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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1_창세기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창세기 제28장_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꾸다

by 적아소심 2024. 6. 23.

창세기 28: 1-22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고 밧단아람(하란)으로 보내다 (1-5)

1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5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이삭은 이발지시(已發之矢: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로 되돌이키기 어렵다는 뜻)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방향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삭을 후계자로 인정하고, 다시 한번 축복하여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제 이삭도 야곱에게 가나안 현지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1-2). 왜 이삭은 이삭을 처남인 라반(야곱에게는 외삼촌)이 있는 밧단아람까지 보내어 야곱의 외사촌 중에서 결혼 대상자를 찾으라고 했을까요?

 

첫째 이유는 먼저 야곱의 형 에서의 결혼이 영적으로나 실제 삶에서 매우 좋지 않았고, 그것이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과 슬픔을 안겨준 것 같습니다. 실제로 믿음 없는 여인과 사는 것이 신앙적으로 얼마나 힘들까요? 그러잖아도 이삭과 리브가는 믿음이 없는 에서가 우상숭배하는 현지 이방 여인과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장성한 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결혼을 무르자고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다행히 야곱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서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리브가는 에서를 피하여 야곱을 오빠인 라반에게 보내고자 할 때 이삭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27:46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이는 곧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는 이유를 말하는 것인데, 그만큼 에서의 결혼에 실망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도 그런 리브가의 말에 동의를 하였기 때문에 결국 야곱을 그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삭은 하나님의 백성이 현지 가나안 족속에 동화되지 않도록 하려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동기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동기는 인종 차별적 동기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영적인 것이며, 나중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죄악된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이 명백히 금지될 것입니다(신명기 7:1-4). 미리 이 상황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삭과 리브가는 당시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숭배에 깊이 물든 죄악된 삶을 보며 깊은 문제의식을 가졌을 것입니다.

 

늙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가 차고, 이삭도 결혼할 나이가 넘어가자, 메소보다미아(하란)에서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그의 종을 보냈습니다(24:2-4). 역시 아브라함과 같이 늙어 죽음이 임박한 이삭(그러나 실제로는 이삭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았지만)은 야곱이 그의 아내를 찾도록 메소보다미아의 밧단아람(하란)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명령은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이삭은 야곱이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의 딸과 결혼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야곱은 결혼을 위해서 정작 본인이 해야 할 일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미 이삭과 리브가는 라헬과 레아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야곱의 좋은 아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거리가 멀다고 하더라도 상호 소식은 주고받은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 야곱을 떠나 보내는 리브가(?)

 

야곱이 밧담아람(하란)으로 떠날 때 나이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창세기 이야기가 몇 년 또는 몇 십년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서 야곱이 떠날 때의 나이가 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떠난 때는 70~76세 가량 됩니다. 아래 당시 야곱의 나이를 역산한 도표입니다. 1~4를 참조해 보십시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챈 사건이 이미 그들이 충분히 장성한 나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일생 비교표

 

 

에서가 다른 아내를 맞이하다 (6-9)

6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6절은 성경의 첫 번째 책이자 세상과 이스라엘 백성의 기원을 찾아가는 창세기의 더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에서의 입장에서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이후를 보게 됩니다. 야곱의 형 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야곱이 같은 동족인 밧단아람에서 아내를 찾도록 보냄을 받는다는 사실에 괴로워합니다.

 

족장 시대 이후 가족의 문제는 창세기 전체 이야기의 주요 줄거리가 됩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확대 가족 간의 관계가 모두 본문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6절에서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거나 사랑을 받을 때 발생하는 이해관계자 간의 긴장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질투와 배신감을 봅니다.

