 적아소심 2024. 6. 29.

창세기 30:1-43

 

레아와 라헬의 자식 낳기 경쟁 (1-24)

 

단과 납달리 - 라헬의 여종 빌하 (1-8)

또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한 것을 보았고, 또 라헬은 자기 언니를 질투했습니다. 그리고 라헬은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내게 아들들을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을 것이라.”

 

여기에서 질투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테칸네(תְּקַנֵּ֥א), 질투하다는 뜻의 카나(קָנָא)의 강조능동 미완료시제입니다. , 라헬은 레아를 계속 질투했고, 지금도 질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언니 레아가 연거푸 아들을 4명이나 낳는 동안 자신은 한 명도 낳지 못했으니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은 물론이고 야곱의 사랑까지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그녀를 절박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의 화(분노)가 라헬을 향해서 타올랐고, 또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의 태의 열매를 막으신 하나님을 대신하겠소?” 야곱도 자매의 투기와 질투 사이에서 많이 지쳤던 것 같습니다. 10여년 넘게 자매들 틈바구니에서 시달렸으니 라헬의 성화에 화가 날 만도 합니다. 원문에서는 콧바람을 내쉬며 씩씩거리면서 뜨겁게 격노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물론 야곱의 입장도 이해가 됩니다. 하루종일 뜨거운 날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왔는데, 아내들의 시기 질투어린 말들을 들었을 때 야곱은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 터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지금 죽고 싶어질 정도로 마음이 힘든 라헬을 이해하고 위로하기보다는 마음에 쌓인 분노와 화를 쏟아버립니다. 자신이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따지려면 나한테 하지 말고 하나님한테 가서 따지라는 것이지요. 야곱은 오랜 시간 처가살이 하면서 욕심많은 장인 밑에서 중노동과 자매들의 등쌀에 휩쓸리며, 믿음과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10여년을 처가살이 살면서 아마 마음은 많이 무너져 있었을 것입니다. 장인뿐 아니라 아내들도 자기들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야곱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보다는 도구처럼, 종처럼 여기는 것에 분노가 쌓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라헬도 지지 않고 말합니다. 그녀도 오직 자식 문제에 빠져 야곱의 신세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내 종 빌하가 있으니, 그 여자에게 들어가서 내 무릎 위에 아이를 낳게 해주시고, 또 나도 또한 그 여자를 통해서 집안을 세우게 하십시오.” 야곱의 상황이나 마음 그딴 것은 잘 모르겠고, 내게 자식이나 만들어 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은 야곱에게 자기의 여종 빌하를 아내로 주었고 또 야곱은 그 여자(빌하)에게 들어갔습니다. 야곱은 철저히 처가에서 권리 없는 종과 같이 살아야 하는 삶에 지쳤을 것입니다. 그는 아내들이 사납게 투기하고 경쟁할 때 그냥 따랐습니다. 얼마나 힘든 처가살이일까요? 지금이야 처갓집에 꿀 발라 놓은 것처럼 자주 왔다갔다 하지만(물론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내의 입김이 세어서 그렇겠지만), 예전에는 오죽하면 처갓집과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라는 말이 생겼을까요? 야곱의 당시 삶이 동영상이 돌아가듯이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빌하는 임신을 하였고, 그 여자는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라헬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셨고, 또 그분이 내 음성을 들으셔서 나에게 아들을 낳아 주셨도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억울함을 푸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여자(빌하)가 임신을 하였고, 또 라헬의 여종 빌하가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라헬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경쟁에서 내가 내 언니와 씨름 당했으니 또한 나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그 여자는 그의 이름을 납달리(”경쟁함“)라고 불렀습니다.

