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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9_사무엘상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사무엘상 제15장_아말렉과의 전쟁과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

by 적아소심 2024. 2. 8.

사무엘상 15:1-35

 

사울이 아말렉을 치다(1-9) (20:1-9; 26:14-39; 28:15-68; 왕상13:11-34)

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5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 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1916년 J.P. 모건(1867-1943)이 구입한 라틴어, 페르시아어, 유대-페르시아어가 새겨진 구약성서 미니어처, (그림 번호 MS M. 638, fol.에서 아래쪽 부분임) “불순종한 사울”, 파리, 프랑스, ca.1244-1254 / "Saul is ordered to destroy all the Amalekites and their livestock," [page 24 verso, lower panel] The Morgan Picture Bible (c.1250)

14장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크게 물리치고, 15장에서는 아말렉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현실적으로 블레셋 및 아말렉과의 전쟁을 연달아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블레셋이 아직 살아남아 있는데, 아말렉과의 전쟁을 연이어 진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14장과 15장 사이에는 많은 세월이 흘렀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습니다. 4절에서 사울이 군사를 소집할 때 보병이 20만 명, 유다 사람이 일만 명이라고 하였는데, 사울 왕 초창기보다 군사력이 많이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4장 말미와 15장 초입 부분이 연결되면서 어린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붓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다윗이 어린 나이에 기름 부음을 받고 사울의 궁으로 들어간 후에 사울의 핍박을 받는 기간을 유추해 본다면, 사울 왕 40년 집권 기간의 중반을 넘어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왕이 된 지 20년 넘게 지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와서 아말렉을 치도록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할 때는 사무엘과 사울이 근 20여 년 동안 교류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한 이후로 왕권을 더욱 강화하면서 사무엘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욱 소원해졌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1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다시 사울에게 보내신 것은 사울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을 위한 기회를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사울은 군사를 소집하여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보병이 이십만이고 유다 사람이 일만이었습니다(4). 여기서 이스라엘의 군사와 유다 지파의 군사가 따로 계수되어 있는 것은 유다 지파가 사울 왕국에 완전히 포함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유다 지파가 들라임 근방에 거주하였음에도 적은 군사만이 참전하였다는 것은 사울 왕국과 유다 지파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괴리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사울이 왕이 된 지 오래되었어도 그 통치 범위가 온 이스라엘 12지파에 완전히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는 창세기 49:10의 야곱의 축복의 예언과 모세의 축복의 예언을 기초로 유다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와야 한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사울 왕국의 군사력은 초창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사울은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고(5),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선대한 겐 사람을 아말렉 중에서 떠나도록 하였습니다(6). 이후 사울은 하월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쳐서 왕 아각을 사로잡고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습니다(7-8). 그러나 사울과 백성들은 아각과 상태가 우량한 가축들은 살려 두고 가치 없는 것은 진멸하였습니다(9).

 

전장(戰場)은 하윌라에서 술까지로 그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하였습니다. ‘하윌라는 이스라엘의 남방 변경 지대인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곳이며, ‘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 들어간 시내 반도의 한 광야 지역입니다. , ‘은 애굽과 블레셋(팔레스타인)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일부입니다. 아무튼 하윌라에서부터 술에 이르기까지 사울은 하나님의 명을 쫓아 아말렉 족속이 거주하고 있던 전 지역을 진멸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울이 완전한 승리를 이룬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하나님께서 친히 전쟁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여기서 다시 한번 치명적인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맙니다. 사울과 백성들은 아각과 가축의 가장 좋은 것과 기름진 것, 모든 좋은 것은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하니하였습니다(9). 그리고 하찮은 것들만 진멸하였습니다. 그들이 아각을 살려둔 것은 그들의 전승을 자랑하고 기념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좋은 가축들을 남긴 것은 죽이기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들의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짐승이 무슨 죄가 있을까? 포동포동하고 기름진 가축들을 전리품으로 가져가면 엄청난 재산 증식이 되는데 얼마나 아까운 생각이 들었을까요?