 

문맥상 이 구절은 야곱과 에서 이야기의 중요한 순간에 나옵니다. 야곱은 속임수와 교활함으로 장자 에서에게 갈 축복을 어렵게 가로챘습니다. 이로 인해 에서와의 사이에 깊은 불화와 갈등이 생겼고, 야곱은 부모에 의해 다른 곳에서 아내를 찾도록 쫓겨나다시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가나안 땅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한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이는 가계의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현지 우상숭배하는 지역 사람과의 통혼을 피하려는 믿음의 의지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행위는 하나님의 복과 관련되어 있는 깊은 상징성과 의미를 지닌 행위입니다. 당시 아브라함 이후 그들에게 복은 번영, 안전, 후손에 대한 약속을 수반했습니다. 야곱은 복을 받음으로써 선택받은 자로 구별되고, 이로 인해 야곱과 에서 사이의 긴장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나안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는 명령은 가계의 신앙의 순결과 정체성을 지키려는 소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다른 부족이나 나라와 통혼하지 않는다는 개념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지침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과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반영합니다.

 

결과적으로, 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지시한 후에, 축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에서는 가나안 여자들이 자기 부모를 힘들게 하였는지를 그제야 깨닫고, 이스마엘에게 가서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도무지 부모와 상의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고 그것이면 부모를 기쁘게 할 것이라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려면 충분히 대화해야 하고, 조언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관계성도 좋아지고, 또한 부모의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 동일합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이 정도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나중에 하나님께 근심거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세심하게 읽고 숙지하여야 합니다. 또한 그분이 하신 한 가지 말씀만 가지고 섣부르게 판단하고 결정하기보다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하여 종합적으로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여쭈어야 합니다.

 

마할랏은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스마엘의 딸이자 느바욧의 누이인 에서의 세 번째 아내였습니다. 마할랏은 에서에게는 사촌누이입니다. 에서는 가나안 여인들(그의 처음 두 아내 바스맛과 유딧의 경우처럼)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불쾌하게 한 것을 보고 이스마엘의 집에서 마할랏을 아내로 삼았습니다(28:6-9).

 

에서는 자신의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가나안 사람이 아닌 사람과의 결혼을 추구했습니다(28:6-9). 그러나 그의 부모가 에서와 마할랏의 결혼을 찬성하고 인정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마할랏은 에서에게 아들 르우엘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36:4)

 

반면 창세기 362-3절에서는 에서의 세 아내의 이름이 다르게 나옵니다. 그의 가족은 두 명의 가나안 아내, 즉 헷 족속 엘론의 딸인 아다와 오홀리바마, 그리고 세 번째 아내인 이스마엘의 딸 바스맛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창세기 26장과 28장에 언급된 세 아내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창세기 36장에 언급된 아내와 동일시합니다.

바스맛(26:34~35) = 아다(36:2,3), 헷 족속 엘론의 딸.

유딧(26:34-35) = 오홀리바마(36:2,3), 역시 가나안 사람;

마할랏(28:9) = 바스맛(36:2,3), 에서의 사촌이자 세 번째 부인, 이스마엘의 딸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꾸다 (10-22)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브엘세바에서 베델까지 그리고 밧담아람(하란)까지의 여정

 

브벨세바에서 밧단아람(하란)까지의 거리는 900km 정도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축복을 받은 후 하란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3-4일을 걸어서 90km 덜어진 베델에 이르러 피곤하여 야외에서 잠을 청하였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길을 떠나는 야곱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가 자청한 모든 일들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고,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지금 고향을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창세기 35장을 미리 예고한다면 야곱은 하란에서 돌아온 후 바로 베델로 가지 않고 숙곳으로 갔다가 다시 세겜으로 가서 10여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란에서 돌아왔지만,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지도 않았고, 또한 처음 서원하였던 베델로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독립적이고, 하나님을 잘 의지하지 않는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책망하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꿈을 통해 천사들이 사라리를 통해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윌리암 블레이크, 야곱의 꿈

 

야코포 마리에스키(1711-1794), 야곱의 꿈 [Jacopo Marieschi(1711–1794), Jacob's dream]

 

후세페 데 리베라(Jusepe de Ribera, 1591–1652), 야곱의 꿈, 1639, Museo del Prado, Madrid

 

