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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1_창세기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창세기 제 25장_아브라함의 죽음, 이스마엘의 후예, 에서와 야곱

by 적아소심 2024. 2. 11.

창세기 25:1-34

 

아브라함이 죽다 (1-11)

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5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9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의 가계도

아브라함의 가계도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포함하여 총 8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라 1, 하갈 1, 그두라 6), 그리고 21명의 손자를 두었습니다. (이삭 2, 아스마엘 12, 욕산 2, 미디안 5) 그리고 그 중에서 서자 욕산(Jokshan)의 아들인 드단(Dedan)에게서 당대의 강력한 3개의 민족이 형성되었습니다(앗수르 족속 Asshurim, 르두시 족속 Letushim, 르움미 족속 Leummin)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통해 낳은 아들은 6명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시므란(Zimran) - "영양(antelope)" 또는 "사냥"이라는 의미
  2. 욕산(Jokshan) - 스바(Sheba)와 드단(Dedan)의 아버지 – 스바와 드단을 낳음
  3. 므단(Medan) - 모디아나 족속의 효시(?)
  4. 미디안(Median) - "다툼"이라는 의미, 강력한 민족을 이루어, 이스라엘을 괴롭힘 – 5명의 아들을 낳음
  5. 이스박(Ishbak) - "포기하다" 또는 "풀어주다"의 의미
  6. 수아(Shuah) - 북에돔, 이두매 북쪽의 민족(?) - 욥의 친구 빌닷의 고향이기도 함(욥2:11)

1609년 베니스 하기다(Venice Haggadah)의 한 페이지의 일부입니다. 아브라함의 세 부인과 그의 아들들을 보여줍니다. 예일 대학 도서관 소장의 위 이미지는 아브라함과 세 여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중앙에는 사라(Sarah)와 이삭(Isaac)이 있고 왼쪽에는 하갈(Hagar)과 이스마엘(Ishmael)이 있고 오른쪽에는 그두라(Kedurah)와 그 아이들이 있습니다.

1절에서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고 하여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두라(히브리어 קְטוּרָה; Kedurah)'는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내'입니다. 25장의 내용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 이후 그두라를 후처로 맞이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두라(Kedurah) 사이에는 여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그두라는 노아의 아들 야벳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이삭이 37세에 사라가 죽고, 40세에 결혼을 한 것을 기준으로 할 때 당시 근동 지역에는 노아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아의 아들 셈이 532세로 살아 있었고, 에벨도 367세로 정정한 나이였습니다. 아래 표에서 벨렉 시대에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인간의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 참조) 셈의 족보가 아래와 같이 이어진 것처럼 역시 야벳과 함의 족보도 계속 이어져 갔을 것입니다.

셈에서 요셉까지의 족보 연대

아브라함이 젊을 때에는 노아도 살아 있었습니다. 노아가 894세일 때, 아브라함이 태어났고, 노아가 950세의 나이로 죽을 때 아브라함은 56세였습니다. 당시 역사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던 바벨탑 사건으로 벨렉이 일찍 죽을 때에 아브라함은 46세였습니다. 창세기의 족보를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묵상하면 당시의 장대한 시대 상황을 어느 정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노아에서 이삭까지의 족보 연대

그두라에 대해서는 창세기 25장 및 역대상 1:32-33절 족보를 통해서 2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5장에서 그두라는 아브라함의 '후처(a wife)'로 언급됩니다(히브리어: אִשָּה 잇샤 - 여자, 아내). 그리고 역대상 1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소실(concubine; 히브리어: פִּילֶגֶשׁ 필게쉬 )'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1절은 "와요쎄프 아브라함 와이카흐 잇샤(וַיֹּ֧סֶף אַבְרָהָ֛ם וַיִּקַּ֥ח אִשָּׁ֖ה)"로 읽는데, 이는 곧 "그리고 더하여(to add) 아브라함은 취하였다 아내를"입니다. 영어성경 RSV에서는 "Abraham took another wife, whose name was Keturah."로 번역했고, KJV에서는 "Then again Abraham took a wife, and her name was Keturah."로 번역하였습니다. , 아브라함이 정식으로 그두라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통해서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강력한 민족을 형성하였습니다. 그중에 특히 미디안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괴롭힌 민족이었습니다. (참조; 22:4-7; 6:1-10), 또한 '수아'는 북에돔 곧 이두매의 북쪽 지역에 거주하는 족속의 조상으로 추정되며, 수아 족속의 거주지는 욥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의 고향이기도 합니다(2:11).