 

여기서 저자는 9절에서 '사울과 백성'을 주어로 하여 공동 범죄임을 부각시켰습니다. 나중에 사울이 변명할 때 모든 책임을 백성들에게 돌리는 쫄보 행태를 보이지만(21), 이미 사무엘은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의 고별 성교에서 왕과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 것을 경고했습니다(12:15). 사울은 사울과 백성들이 서로 좋은 게 좋다고 하면서 서로 의지하다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배신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왕을 의지하고, 왕은 하나님 대신 백성들의 군사력을 의지하여 결국 공동으로 여호와를 버리게 될 것을 보게 된 것입닏. 그리고 그 결과가 본 장에서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왕정을 택한 동기와 결과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참고: 아말렉 족속에 대하여>

15장에서 언급된 아말렉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적대적 민족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후손들입니다(36:12; 역대상1:36; 13:29). 창세기 36:12에 의하면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인 엘리바스가 첩 딤나를 통해 얻은 아들입니다. 딤나는 호리족이며, 로단의 누이입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들의 족장들 중에서 아말렉의 족장으로 묘사되는데, 그로부터 아말렉이 자신의 이름을 딴 족속과 영토를 다스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네게브 강에 거주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남부의 농경지대 가장자리를 따라 유목생활을 하거나 반 유목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아마도 이 부족 집단이 고대 이스라엘의 초원 지역과 가데스 지역(14:7)과 연관된 곳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아말렉의 기원>

아말렉 사람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창세기 14에서 발견되는데, 창세기 14장에서는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과 그의 동맹들이 이삭이 태어나기 전 아브라함의 때에 전쟁을 벌인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그돌라오멜은 아말렉 사람, 세일 산의 호리 족속, 아모리 사람 등의 영토를 정복했습니다.

 

반면에 창세기 36장에서는 아말렉 자신이 에서의 손자로 그돌라오멜 사건이 있은 지 4대 후에 태어난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아말렉 사람들은 에서의 첫째 아들 엘리바스의 자손인 에돔 족속 중 하나가 됩니다. 아말렉의 어머니는 에돔의 왕족인 딤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적으로 나타난 아말렉>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서야 아말렉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가나안 쪽으로 인도하고 있을 때, 르비딤에서 갑자기 아말렉 사람들이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합니다. 자기들의 영역을 침입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모세는 아직 젊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으로 세웁니다. 모세가 근처 언덕에 올라 전투를 지켜보고, 모세가 팔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시소와 같은 전쟁이 계속됩니다. 결국 아론과 훌은 늙은 모세가 피곤하여 팔을 내리지 않도록 옆에서 모세의 손을 들어주어 결국은 여호수아 군대가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사람들의 심판을 선포하시며 모세에게 명하십니다.

  • 출애굽기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이 사건은 출애굽기가 시작되는 무렵에 일어나는데, 우리는 이후 거의 40년이 지나서야 아말렉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약속의 땅 앞에 도착하여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행위를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신명기 25:17-1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후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준비하기 위해 요단강 동쪽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곳에서 메소보다미아에서 온 유명한 예언자 발람이 모압왕 발락에게 고용되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이스라엘의 패배를 기도하도록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발람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람은 아말렉 자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합니다.

  • 민수기 24:20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아말렉은 민족들의 으뜸이나 그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하고

<사사기 시대의 아말렉>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이방 민족을 상대로 승리에서 승리로 진군하기 때문에 여호수아에는 아말렉 족속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에는 그들이 몇 군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산간지대"의 동쪽 지역의 족속으로 묘사됩니다(14:45). 그들은 모압의 왕 에글론과 연합하여 여리고를 재탈환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18년 동안 모압의 왕 에글론을 섬기게 됩니다.

  • 사사기 3:13-14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을 점령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재미있는 것은 드보라의 노래(5:14)에서 가나안 왕 야빈에 대항하는 드보라의 군사작전에 가담한 에브라임이 아말렉에 뿌리 박힌자들이라고 언급한 것입니다.

  • 사사기 5: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반면에 사사 기드온은 이스라엘 땅을 급습하여 자신들의 농작물을 노략질한 아말렉과 미디안 사람들과 그 밖의 동쪽 이민족들 영토를 정복하는 데 공을 세웁니다(사사기 6).

