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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와 함께 하는 묵상_Visio Divina

오늘의 묵상_마태 15:14_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by 적아소심 2024. 2. 2.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마태복음 15: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 Let them alone; they are blind guides. And if a blind man leads a blind man, both will fall into a pit. (RSV)
  • Let them alone: they be blind leaders of the blind. And if the blind lead the blind, both shall fall into the ditch.(KJV) 
  • ἄφετε αὐτούς τυφλοί εἰσιν ὁδηγοί τυφλῶν τυφλὸς δὲ τυφλὸν ἐὰν ὁδηγῇ ἀμφότεροι εἰς βόθυνον πεσοῦνται (여기에서 ὁδηγός(호데고스)는 leader, guide의 의미로 쓰임)

누가복음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피터 브루헬 더 엘더 <The Blind Leading the Blind, Pieter Brueghel the Elder, 1568, National Museum of Capodimonte>

피터 브뤼겔 더 엘더(c.1525/1530-1569)는 네덜란드와 플레미쉬의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중요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성화(聖畵)를 그렸는데, 특히 16세기 당시는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중심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시기였기에 화가들의 작품에는 시대에 대한 비판적 풍자가 많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위 그림도 당시 교회가 양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사회적, 정치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풍자가 그림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림에서 모두 6명이 가고 있습니다. 제일 앞서 가던 인도자가 넘어지면서 대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넘어진 리더에 이어 하얀 모자를 쓴 두 번째 맹인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따라가는 소경은 완전히 눈이 파여 있습니다. 그는 선두의 인도자가 구렁텅이에 빠져 넘어지자,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상황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앞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청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자기는 인도자를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결과는 구렁텅이에 같이 빠지는 것입니다. 리더를 잘 못 만나면 결국 같이 파멸로 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변명도 핑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청중은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지만 잠시의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인생을 책임져줄 수는 없습니다. 

위 두 사람은 눈의 상태로 보건대 날 때부터 맹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심한 눈병을 앓아 결국 실명되어 맹인이 된 것 같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 얼마나 억울하고 슬펐을까요? 게다가 친구(또는 인도자)를 잘못 만났습니다. 소경 인도자와의 잘못된 만남이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그것은 시대의 책임인가요? 자기의 책임인가요?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인가요? 그리스도인은 여기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나요? 

오른쪽 다섯 번째 사람은 모자를 푹 눌러써서 맹인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만, 그도 이 대열에 끼어 있습니다. 속에 자주색 옷을 입고, 십자가 목걸이를 한 것으로 보아 한 때 잘 나갔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결국 맹인의 무리에 들었습니다. 바로 기가막힐 구덩이(시40:2a)에 빠질 그 무리에 말입니다.

전면의 맹인들 사이로 교회가 멀리 보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다니지 않은지 마당에는 잡풀이 나는 등 황량함이 묻어나 있으며, 앞에 있는 나무는 앙상하게 말라 있습니다. 조금만 앞에 가면 조그만 시내가 흐르는데도 말라 있는 것을 보니 제대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가 봅니다. 이는 당시 시대의 교회의 모습 또는 지금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화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들을 양육하지 않고 정치, 경제 논리에 휘둘리며 자기들 살길을 찾는 영적 지도자들의 모습을 한탄하며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교회의 황량한 모습을 통해 메말라 죽어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가감없이 풍자하고 있습니다. 

황당한 표정의 이 맹인의 머리 바로 위에 하얀 붓꽃이 보입니다. 하얀색 붓꽃의 꽃말은 "믿는 자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 행복은 바로 지척에 있는데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도 바로 성경 속에 있는데, 지금은 성경책에 먼지만 쌓여 있을 뿐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삶의 방향을 알고 성령님을 아는데 성경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냥 주일 예배 설교 한번 듣고 그것으로는 바쁘지만 권태로운 삶, 한편으로 실제 삶은 절박한데 하나님을 찾고 싶은 내적 의욕이나 동기부여가 생기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교회 일은 많이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에는 확신이 없습니다. 묵상과 성찰이 없는 영성으로는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의 공허함을 메울 길이 없습니다.

 

지금도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세상입니다. 세계 역사는 비관적이고 절망적입니다. 우리나라 또한 미래가 암울합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공동체적 가치관은 무너지고 모든 가치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1990년대부터 많은 문제점들을 비판하며 개혁을 외쳤으나 30년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레파토리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지금 교회는 너무나 무기력합니다. 20년 뒤에 한국 교회가 살아 남아 있을까요?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맹인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맹인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보다는 진영 논리, 전통 문제, 시사 문제, 교육 문제, 헌금 문제에 대해 말을 많이 하지만 본질적인 신앙의 문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하나님 나라"에 대해 줄기차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삶, 제자의 삶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 상황에 대해 말하고, 삶의 기술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예수님의 삶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많지 않습니다. 말씀은 가르쳐도 말씀이 삶이 되는 모범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복(祈福)은 많은데, 진정한 기도(祈禱)는 없습니다. (물론 있지만 좀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정말 삶의 모범을 따라 배울 수 있는 영적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자신 안에, 가정 안에, 그리고 교회에 실현시키는 그런 리더가 필요합니다. 가르침 자체보다는 삶 자체가 더 중한 리더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고전4:1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렇습니다. 교사는 많은데 진정한 스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서 3:1절에서는 더 극단적으로 말합니다.

  •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는 가르치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선생의 심판이 엄중하기 때문에 선생이 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 한기(資治通鑒, 漢紀, 桓帝 延熹 七年)에 나오는 말입니다.

  • ”經師易遇, 人師難遭, 願在左右, 供給灑掃(경사이우, 인사난조, 원재좌우, 공급쇄소).“

이는 위소(魏昭)라는 사람이 곽태(廓泰)라는 사람을 찾아가 경전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쉽지만(經師易遇 경사이우),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어려우니(人師難遭 인사난조), 바라건대 곁에서 머물며(願在左右 원재좌우), 청소하는 일을 하겠습니다(供給灑掃 공급쇄소).라고 배움을 청하였다는 일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도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맹자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 孟子曰, 人之患, 在好爲人師. (맹자왈 인지환 재호위인사, 孟子 離婁上 第23章)

이는 "사람들 사이의 많은 어려움은 사람이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데에 있다."는 의미인데, 참으로 설득력있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혹독하게 책망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맹인이고 그 가르침으로 수많은 사람을 구렁텅이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못가면서 남들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이는 마치 개가 말 구유에 누워 자기도 못먹고 말도 못먹게 만드는 꼴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충고하는 것을 조금만 줄여도 많은 인간갈등이 사라질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적해 주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마음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적질하고 들추어 내면서 가르치려고 할 때 관계가 파괴되고 다툼이 발생합니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은 상처만 남깁니다.

 

욥은 고난 중에 찾아온 친구들의 충고가 자신에게 너무 아파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습니다. (특히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4,5장의 충고에 대하여)  

  •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 욥기6:25) 

이는 곧 항상 옳은 소리를 한다고 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없이 지켜보다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처럼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해서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 일이 나에게, 그리고 내 공동체에게 일어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맹인의 상태에서 깨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말씀을 자세히 듣고 자세히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글로만 이해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겠습니다. 단순히 내 소원만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그 소원을 나의 소원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맹인이 되어서도 안되고, 또한 내가 맹인을 따라가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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