1893년 세계 콜롬비아 박람회에서 시리아 베두인 여성(Syrian Bedouin woman)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모든 것을 상속해 주고, 한편 그두라의 아들들에게도 새산을 주어 동쪽으로 보내어 살도록 한 것은 장차 발생할 수 있는 재산상속에 관한 분쟁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이는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약속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습니다(15:4; 17:191).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다른 자식들도 잊지 않으시고 모두 복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약속의 씨 이삭을 보호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오, 한번 약속하신 말씀은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기억하시고 이루십니다.

바우어 성경 145의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죽음, 호에트(Hoet)의 작품, file created by Medhurst-Kossuth-Vere(메드허스트-코수트-베레)

7-11절에서 아브라함의 죽음과 이스마엘과 이삭에 의해 장사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히브리어에서 7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이것들은 아브라함이 살았던 삶의 년()들의 날()들이라"이고 영어성경 KJV에서는 "And these are the days of the years of Abraham's life which he lived, an hundred threescore and fifteen years.", RSV 성경은 "These are the days of the years of Abraham’s life, a hundred and seventy-five years."로 번역하였습니다.

개역개정 우리말 성경에서는 7절을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고 번역을 하여 '향년'이라는 말로 단축하여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와 그 안에 담긴 영적 비밀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습니다.

 

'향년'이라 함은 한평생의 세월을 하나로 퉁쳐서 말하는 것이고, "그가 살았던 삶의 세월들의 날들"은 하루하루 살았던 날들이 모여서 그의 전 인생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적 사고로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 총체적인 인생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러한 히브리적 개념은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사상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56:8

  •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개역개정)
  • Thou hast kept count of my tossings; put thou my tears in thy bottle! Are they not in thy book? (RSV)
  • Thou tellest my wanderings: put thou my tears into thy bottle: are they not in thy book? (KJV)

시편 90:12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개역개정)
  • So teach us to number our days that we may get a heart of wisdom. (RSV)
  • So teach us to number our days, that we may apply our hearts unto wisdom. (KJV)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175세까지 수명을 누리고 열조에 돌아갔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막벨라 굴에 장사합니다.

아브라함의 사후에도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으시고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11a). 그리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서 거하게 됩니다(11b).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해 긴 세월 동안 섬세하게 babysitting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삶이 다할 때까지 지키시고 이제 다시 이삭을 향해서 그 약속의 말씀을 실행하십니다.

<참조: 아브라함의 여정 : 11:27~25:11>

 

이스마엘의 후예 (12-18)

12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15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16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17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18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이름 의미
느바욧(Nebajoth) 높은
게달(Kedar) 검은 피부 (to be dark)
앗브엘(Adbeel) 하나님의 기적
밉삼(Mibsam) 향기로운 냄새(balsom)
미스마(Mishma) 듣다(hear)
두마(Dumah) 침묵(silence)
맛사(Massa) (Burden)
하닷(Hadar) 날카로움 (창쓰는 민족)
데마(Tema) 광야, 사막
여둘(Jetur) 담장 (용맹하기로 유명)
나비스(Naphish) 호흡하다, 소생하다
게드마(Kedemah) 동쪽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다 (19-26)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벤자민 웨스트(1738-1820), 에서와 야곱의 출생 <Benjamin West (1738-1820), Esau and Jacob Presented to Isaac> - 우편엽서 앞면
장 드 만데빌, 에서와 야곱의 탄생, 1360-1370년, 게티 박물관 <Jean de Mandeville, The Birth of Esau and Jacob, 1360-1370, Getty Museum>
프랑수아 매터(Fran&ccedil;ois Maitre), 1475-1480년경, 에서와 야곱의 탄생, 프랑수아 매터는 1462년과 1480년 사이에 파리에서 활동한 익명의 예술 거장이었다고 함
얀 빅터스(Jan Victors; 1619&ndash;1679, 네덜란드 Golden Age 성서에 기반한 성화를 많이 그린 화가), 에서 및 야곱과 함께 있는 이삭과 리브가, 1652년