하윌라와 술 지역

<사울과 다윗 시대의 아말렉>

그러나 모세가 일찍이 아말렉 사람들을 상대로 예언된 멸망을 마침내 성취하거나 혹은 거의 성취한 사람은 사울과 다윗 왕들일 것입니다. 사울은 용맹하게 싸워 아말렉 사람들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약탈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냈습니다(삼상14:48). 이후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삼상15)

  • 사무엘상 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은 아말렉 사람 가운데 사는 겐 사람들에게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서 그는 아말렉 사람을 하윌라에서 이집트 동쪽 까지 공격했습니다. 그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산 채로 잡았고, 그의 모든 백성을 칼로 완전히 진멸했습니다(삼상15:7-8). 그러나 이제 노구를 이끌어 전장터로 온 사무엘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울의 불순종을 크게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아말렉 왕을 포로로 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축 중 가장 좋은 것만 아껴 남긴 것에 대해 분노하시고 사울을 영원히 버리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를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공동으로 불순종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버린 것입니다. 이에 사무엘은 스스로 아말렉 왕 아각을 죽여서 아말렉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종결했습니다(삼상15:33).

 

그러나 아말렉 족속에 대한 진멸은 생각보다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재위의 후반에, 다윗은 블레셋 왕 아기스를 섬기던 중에, 아말렉을 노략질합니다. 다윗은 블레셋 왕 아기스의 신하로서, 아말렉 사람의 성읍들을 습격하여, 그 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재산을 노략질하여 아기스와 나누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와 함께 출정하는 동안, 아말렉 사람들은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글락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그의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을 비롯한 그의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에게 속한 부상 당한 이집트 노예를 만나 그를 아말렉 사람의 진영으로 인도합니다. 다윗의 군대는 아말렉 사람들을 공격하여 다윗의 아내들을 포함한 포로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합니다. 낙타를 타고 도망가는 청년 400명을 제외한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죽입니다. 지글락으로 돌아온 다윗은 사울 왕을 직접 죽였다고 주장하는 아말렉 사람으로부터 사울의 죽음 소식을 듣습니다. 다윗은 그 아말렉 사람을 즉시 처형했습니다(삼하 1). 삼하 8:12절에서 다윗은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들을 여호와께 드렸다고 하는데, 아말렉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였다고 더 전해지지만(삼하8:13), 이들 중에 아말렉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의 아말렉>

아말렉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원전 8세기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다스릴 때까지 더 이상 언급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히스기야 왕 때에 가서 시므온 자손 500명이 세일산에 피신하여 살아남은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거기에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 역대상 4:41-43 이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이 유다 왕 히스기야 때에 가서 그들의 장막을 쳐서 무찌르고 거기에 있는 모우님 사람을 쳐서 진멸하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살고 있으니 이는 그들의 양 떼를 먹일 목장이 거기에 있음이며, 또 시므온 자손 중에 오백 명이 이시의 아들 블라댜와 느아랴와 르바야와 웃시엘을 두목으로 삼고 세일 산으로 가서, 피신하여 살아남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고 있더라

구약성경에 의하면 아말렉과 이스마엘 족속이 거주하는 지역이 거의 비슷합니다.

25:18 그 자손들은 하윌라(Havilah)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Shur)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삼상 15:7 사울이 하윌라(Havilah)에서부터 애굽 앞 술(Shur)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삼상 27: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오늘날 아말렉 족속에 대한 관점>

족보상 아랍인들은 아말렉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랍-이스라엘 분쟁 이전에 일부 유대인들은 아말렉을 로마 제국과 중세 기독교인들과 연관시켰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아랍인들을 아말렉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또한 아랍인들이 아말렉의 "전형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비난합니다.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200명의 랍비들로부터 "우리 세대의 아말렉이자 히틀러"라고 불렸습니다. 구시 에무님(Gush Emunim : 요르단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 골란 고원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기 위해 헌신한 이스라엘의 초국가주의 정통 유대교 우파 근본주의자) 운동의 많은 사람들은 아랍인들을 "오늘날의 아말렉"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말렉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말렉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정착하는 것을 반대하였기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현재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그 지역의 소유주로 산 것이 아니라 침략자들 밑에서 거류민처럼 살아왔습니다)

 

2014년 가자 전쟁 당시 대표적인 예시바(yeshivot: 주로 탈무드와 할라차-유대인의 율법-라브비아 문학 연구에 중점을 둔 전통적인 유대인 교육 기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고대 아말렉과 블레셋의 후손으로 지목했습니다.

