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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1_창세기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창세기 7장_홍수심판

by 적아소심 2023. 2. 28.

1-24 홍수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7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3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14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15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17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20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4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Beasts and Noah's family went in the ark, Genesis cap 7 v 1-5. Phillip Medhurst 짐승들과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로 들어가다, 필립 메두스트 작품
John Martin also produced paintings of "The Eve of the Deluge", in 1840 대홍수 전날, 존 마틴 작품
대홍수 전날, 존 마틴 작품 (디테일)

위 존 마틴의 그림에서는 대홍수 전날 하늘의 징조를 바라보며 므두셀라가 죽는 모습이 묘사되었습니다. 후손들 품에 안겨 죽는 므두셀라의 모습을 젊은 아이가 그의 죽음을 전하러 뛰어 내려갑니다. 므두셀라가 노아의 가족들과 있었으니 노아에게는 할아버지인 셈이지요. 므두셀라의 죽음으로 본격적인 대홍수가 시작될 것입니다. 별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고, 가족들이 있는 지역은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고, 하늘의 밝은 모습임에도 불길한 모습을 띱니다.  

Noah, The Eve of the Deluge - John Linnell, 1848 노아, 대홍수 전날, 존 린넬 작품

하늘의 징조가 심상치 않습니다. 가족들이 붉은 노을의 하늘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측 산 위쪽에 방주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상태로, 각종 짐승들이 줄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인류는 홍수라는 재해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과연 그 재난은 인류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지요? 내일의 재난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Before the Deluge by Roelandt Savery, c.1630 [Nuneaton Museum and Art Gallery, U.K.] 대홍수 이전, 룰란트 세이버리 작품
The World Before the Flood, 1828, William Etty 홍수 이전의 세상, 윌리암 에티
A Bacchanalian Revel Before a Term of Pan, Nicolas Poussin, 1632–1633. Etty was a great admirer of Poussin, and The World Before the Flood is heavily influenced by his work.

위 그림은 "홍수 이전의 세계"로 니콜라스 푸생의 작품입니다. (1632-1633년) 윌리암 에티는 푸생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홍수 이전의 세계"는 푸생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24: 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사람은 사고나 재난이 닥치기 전까지는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합니다. 홍수라는 재해를 겪어보지 못한 인류는 그 재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할 수도 없을 것이고, 또한 재난이 와도 설마 자신에게까지 올까라는 안이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소나기가 오기 전까지, 도로나 집이 물에 뒤덥힐 때쯤이나 되어서야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현실에 직면하는 그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에서야 하나님의 심판의 진정성과 혹독함에 전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Shade and Darkness: The Evening Before the Deluge, 1843 그늘과 어둠: 홍수 이전의 저녁, 조셉 말로드 윌리암 터너 작품
William Westall 1781–1850: The Commencement of the Deluge (1848) 대홍수의 시작, 윌리암 웨스톨 작품
홍수의 시작, 윌리암 웨스톨 작품(디테일)
The Commencement of the Deluge, Genesis cap 7 v 10-12. Phillip Medhurst 대홍수의 시작, 필립 메두스트 작품
The Deluge by John Martin (1806-70). 1834. Oil on canvas, 66 x 102 inches 대홍수, 존 마틴 작품
Deluge 1864 – Ivan Aivazovsky 대홍수,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1864년
대홍수,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작품 (디테일)

대홍수의 참상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모든 생명체들은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휘몰아치며 불어오르는 물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돌에 깔려 죽은 사람도 보이고, 어린 아이들이 바위 산위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고 떨리는 모습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The Deluge by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대홍수, 조셉 말로드 윌리암 터너 작품
Noah’s Flood Artist Unknown, 노아의 홍수, 작가 불명
The Deluge, Gustav Dore 대홍수, 구스타브 도레 작품
The Deluge by Francis Danby, c. 1837 대홍수, 프란시스 단비 작품
대홍수, 프란시스 단비 작품(디테일1)
대홍수, 프란시스 단비 (디테일2)
대홍수, 프란시스 단비 작품(디테일3)

프란시스 댄비의 대홍수는 바다의 힘과 육지와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바다의 힘을 강렬한 스펙터클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악을 벌하시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배경에는 달빛 아래서 사람들에게 드리워진 혼돈과 위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노아의 배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산 꼭대기로 서로 올라가기 위한 투쟁이 치열합니다. 제일 꼭대기 위에는 팔짱을 낀 사람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디테일1 빨간 방주의 모습). 

 

중간 부분(디테일2)에는 주로 아이와 함께 하는 여인이 많이 보입니다. 아무래도 아이를 보호하려다보니 피신이 쉽지 않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옥석구분(玉石俱焚)과 같습니다. 착한 사람이건 악한 사람이건 모두 함께 심판을 받습니다. <서경(書經)> ‘하서(夏書)’의 “곤륜산에 불이 붙으면 옥과 돌이 함께 불타 없어진다(火焰崑岡 玉石俱焚 화염곤강 옥석구분) ”는 구절과 같이 산에 불이 붙으면 옥이나 돌이나 모든 것이 불에 탄다는 것입니다. 옥과 돌을 구분해서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여기서 俱는 '함께구'입니다)

 

제일 아래 부분(디테일3)에는 짐승조차도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죽어가는 모습이 보이고, 6장에서 언급했던 네피림도 죽고, 그 옆에서 천사가 매우 슬퍼하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방주에 들어간 사람과 짐승 외에는...