19절에서 26절까지는 에서와 야곱의 출생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19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계보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삭은 브두엘의 딸 리브가와 40세에 결혼합니다(20). 성경에서 여인의 출신성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흔치 않습니다. 그만큼 리브가의 출신 성분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 중요했음을 의미합니다.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라는 출신 배경으로 제시된 '밧단 아람'은 '아람의 들'이라는 뜻으로(12:12),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머물렀던 하단, 즉 메소포타미아 북서부 지역을 가리킵니다(29:4). 그리고 아람 족속은 셈의 다섯째 아들인 아람의 후손을 가리킵니다(10:2). 당시 이삭이 결혼할 당시 40세 때에는 여전히 셈(532), 아르박삿(432), 셀라(397), 에벨(367)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족보상으로 볼 때(아래 그림 참조),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은 나이 차이가 있지만 이삭에게는 사촌 형이고, 이삭은 리브가에게 5촌 당숙이 되는 셈입니다. 5촌이면 옛날 같으면 아주 가까운 친척입니다.

데라의 가계도

그러나 이삭과 리브가도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20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합니다. 이삭은 잉태하지 못하는 리브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21a). 다행히 이삭과 리브가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달리 아내인 리브가를 끝까지 사랑하며 기다립니다. 리브가도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삭의 간구들 들으시고 리브가를 잉태케 하십니다(21b).

 

그러나 리브가의 태 속에 있는 두 아이가 벌써부터 치열한 싸움을 벌입니다(22a). 리브가가 이에 대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두 아이의 미래를 예언해 주십니다(23). 그 내용은 두 민족이 리브가의 태중에 있으며(23a),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을 말씀하십니다(23b). 그리고 리브가는 무사히 두 아들을 출산하는데, 전신이 붉고 털이 많은 에서가 먼저 나오고(25), 후에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옵니다(26a). 이때 이삭의 나이 60세였습니다. 아버지와 거의 맞먹는 20년이란 세월을 아들 하나를 위해 줄기차게 기도한 것입니다.

 

에서(Esau)는 '털이 많은', '거친'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에서는 털이 많은 그의 신체의 특징에 따라 지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7:11).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이 뜻하는 대로 잡목이 우거진 광야를 누비는 사냥꾼으로서 거칠고 호방한 삶을 살았습니다(27).

 

한편,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뒤에 있다', '뒤에서 오다', '배후(49:19)', '맨 끝부분(8:13)'이란 뜻의 '아카브(עָקַב)'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뒤를 쫓는 자(follower at the heel)', '발뒤꿈치를 잡은 자(heel catcher)'란 의미입니다. 이는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그의 독특한 출생 장면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야곱'이란 이름은 단순히 그의 출생과 연관된 이름 이상의 의미로 교활하고 집요하며 경쟁심이 강한 그의 성격과 기질을 반영해 주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이러한 부정적인 품성은 거칠고 험한 인생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깎이고 깎여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의 내면으로 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란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지어주셨습니다(32:28). 그리고 130세가 되어서야 그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과 베냐민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었고, 애굽의 바로왕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 창세기 49: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고 끝까지 견딜 때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결점 많고 모난 사람일지라도 결국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하게 하십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다 (27-34)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게랄드 호에트(Gerard Hoet, 1648-1733),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다
헨드릭 테르 브루겐(Hendrick ter Brugghen), 장자권을 파는 에서, 1627년
마티아스 스톰(Matthias Stom),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다
Payne, A.H. und G. Honthorst, Jacob & Esau, 발행일:1850 (금속판화)
제임스 티소(James Tisso), 팥죽 한 그릇, 1896-1902