 

또한 2023년 가자 분쟁 당시 베냐민 네타냐후는 기자회견을 통해서 이스라엘 정부가 "세상에서 이 악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헌신했다"고 말했고,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말렉이 여러분에게 한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합니다."라고 말하며 구약성서 신명기 25:17절을 언급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아말렉 자손의 전투(출애굽기 17:8-13)", 1728 피규어 드 라 성경의 삽화; 게라르드 회트(Gerard Hoet, 1648&ndash;1733) 등이 삽화를 그리고 헤이그에서 P. de Hondt가 출판함. 이미지 제공 오클라호마 대학 도서관의 비젤 성경 모음집 <"The Battle Between the Israelites and Amalekites (as in Exodus 17:8-13)", Illustration from the 1728 Figures de la Bible; illustrated by Gerard Hoet (1648-1733) and others, and published by P. de Hondt in The Hague; image courtesy Bizzell Bible Collection, University of Oklahoma Libraries>

위 그림은 출애굽기 17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출애굽 후 르비딤에서 여호수아를 선봉장으로 한 이스라엘과 아말렉 이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좌측 상단 산 위에서 모세가 손을 들고 있고, 양쪽에 아론과 훌이 손을 받쳐 들어주고 있습니다.

아말렉과 싸우는 여호수아의 모습을 그린 필립 메드허스트 컬렉션 일러스트 (출애굽기 17장) <Illustration from Phillip Medhurst Collection depicting Joshua fighting Amalek (Exodus 17)>
파우벨스 카스텔스(1625-1677, 벨기에 화가) 아말렉족과의 전투 <Pauwels Casteels(1625&ndash;1677), Battle with the Amalekites, between 1649 and 1677>
위 파우벨스 카스텔스의 그림에서 오를쪽 상단 나뭇잎 사이로 조그맣게 보이는 성 아래로 팔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모세와 양 옆에서 팔을 받쳐주고 있는 아론과 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관계는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당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결말을 짓지 못할 때 그 결과는 후손 대대로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됩니다. 세상 역사(役事)나 영적인 삶에서나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채근담(菜根譚) 191수에는 "쉽게 이룬 수양(修養)은 수양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쉽게 이룬 것은 쉽게 무너지고, 삶의 수양은 진중하고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磨礪者 當如百煉之金. 急就者 非邃養. (마려자 당여백련지금. 급취자 비수양)

施爲者 宜似千鈞之弩. 輕發者 無宏功. (시위자 의사천균지노. 경발자 무굉공)

수양은 쇠를 백 번 단련하듯 하라. 손쉽게 이룬 것은 깊은 수양이 아니다.

실행은 마땅히 무거운 쇠뇌와 같이 하라. 가볍게 쏘는 자는 큰 공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을 대충 듣고 대충 순종하면 결국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전혀 다른 길로 가버립니다. 그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길입니다. 천리호리(千里毫釐)라는 말로 경계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으로 진중하게 묵상하고 그 말씀을 무겁게 생각하여 실행에 힘써야 합니다.

  • 딤후 2:15 너는 하나님 말씀을 옳게 분별(分別)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 딤후 2:15 Σπούδασον σεαυτὸν δόκιμον παραστῆσαι τῷ Θεῷ ἐργάτην ἀνεπαίσχυντον ὀρθοτομοῦντα τὸν λόγον τῆς ἀληθείας

헬라어 성경을 직역하면,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어서(분별하여), 부끄럽게 되지 않는 일꾼으로, 너 자신을 인정된 자로 하나님께 드리는데 열심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KJV 성경이 Study로 번역한 것을 절대시하여 '공부하라'는 말로 해석을 하는데, ‘힘쓰라는 말로 해석해야 문장의 의미에 더 합치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을 인정된 자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공부하라"가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공부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배울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자신을 성찰하고 행할 때에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시다 (10-33)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의 변명>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모건 그림성경 25p, 1250년 <[page 25 recto] The Morgan Picture Bible (c. 1250)>
위 모건 그림성경 p25의 상단 그림,&nbsp; 좌측에서는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나타나 사울의 불순종에 대해 말씀하시며 그를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심. 우측 그림에서는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고 떠나려고 할 때 사울이 사무엘을 붙잡다가 겉옷이 찢어지는 장면을 묘사함(삼상15:10-11)
한스 홀빈 더 영(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498-1543), 사울을 책망하는 사무엘, 1530, 바젤 소재 쿤스트 박물관 <Hans Holbein the Younger(1497/1498-1543), Samuel Cursing Saul, 1530, Kunstmuseum Basel>