 

라헬도 이제는 야곱의 의견 따위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견도 자신이 직접 판단합니다. 그녀는 믿음의 측면에서 자식 문제를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회적 관습과 사람들 앞에서 자식 없는 것으로 인한 한을 푸는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아들 낳기 경쟁에 뛰어들면서 야곱은 자식 낳는 것은 남의 일 같아 보입니다. 야곱은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그날 지정되거나 예약된 장막으로 가서 누워 자고, 그리고 아침에 일찍 양떼를 몰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작가 미상, 라헬이 야곱에게 빌하를 아내로 줌(오른쪽 빌하), 1550-1570, 네덜란드 (Rachel Giving Bilhah to Jacob from The Story of Jacob series, 1550-75, Netherlandish, Brussels. Artist unknown. Fro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작가 미상, 라헬과 빌하 그리고 단, 1550-1577년 (Rachel and Bilhah with Dan from The Story of Jacob series, Flemish, Brussels, 1550–75)

 

갓과 아셀 - 레아의 여종 실바 (9-13)

그러자 레아는 자기가 출산이 멈춘 것을 보고, 또 자기의 여종 실바를 데려다가 또 그 여자를 야곱에게 아내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레아의 여종 실바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레아는 말했습니다. ”행운이 왔다그래서 그 여자는 그의 이름을 (”복됨“)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레아의 종 실바는 야곱에게 두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레아가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하다 이는 딸들이 나를 행복하다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아셀(“기쁨”)이라 불렀습니다.

 

야곱은 라헬이나 레아가 여종을 아내로 준다고 할 때도 거기에 대해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라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이 자식이 없을 때 20년 동안 기도한 것을 신앙 교훈으로 삼지 않았습니다(25:21). 그리고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갈로 인해 받은 훈련과 연단을 반면교사로 삼지 못했습니다. 사실 야곱이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고 싶어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미 야곱은 믿음으로 할 의지나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어도 이미 마음의 힘을 잃어버려 삶의 일상과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죽은 개와 같이 사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왼쪽) 라헬이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아내로 주다(창30:4) / (오른쪽) 레아가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아내로 주다(창30:9)

 

르우벤의 두다임(합환채, mandrake) (14-16)

그리고 루우벤이 밀을 추수할 때에 나갔고, (그리고) 들에서 두다임(mandrake)’를 발견했고, 그는 그것들을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주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루우벤이 들에 나가 합환채를 얻어와 엄마 레아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단순히 들에 나가서 걷다가 합환채를 발견하여 그것을 가져와 레아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르우벤이 4살 정도였으니 대단한 일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들에서 발견해서 가져온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다임: 맨드레이크, 합환채

 

합환채, 맨드레이크는 줄기가 짧고 잎은 담배잎처럼 넓으며, 뿌리는 당근이나 인삼처럼 생겼고 꽃은 희고 보라색으로 매우 좋은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꽃이 핀 후 5-6월경에 귤이나 오얏 정도 크기의 노란색의 향이 있는 열매를 맺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 식물을 최음제나 강장제 또는 임신촉진제로 믿고 있었는데 당시 라헬은 이를 임신 촉진제로 알고, 언니 라헬에게 살갑게 다가가 합환채를 달라고 급 공손하게 부탁을 한 것 같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청구하노라하며 조금 당연한 듯이 요청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다른 번역성경에서는 매우 공손하게 요청하는 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제발 달라는 의미로 요청합니다.

 

라헬이 레아에게 말했습니다. “제발 부탁하니 언니 (당신) 아들의 두다임을 내게 주세요.” 그러자 레아가 라헬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의 남편을 뺏아간 것이 작은 일이며, 또 내 아들의 두다임들까지도 가지려고 하느냐?”

 

그러자 라헬이 말했습니다. “그리하면, 언니, (당신) 아들의 두다임들 대신에 오늘 밤에 언니와 그로 (함께) 누우세요!”

그리고 야곱은 저녁때에 들에서부터 돌아왔고 그리고 레아는 그를 만나러 나가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들어오소서! 이는 내가 당신을 내 아들 두다임으로 참으로 지불되었기(예약되었기) 때문이라.” 그리고 그는 그날 밤에 레아와 누웠습니다.

아르놀트 호우브라켄(Arnold Houbraken, 1660-1719, 네덜란드), 1700년, 라헬이 레아에게 루우벤이 얻은 합환채(맨드레이크, 자연산 강장제)를 달라고 요청하다.