아르트 드 겔더, 야곱의 꿈 [Jacob's Dream by Aert de Gelder, 1710-1715]

 

야곱은 긴 여행을 떠나기전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착잡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을 통해 미리 확증된 하나님과의 언약(17:19-21)을 받았지만 마음의 확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브엘세바를 떠난 날부터 매일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그가 그토록 얻고자 했던 장자권에 따르는 책임과 그 대가를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어떠한 하나님의 어떤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는 뜨거운 광야의 뙤약볕을 걸으며 하나님께 이런 답답한 마음을 간구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벧엘까지 가서야 마침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직접 야곱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키시며 그의 축복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잠을 자면서 옆구리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는 사다리 즉 계단을 봅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이고, 하늘과 땅 사이에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계단 위에는 하나님의 사자(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인간의 기도와 그들의 궁핍과 슬픔, 그들의 믿음과 희망과 신뢰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께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움과 위로와 축복을 내려줍니다. 사다리 꼭대기에는 하나님(엘로힘”)께서 친히 서 계십니다. 신성이 우연히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이 거기에 영구적인 지위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부터 약속한 모든 것을 야곱에게 확인시켜 주시고, 그분의 끊임없는 임재와 보호를 보장해 주십니다.

 

꿈의 세 단계 각각은 '보라'라는 단어로 강조되었으며, 이것이 세 번째 반복에서 최고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언약의 하나님(여호와)이 하늘과 땅 두 길 사이의 길머리에 서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28:14).

 

그 사다리로 연결될 길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역시 이 사다리로 상징된 길이요(14:6), 물질 세계와 영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이십니다(딤전 2:5).

  •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1절에서 갈릴리에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며 그에게 엄청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 요한복음 1: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그리스도의 사다리는 그분이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사다리입니다. 그분의 인성으로는 땅의 발이요, 그분의 신성한 성품으로는 하늘 꼭대기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교통은 이 사다리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총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고 우리가 드리는 모든 송영과 찬송과 영광은 그분께 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가 그와 함께 거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입니다. 우리가 이 사닥다리 외에는 하나님 나라에 갈 길이 없습니다. 천사들이 우리에게 하는 도움과 사명은 모두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께로 인한 것입니다(1:20).

해롤드 코핑, 야곱의 서원 [Jacob's Vow by Harold Copping, c 1910]

 

야곱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항상 자기 옆에 계신다는 것을 보고 듣고 큰 믿음의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돌배게로 제단을 쌓고 서원한 것을 보면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서원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 서원을 이룰 때까지 그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제임스 스미덤(1821-1889), 벧엘에서의 야곱, 버밍햄 박물관 [James Smetham (1821–1889). Jacob at Bethel, Birmingham Museums Trust]

 

다시 벧엘에서 하란으로 향하는 야곱의 발걸음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이제 이 여정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는 믿음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말로만 들었던 창조주 하나님, 온 세계를 통치하시며, 아브라함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보고 그 약속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을까요? 장막을 떠날 때는 자신의 한번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생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려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베델에 이르는 90km 거리를 가면서 야곱의 발길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비전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앞으로의 길은 더 이상 무겁고 답답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엄청난 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속임수 즉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가 얻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그릇으로서의 책임감과 믿음을 가질 때까지 그의 인생 여정을 돌보시고 그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그가 비록 인간적인 수단과 전략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내면을 이루어가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축복을 쟁취했지만, 이제 스스로 그 축복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연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책망하고, 그의 잘못을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선택한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변함없이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플랜 A를 기다리지 못하고 야곱은 플랜 B를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거기에서도 야곱의 선택을 인정하시고, 그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또 새로운 길을 여시고 그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인생 여정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변화무쌍하고 굴곡이 많은 우리의 삶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항상 나의 고집으로 엇갈리지만 하나님은 늘 우리 편에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결정은 존중해 주시고, 그 길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또한 하나님 나라를 주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플랜 A가 우리의 고집으로 플랜 B가 되고, 또 다시 Plan C가 되어도 우리 주님은 끝까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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