27절에서 에서와 야곱의 삶이 아주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여기서 '장성하매'는 히브리어로 '와이이그델루(וַֽיִּגְדְּלוּ֙)', 와우 연속 미완료시제가 사용되어 직역하면 '그러면서 그들은 자라갔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한 사항없이 에서와 야곱이 자라고 있는 것만을 언급한 것은 에서와 야곱의 태어날 때부터의 서로 다른 품성대로 지속적으로 각자의 방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태어날 때부터의 성품 그대로 계속 성장했다면 에서와 야곱은 서로 맞지 않아 갈등이 많았을 것입니다. 에서가 익숙한 사냥꾼이라는 말은 사냥을 아주 잘 알았다는 것이며, 아주 사냥에 있어서 전문가 이상의 탁월한 실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에서는 들사람으로서 광활한 대지 또는 숲에서 사냥을 하면서 호쾌한 기상을 뽐내며 마음껏 살았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조용한'은 히브리어로 '(תָּ֔ם)'으로 '흠없는(blameless)', '완전한(complete, perfect)', '정직한(integrity)', '화평한(peaceful)'이란 의미입니다. 영어성경 RSV에서는 'quiet'KJV에서는 'plain'으로 번역하였고, 개역성경에서는 '조용한'으로, 표준새번역에서는 '차분한'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야곱을 가리켜 '경건한 사람(Luther)', '의로운 사람(Kalisch)', '목자로서 흠이 없는 사람(Knobel)', '온화하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사람((Rosenmüller)'으로 보기도 합니다(주석참조). 야곱은 조용히 집에 머물면서 부모 곁에 있기를 기뻐했습니다. 특히 장막에 '거주하니'는 분사형으로 동작이 계속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야곱이 주로 장막 안에서의 생활을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8절에서는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를 히브리어 성경에서 바로 직역하면 "그리고 이삭은 그를 사랑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입 안에 사냥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자주 사냥한 고기를 가져다 주었고,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아주 즐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삭은 사냥고기를 입에 물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자신과 다르게 남자답고 호쾌한 에서의 삶을 맘에 들어했을 것입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고기 맛까지 중독되어 이삭은 아곱을 택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기억에서 멀어졌을 것입니다.

 

반면 모친 리브가는 밖으로만 나다니고 씩씩하지만 거친 에서보다는 차분하고 조용하며 가정적인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였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과 리브가의 따로따로 각 아들에 대한 편애는 장차 두 아들의 치명적인 불화를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을 때였습니다(29a).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였습니다. '심히 피곤하여'는 히브리어로 '아예프(עָיֵֽף)', '완전히 고갈된', '피곤하여 지친'이란 말로 '완전히 말라버려 식물이 자랄 수 없는 황폐한 땅'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32:2; 143:6). 본문에서 에서는 사냥감을 좇아 들판을 뛰어다니는 극심한 육체적 활동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하고 허기져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나타냅니다.

 

30절에서 에서는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고 사정하며 말하였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에서가 말한 '그 붉은 것'이라고 말한 연유로 그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에서는 에서의 긴급하고 애타는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말을 히브리어 원문 "할르이테니 나 민 하아돔 하아돔 핫제(הַלְעִיטֵ֤נִי נָא֙ מִן־ הָאָדֹ֤ם הָאָדֹם֙ הַזֶּ֔ה)"을 직역하면, "제발 그것 그 붉은 것을, 그 붉은 것을 먹게하라"가 됩니다. , 에서는 지금 너무 배고프고 탈진하여 '팥죽'이라는 요리명을 말하지 못하고 "그 붉은 것, 그 붉은 것, 그것!" 하면서 계속 급하여서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끓이고 있는 죽의 이름이 아니라 색깔만을 들먹이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만큼 그가 얼마나 허기지고 지쳐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야곱이 에서에게 팥죽을 줄테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요구합니다(31). 그러자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며 장자 명분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아주 가볍게 팔아넘겼습니다(32).