 

여기서 자매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면, 레아의 상실감이 매우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아들 여섯이나 두었음에도 야곱의 사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합환채 때문에 라헬이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야곱의 사랑을 얻는 것은 영원히 물건너 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두려움과 동시에 동생에 대한 질투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이하게 레아는 야곱을 내 남편(15: 히브리어 이쉬’)라고 부르고, 라헬은 언니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지, ”오늘밤 그이가 언니와 함께 함께 자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야곱의 잠자리에 대해서 라헬이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레아가 아무리 야곱을 내 남편이라고 하여도 결국은 야곱과의 잠자리는 라헬이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야곱과의 하룻밤 잠자리를 위해 합환채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레아는 아직도 야곱의 사랑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말하기를 내게 들어오시오.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합환채를 지불하고 고용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라면, 레아는 평소에 야곱과 함께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가정을 하나님의 긍휼과 샬롬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자기 몸 하나 겨우 건사할 정도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잇사갈, 스불룬 그리고 디나 - 레아 (17-21)

그리고 하나님은 레아를 들어주셨고, 그 여자가 임신을 하였으며, 또 그 여자는 야곱에게 다섯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레아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내 값(wages)를 주셨으니, 이는 내가 내 여종을 내 남편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아는 그의 이름을 잇사갈(“”)라고 불렀습니다.

 

또 레아는 다시 임신을 했고 여섯 번째의 아들을 야곱에게 낳았습니다. 그리고 레아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선물을 내게 주셨으니 내 남편이 이번에는 나를 높여줄 것이니 이는 내가 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아는 그의 이름을 스불론(“거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레아는 딸을 낳았고, 그 여자아이의 이름을 디나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엘로힘의 하나님의 표현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녀에게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아들을 주셨습니다. 비록 합환채라는 매개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레아와 라헬의 대화를 모두 들으시고, 또한 레아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레아의 모든 아픔을 아시고, 그녀의 삶을 살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수블론(거함)이라는 이름을 마지막으로 레아는 질투와 경쟁심을 내려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레아에게 많은 자녀를 주시고 그녀를 높여주심을 통해 야곱도 하나님께서 레아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요셉 라헬 (22-24)

그리고 하나님은 라헬을 기억하셨으며, 또 하나님은 그 여자를 들으시고, 또 그 여자의 태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라헬은 임신을 햇고 또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가. 그리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수치를 거두어 주셨도다.” 라헬은 그의 이름을 요셉(“더함”)이라고 불렀습니다.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다른 아들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시고 돌아보셨습니다. 라헬의 모든 고통을 들으시고 그 태를 여셨습니다. 결국 라헬도 결혼 후 14년이 되어서야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헬에게 요셉을 주심으로 그녀의 수치를 씻어주시고, 또한 그녀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야곱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기다리면 언젠가는 성취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탄치오 다 바랄로(이탈리아, Tanzio da Varallo, 1575-1633), 야곱과 라헬 (1625)

 

미켈란젤로, 그리스도의 조상, 야곱과 요셉 (Michelangelo, The Ancestors of Christ: Jacob, Joseph, 1512)

위 그림의 왼쪽에 야곱의 모습이 속이는 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야곱이 눈을 굴리며 남을 속이려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의 뒤에는 파리한 얼굴을 한 라헬과 요셉이 보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반짝이는 눈을 가진 레아가 아이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녀는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아 얼굴이 밝고 미소가 얼굴에 있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이치인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만족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생은 살만한 것이 된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야곱이 라반과 품삯을 정하다 (25-43)

 

품삯 협상 (25-34)

그리고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였습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말했습니다. (이때 야곱의 나이 91세에 요셉이 태어났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 그래서 내 장소로 내가 가고, 또 내 고향으로 가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위해 섬겨서 얻은 내 아내들과 내 자식들을 주셔서 또 나로 나가게 해주십시오. 이는 내가 당신을 섬겼던 내 봉사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라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이제 내가 네 앞에서 은혜를 얻는다면, 나는 신의 뜻에 따라 알게 되었는데, 또 여호와께서는 너로 인하여 내게 복을 주셨다.”(27)

그리고 라반이 말했습니다. “네 대가를 내게 정하여라. 그러면 내가 줄 것이라.”(28)

 

그리고 야곱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섬긴 것과 당신의 가축이 나와 함께 있는지를 아십니다. 내가 당신에게 있기 전에는 (재산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이 불어났으며, 또 여호와께서 당신을 내 발 앞에서(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복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언제까지 또한 내가 내 집을 위해서 일하겠습니까?”