L&eacute;on Fran&ccedil;ois Comerre (1850 &ndash; 1916, French), Le D&eacute;luge 대홍수, 레옹 프랑시스 작품
John Martin, The Deluge, 1834 대홍수, 존 마틴, 1834년
The Deluge, 1806. Early 19th Century Romanticism 대홍수, 앙느 루이 지로데 드 루시 트리오종 작품

한 가족을 살리기 위한 가장의 피눈물나는 사투의 모습입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있던 아내는 거의 죽음의 문턱에 있고, 늙은 아버지를 등에 메고 있는 남성의 눈은 절망과 공포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 심판의 때에 이런 고통과 슬픔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림에서 작가들은 심판 앞에 너무나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며 우리에게 늘 겸비한 마음으로 살아야 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God destroys the world in a flood. ―Genesis 7, Gustave Dore 홍수로 세상을 멸하시는 하나님, 구스타브 도레 작품
The Deluge, fresco by Michelangelo in the Sistine Chapel 대홍수, 미켈란젤로 작품, 시스타나 성당의 프레스코화

미켈란젤로가 시스타나 예배당에 처음 그린 것은 노아의 방주였다고 합니다. 만선인 작은 배에 필사적으로 승선하려는 벌거숭이 남자들과 수십 명의 성인 남녀와 어린아이들이 나체로 대홍수를 피하고 있습니다. 직사각형 방주는 지붕과 창문이 보이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창문 사이로는 빨간색 옷을 입고 구레나룻 수염을 늘어뜨린 노아가 보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시선은 주변의 어려움을 외면한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습에서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보입니다. 미켈란젤로 또 항상 고독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비는 보이지 않습니다. 비로 인해 시야를 가리지 않고 비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배려라고 할  있을까요.)

 

어렵게 방주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구원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다리를 세워보고 심지어 도끼로 찍어 보지만 방주 안으로는 들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방주의 문은 안에서 닫아 잠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밖에서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작은 배는 위태위태 합니다. 살기 위해 배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폭력과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밀치고 끌어 내려야만 합니. 하지만 배에 올라 자라고 해서 평안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하고 있습니다그들의 표정에는 불안, 두려움, 난폭이 녹아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고지대로 질서정연하게 오르는 사람들은 실의에 빠진 모습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한 움큼의 옷가지를 그리고 프라이팬을 움켜진 두 남자가 보입니다. 뒤를 이어 걸상을 거꾸로 세워 식빵과 도자기 몇 점과 칼을 담아 머리 위로 올린 여성이 따르고 있습니다. 차오르는 물을 피하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헛된 노력들이 애처롭기만 합니다.

 

위쪽으로 작은 배에서는 서로 자리를 차지 위한 사투가 벌어집니다. 제 위쪽 방주에서도 사투가 벌어지고 있고, 창문 밖으로 모습을 내민 노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림에서는 섬으로 올라온 사람들의 상태가 보입니다. 엄마가 다쳤는지, 아이가 울고 있고, 엄마 다리를 붙들고 있는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르는 같습니다. 아이는 바람에 밀리지 않으려고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는 돌섬 같은 곳에 임시로 천막을 쳐서 비를 막아 보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불어나는 물의 높이를 확인하며 절망에 빠집니다. 그럼에도 기운찬 노인이 무기력하게 출 늘어진 젊은이를 두 팔로 붙잡고 돌섬으로 옮겨주고 있습니다.같은 운명에 처할 상황에서도 손을 뻗는 인간애도 보입니다. 그러나 천막 안은 불안과 죽음의 공포가 가득할 뿐입니다. 빈 그릇 위에 어깨 받치고 있는 얼이 완전히 빠진 청년의 모습은 홍수가 얼마나 급작스럽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위 그림에서 미켈란젤로는 발가벗은 인물들이 밀려오는 물살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에너지의 덩어리이며, 파멸에 처한 사람들의 뒤틀린 형태를 근육질의 붓터치로 디테일하게 표현하여 공포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미켈란젤로의 동기가 무엇이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이 그림의 힘입니다. 그 에너지는 물만큼이나 압도적입니다. 색채의 사용은 매우 뛰어나며, 물은 그림처럼 완벽한 푸른색이 아닌 용서할 수 없는 흰색과 회색입니다.

이 격렬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공허함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살색 톤을 위한 완벽한 배경이 됩니다. 미켈란젤로 특유의 해부학적 정밀함과 특히 남성의 아름다움을 향한 그의 안목으로 인체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림 속 인체의 일부분은 액션으로 가득 차 있고, 신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며, 디테일의 수준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대홍수'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아마도 물에 빠진 다른 사람, 아마도 아들로 추정되는 사람의 시신 또는 죽어가는 육체를 부드럽게 안고 있는 늙은 남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에 관한 그림 한가운데에 자비의 행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절박한 위기 가운데서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평소 그의 삶은 선행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선하고 자비로운 행동일지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두 공허함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노아처럼 하나님의 앞에 의인이요 말씀을 다 준행하는 것이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8명의 가족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오늘날도 노아의 홍수 때와 같다고 하신 말씀에서 구원 받는 자들이 얼마나 적을지 예상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고  해서 절대 값싼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만, 그에 합당한 삶이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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