위 그림은 바젤 시청 의회 회의실에 남아 있는 벽화 중 몇 가지입니다. 홀바인은 1520년대 고전적인 주제를 그리며 벽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영국을 방문하고 돌아온(1526-28) 이후, 그는 그 일을 다시 시작하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당국의 새로운 종교개혁 교리와 일치하는 구약성경 주제에 기초한 벽화를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이 벽화들은 홀바인이 진행한 여러 대규모 프로젝트 중 하나였으며, 현재는 몇 개의 조각과 스케치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 디자인은 사울 왕이 사무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아말렉 왕을 포로로 잡아 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결과, 사울은 선지자 사울로부터 책망을 받았고 그의 왕국을 잃게 되었습니다. 벽화들은 의원들에게 현명하고 경건한 국가(정부)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뮐러, 414쪽)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눈가림으로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 핑계 대는 데 급급합니다. 그러나 사울이 잊고 있는 것은 죄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 자신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눈은 의식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눈을 피하는 데만 급급하였습니다.

 

15절을 보면 사울은 모든 일의 주체를 '무리가', '백성이'라고 함으로써 자기의 책임은 회피하고 백성들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20-21절에서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려고 했는데, '다만 백성이' 자기들 맘대로 하였다고 핑계를 댑니다. 참으로 참된 지도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무엘과 사람들 눈치나 보는 쫄보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4, 19, 24절에서는 '소리'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양의 소리, 소의 소리, 여호와의 목소리, 백성들의 목소리), 히브리 성경에서는 '(קוֹל)'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 사울과 백성들은 '양의 소리', '소의 소리'는 들었지만 '여호와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특히 사울은 '여호와의 목소리'와 '백성들의 목소리' 중에서 '여호와의 목소리'보다 '백성들의 목소리'를 더 두려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보여준 겸손함(10:22)을 잃고 백성들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치명적인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22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말합니다.

  •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는 번제물과 제물들보다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은 이 말씀을 통해 사울의 변명에 대해 정면으로 정곡을 찔렀습니다. 이 말씀은 번제와 다른 제사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제사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습니다.

  • 마가복음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들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여정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 이사야 28: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 예레미야 7: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사울의 사무엘에 대한 간청 (24-33)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율리우스 쉬노르 폰 카롤스펠드,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 <God rejects Saul, Old Testament, by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율리우스 쉬노르 폰 카롤스펠드의 그림을 목판화로 제작한 작품 (삼상15:26-28절 배경)
존 싱글턴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1738-1815; 미국), 사울을 책망하는 사무엘(Saul Reproved by Samuel, 1798)
모건 그림성경 25p 하단 그림, 1250년; 왼쪽에는 사울에게 사로잡혀 발은 쇠사슬로, 손은 묶인 채로 포로로 잡혀온 아말렉와 아각의 모습이 보이고, 오른쪽에서는 사무엘이 아각을 죽인 장면이 나옵니다(삼상15:31-33절 배경)

24절에서 사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한 후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기 위해 곧바로 다시 백성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은 것은 백성들을 두려워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에서 '그들의 말'은 원어로 '그들의 목소리'로써 사울이 반드시 들어야 할 '여호와의 목소리'와 병행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결국 사울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두 목소리' 사이에서 백성들의 목소리를 택하여 청종하고, 여호와의 목소리를 거역한 것입니다. 이 또한 사울의 핑계요 책임전가에 불과합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했다고 계속해서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주야)" 하여 군자(君子)의 꼿꼿한 지조(志操)를 비유하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도덕군자들도 자신의 옳은 바에 대한 지조를 강조하며 그런 삶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서 얼마나 더 이들보다 탁월해야 할까요? 본 회퍼 목사의 제자의 탁월성에 대한 주장이 오늘날에 와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 빌립보서 4:8-9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Phil 4:8-9 Finally, brethren,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honorable, whatever is jus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gracious, if there is any excellence, if there is anything worthy of praise, think about these things. What you have learned and received and heard and seen in me, do; and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RSV)
  • Phil 4:8-9 Finally, brethren, whatsoever things are true, whatsoever things are honest, whatsoever things are just, whatsoever things are pure, whatsoever things are lovely, whatsoever things are of good report; if there be any virtue, and if there be any praise, think on these things. Those things, which ye have both learned, and received, and heard, and seen in me, do: and the God of peace shall be with you. (KJV)