 

그리고 라반이 말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그러자 야곱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마십시오. 다만 당신이 이 일을 나에게 해주신다면, 나는 돌아갈 것이며, 또한 당신의 가축 떼를 먹이며 또한 지킬 것입니다. 내가 오늘 당신의 모든 가축 떼를 지나가서 또 거기서 얼룩지고, 점박이 있는 모든 가축들과 또 어린 양들 중에서 모든 검은색 양들과 염소들 중에서 점박이와 얼룩진 것들을 분리할 것이니 그것이 내 대가가 될 것입니다. 또 내 정직함이 후일에 나로 대답해 줄 것이니 이는 당신이 오셔서 염소들 중에서 얼룩지고 점박이 아닌 모든 것들은 당신 앞에서 내 대가가 아니며, 또 어린 양들 중에서 모든 검은색이 아닌 것도 그것도 도둑질한 것입니다.”

 

그러자 라반이 말했습니다. “보아라! 네 말한 대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25절에서 라헬이 요셉을 낳을 때라는 시기가 표현되면서 이제 야곱은 고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내 고향 내 땅”, 새번역에서는 고향 땅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 NIV에서는 “my own homeland”, ESVNRSV에서는 “my own home and country”, KJV에서는 “mine own place, my country”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메코미 우레아르치(מְקוֹמִ֖י וּלְאַרְצִֽי)”, 내 장소(place)와 내 땅(earth, land)”이라고 표기하여 야곱이 자신이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제 라반에게 말하게 됩니다. 14년 만에, 계약이 이제 거의 종결될 시점에 야곱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곳으로 향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라반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27절에서 라반은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개역개정).”, "자네가 나를 좋아하면,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네. 주님께서 자네를 보시고 나에게 복을 주신 것을, 내가 점을 쳐 보고서 알았네(새번역)."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에 원문에는 그대로 있으라,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는 말은 없습니다. , 위에서 밑줄 친 내러티브대로 만일 이제 내가 네 앞에서 은혜를 얻는다면, 나는 신의 뜻에 따라 알게 되었는데, 또 여호와께서는 너로 인하여 내게 복을 주셨다.로 나옵니다. 라반은 야곱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신앙이 아닌 본인의 미신적 점술이나 경험에 의해 알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에서는 점을 쳐서 여호와께서 야곱을 통해 복을 주셨다고 번역합니다. 라반은 야곱이 고향으로 가겠다고 하자 그에게 퇴직금이나 성과급을 두둑히 챙겨주기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복덩어리인 야곱을 붙들어 그의 노동력을 이용할 생각으로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익을 위해 가족에게도 권모술수를 사용하는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절에서 라반은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이를 원문에서 바로 직역하면 네 대가를 나에게 정해주어라. 그러면 내가 줄 것이라.”입니다. 참 모호한 말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라반은 지금까지 두 딸을 야곱에게 주어 14년 동안 봉사하도록 하면서 그에 대한 품삯은 주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품삯을 위한 야곱의 제안이 무엇인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이면에는 그렇다면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아 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이 기억됩니다. (마태 10:16)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는 순수한 지혜(wise)가 아닌, 어떤 면에서는 교활하기까지 할 정도의 영리함(shrewd)이었습니다.

 

야곱도 무모한 제안을 합니다. 라반은 어떻게 하든지 안 주려고 하고, 야곱은 자신에게 아주 불리한 제안을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30절에서 야곱은 라반에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30)” (개역개정)

 

“제가 여기에 오기 전에는 장인 어른의 소유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이제 떼가 크게 불어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하는 수고를 보시고서, 장인 어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저의 살림을 챙겨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새번역)

 

여기에서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whereever I turned(NRSV)“, ”since my coming(KJV)“인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내 발 앞에서“, 또는 내 발에서, ”to(at) my feet”로 표기합니다. 야곱은 14년 동안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체험했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이며, 그가 손대는 무엇이건 놀랍도록 번성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가 미신적이었든, 또는 정상적인 신앙을 가졌든, 그는 하나님을 뒷배경으로 하여 과감한 배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전혀 얼토당토않게 제안을 한 것입니다.

 

라반의 꼼수 (35-36)

그리고 그날에 라반은 줄무늬가 있고 점박이 숫염소와 그 속에 흰색이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얼룩지고 점박이 모든 암염소들과 또 양들 중에서 검은 점이 있는 모든 것들을 분리하여 자기의 아들들의 손에 주었습니다. 그리고 라반은 그것들을 그와 야곱 사이 가운데 3일 길에 따로 두었고, 또 야곱은 남은 라반의 가축 떼를 쳤습니다.