 

야곱과 에서의 거래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사실 장자의 명분은 당사자의 합의에 의해서 서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들이 아무리 합의해도 그 장자 명분은 가문의 가장에 의해서 이어지기 때문에 아버지 이삭의 결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당장 실익이 없을텐데 장자의 명분을 요구했고, 에서는 아무리 그래봤자 나중에 아버지 의사에 의해 결정될 텐데 야곱이 주장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축복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에서는 그만큼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에서는 가볍게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33b). 그리고 야곱이 준 팥죽을 먹고 밖으로 나갔습니다(34a). 그리고 마지막에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4b)“라는 멘트를 남김으로써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소홀이 여겼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스토마리오 드 마티아스(Estomario de Matthias), Esau와 Jacobo

에스토마리오의 그림은 위 헨드릭 테르 브루겐과 마티아스 스톰의 그림과 비슷한 분위기와 색조를 보입니다. 위 그림에서 에스토마리오 마티아스는 그림을 두 개의 동일한 부분으로 나누기 위해 대칭적인 접근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우리는 참으로 활기차고 거친 표정으로 표현된 장남 에서를 본 반면, 왼쪽에 위치한 둘째인 야곱은 계산적이고 교활한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 대칭 분열은 두 형제 사이의 경쟁과 갈등을 반영하는 시각적 긴장을 만듭니다. 이 그림에서 색상을 사용하는 것도 탁월합니다. Matthias는 어두운 색의 팔레트를 사용하여 장면의 극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강화합니다. 조명과 그림자 사이의 대조는 작품에 깊이와 현실감을 더하여 긴장과 신비감을 조성합니다. 가운데 있는 여인은 어머니 리브가일까요? 아니면 평생 야곱을 지켜주고 함께 하였던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일까요?

 

신약성경에서는 이런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불경건한 자(irreligious; RSV)', '신성모독한 자(profane; KJV)'이라고 하였습니다. 웬만한 세상 사람도 이렇게 하지 않는데, 에서는 아버지의 모든 축복을 물려받을 자로서, 그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 히브리서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개역개정)
  • that no one be immoral or irreligious like Esau, who sold his birthright for a single meal. (RSV)
  • Lest there be any fornicator, or profane person, as Esau, who for one morsel of meat sold his birthright. (KJV)
  • μή τις πόρνος ἢ βέβηλος ὡς Ἠσαῦ ὃς ἀντὶ βρώσεως μιᾶς ἀπέδετο τὰ πρωτοτόκια ἑαυτοῦ

우리의 명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은 자입니다. 그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명분이요, 또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 로마서 8:12-1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자녀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복인지요? 세상은 덧 없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잠시에 불과합니다.

  • 이사야 40:6-8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 이사야 2: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 청년의 시기도 순식간에 지나가고 곧 곤고한 날이 이르게 됩니다(12:1). 사람이 젊어서 실컷 자기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다가 늙어서 하나님께 돌이키면 좋을텐데 그게 말처럼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한번 마음과 머리가 굳어지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의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세상에 묶여있습니다. 이 묶임에서 풀려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해탈이라 하였고, 장자(莊子)는 현해(懸解)라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 안에서 날마다 자기를 돌아보는 자기성찰을 하지 않으면, 나이 들어 진액이 빠지는 만큼 메마르고 각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은 반복적인 일로 권태롭지만, 일생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에서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소속과 직분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일상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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