우리말 성경(개역개정), 특히 신약 성경에서 '덕'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는데, 이는 헬라어의 '아레테(ἀρετή)' 또는 '집을 세우다'라는 의미의 '오이코도메(οκοδομή)'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아레테는 영어로 'excellence'(RSV), 'virtue'(KJV)로 번역하고, 오이코도메는 'edify'로 번역합니다. edify로 번역한 '덕'은 '공동체를 세운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아무튼, 영어의 virtue는 보통 동양적 개념으로 '()'으로 해석합니다. 동양적 사상에서 덕()은 '인의예지(仁義禮智)' 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말하고(도덕 강의가 아니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합니다), 헬라 철학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최상의 탁월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바리새인보다 더 탁월하게, 군자(君子)보다 더 탁월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삶은 나의 의지로는 결코 되지 않지만, 우리의 소원과 의지를 성령님께 아뢰고 맡길 때 우리 성령님께서 반드시 그 소원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삶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소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우리의 거룩한 성화의 삶의 과정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도록 애써야 합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자신이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범죄했다고 시인하고(24)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과 함께 돌아가 자기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25). 그러나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렸으므로 함께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26). 그리고 사무엘이 돌이킬 때에 사울이 사무엘의 겉옷을 붙잡음으로 찢어지고 맙니다(27). 옷이 찢어진 것을 본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울의 이웃에게 주었다고 선언합니다(28). 옷이 찢어지듯 이스라엘도 찢어지게 될 것이라는 복선이 우리의 뇌리를 강타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다고 하며 사울의 폐위를 완료형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이 비록 범죄하였을지라도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동행하여 장로들과 백성들 앞에서 함께 여호와께 경배하기를 통사정을 하여 결국 사무엘은 함께 가서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도록 합니다. 이미 원님이 행차한 후에 나팔부는 격이 되었는데도 사울은 끝까지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 그 알량한 체면이 뭐라고....

 

사무엘이 아각을 처형하다 (32-33)

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구스타브 도레, 선지자 사무엘의 손에 죽는 아말렉 왕 <Paul Gustave Dor&eacute; (1832-1883), A morte de Agag(The Death of Agag at the hand of the prophet Samuel), 1 Samuel 15:33>
위 구스타브 도레의 그림과 동일
롬바우트 판 트로옌(1605-1657, 네덜란드 화가), 사무엘이 아말렉 왕 아각을 처형하다 <Rombout van Troyen(1605-1657, Dutch Golden Age painter), Samuel Killing Agag, King of the Amalekites.>
유러피언 스쿨 제작, 사무엘이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다, 17세기 작품 <Creator European School (17th century), Samuel killing Agag, King of the Amalekites (1 Samuel 15). One of an unidentified series of 17th century Bible prints, apparently published by Pierre Mariette, Paris. Engraving work>
원그림 : 베르나르 피카르트(Bernard Picart, 1673-1733, French), 판화제작 : 얀 반 비아넨(Jan van Vianen, 1660-1726, Dutch), 출판 : 피테르 드 혼트(Pieter de Hondt), 1728, 헤이그

(위 그림에서) 사무엘은 길갈에서 아각을 조각내어 여호와 앞에 놓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역사기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거나 노략질하고, 또한 출애굽할 당시에도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던 아말렉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의미로 진멸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사무엘이 직접 아각을 죽입니다. 사무엘은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방식으로 아각에게 행한 것으로 보입니다(삼상15:32-33). 그림 아래의 캡션은 히브리어, 영어, 독일어, 라틴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입니다.

제임스 티소(프랑스, 1836-1902), 사무엘이 아각을 죽이다, 1836-1902년 사이 <James Jacques Joseph Tissot (French, 1836-1902) and followers, Samuel Slays Agag, c.1896-1902>

 

사무엘과 사울이 각자의 길을 가다 (34-35)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라마와 기브아
남쪽에서 바라본 라마(Ramah) - 19세기 후반

 

이제 16장부터는 하나님의 역사가 사울에게서 다윗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사울의 통치 기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을 일찍 왕으로 지목하시고 세우시는 것은, 다윗이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훈련이 계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준비하시고 훈련하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사람을 훈련할 때 가장 힘들고 혹독한 것은 시간의 검증입니다. 시간의 검증은 그야말로 빼박입니다. 단축할 수도, 건너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내면의 모난 부분들이 모두 깎이고, 부드러워져서 하나님이 쓰실만한 리더로 빚음받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긴 여정 가운데서 시간을 들여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을 조급해 하지 않고 담담하고 묵묵히 견디어 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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