 

라반은 야곱의 제안의 허점을 잘 알았습니다. 점박이나 태어날 확률만 없애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점이 있거나 검은 줄이 있는 양들은 모두 분리하여 야곱으로부터 3일 거리에 있는 곳으로 격리시키고 야곱에게는 희고 깨끗한 양들만 치도록 한 것입니다.

라반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신뢰와 믿음을 말 하였지만, 그 행동은 양아치 수준도 안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Sunday Christian의 행동입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집사요, 장로요, 목사이지만, 교회 문밖을 나오면 세상 사람과 진배없는 소위 그리스도인이 수두룩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요한복음 14:15, 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요한복음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야곱의 의지적 노력과 결과 (37-43)

그리고 야곱은 자기를 위해서 젖은 버드나무(혹은 때죽나무)와 아몬드(살구) 나무와 플라타너스(신풍나무) 가지를 가지고, 그리고 그 가지들을 벗겨서 희색을 까면서 그 가지들에 있는 흰색이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가 벗긴 가지들을 가축 떼들이 와서 물을 마시는 구유, 물통에 놓고 가축 떼들의 얼굴에 줄무늬가 잇는 것들을 두고, 또 라반의 가축 떼 중 모든 검은 것들도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속한 가축 떼를 따로 두었으며, 라반의 가축 떼에 그것들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건강한 양들이 교미할 때마다 이러하였고, 또 야곱은 가축 때 눈앞에 그 가지들을 두었고, 물통에서 그것들이 가지들 앞에서 교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축 떼가 약한 것일 때는, 그는 그것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한 것들은 라반의 것이 되었고, 건강한 것들은 야곱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재산이) 매우매우 불어났으며(increased exceedingly), 또 그에게는 많은 가축 떼와 여종들과 남종들과 낙타들과 나귀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후세페 데 리베라(이탈리아, Jusepe de Ribera, 1591-1652), 라반의 양떼와 함께 있는 야곱, 1638년경, 마드리드 세랄보 박물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 라반의 양떼 앞에 껍질 벗긴 막대를 놓는 야곱 (Jacob Laying the Peeled Rods Before the Flocks of Laban 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

 

페드로 오렌테(Pedro de Orrente, 1580-1645, 스페인), 껍질 벗긴 가지 앞의 라반의 양에게 물을 주는 야곱, 1612~1622년경 (Jacob Watering Laban's Sheep before Peeled Branches, Pedro Orrente, circa 1612–1622)

 

하란에서의 일상(1)

 

하란에서의 일상(2)

 

야곱은 라반의 보상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직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며 비합리적인 제안을 제시함으로 라반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는 라반의 흠 없는 양떼를 기르면서 온갖 인간적인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버드나무나 살구나무(아몬드 나무), 신풍나무(플라타너스) 가지를 줄무늬 띠같이 껍질을 벗겨 사용합니다. 유전적 법칙을 모르는 당시 야곱으로서는 당시 전해 내려오는 미신적 방법을 동원하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의 의지와 성실은 놀랍습니다. 그의 상식과 방법이 맞든 안 맞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합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전한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인가요?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노력을 우습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노력에 은혜를 더하여 큰 기적의 일을 벌이셨습니다. 그들이 교미할 때마다 건강한 양들에게서 점박이 양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비상적인 노력과 애씀이 하나님의 뜻과 때에 맞으면 이를 선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 언약의 말씀대로 야곱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고, 그 후손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여실 것입니다. 그러한 원대한 목적을 위해 레아와 라헬의 질투와 경쟁심도 하나님 뜻 안에서 선용하셔서 많은 자녀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주시고, 라반과의 계약을 빌미로 그를 놀랍도록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모든 조건을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나라요, 제사장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도록 많은 길을 열어놓으시고,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거기에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끝까지 하나님 나라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이 보여주신 Plan A를 선택하지 못하고, Plan B, 더 힘든 Plan C를 선택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결국은 목적지까지 가도록 우리가 선택하는 그 길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는 실패가 없으며, 하나님께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14:18), 끝까지 인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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