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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09_사무엘상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사무엘상 19장_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다

by 적아소심 2025. 4. 21.

사무엘상 19:1-24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다

 

① 요나단이 다윗에게 경고하다 (1-7)

1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2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 4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7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

클리브 업튼(1911-2006), 요나단이 다윗에게 경고함 [Clive Uptton, English (1911–2006), Jonathan's warning to David]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용맹과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울 왕은 극심한 질투심과 왕위를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점점 더 편집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자신의 왕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1절을 보면, 이제 사울은 다윗을 없애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공개적으로 드러냅니다.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악령이 들린 사울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는 반쯤 정신 나간 상태가 되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좋아했다는 말은 하펫츠(חָפֵ֥ץ)’로 능동 완료형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하펫츠(chaphets)"는 주로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게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종종 깊고 진심 어린 소망이나 즐거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고대 히브리 문화에서 감정과 욕망은 종종 신체적 행동이나 상태로 표현되었습니다. 기쁨이나 즐거움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내적인 감정이 아니라 행동과 선택을 통해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펫츠"는 관계적인 측면에서 기뻐하고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4-5절에서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을 간곡하게 설득합니다. 요나단이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며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울의 뒤를 이을 왕위 계승자이자, 다윗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당사자였던 그가, 아버지 사울 왕이 그렇게 죽이고 싶어 했던 다윗, 그의 위대한 덕목과 재능, 무엇보다 탁월한 공적을 칭찬한다는 것은 자기의 목숨과 왕위를 내놓은 것과 같습니다. 사울에게 간구하는 요나단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보소서, 그가 블레셋 거인과 싸웠던 그 기억에 남는 순간, 목동의 물매로 시냇물 자갈을 겨누었을 때,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빗나갔더라면 블레셋 거인에게 죽었을 것이고, 그때 이스라엘을 위해 이루어진 구원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다윗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당시 요나단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그와 다윗 사이의 진정한 우정과 충성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감동적이고 희생적인 간구에 사울의 마음이 잠시 누그러집니다. 그리고 사울은 확신에 차 맹세합니다.

  •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9:6)

그러나 이것은 다윗을 살려주겠다는 맹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맹세를 두 번 더 하였고, 그는 계속 약속을 어기게 됩니다(24:16-20; 26:21). 사울이 왕의 자격을 잃어버린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한 자신의 엄숙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 충성과 배신을 대조해 볼 수 있습니다. 시기심과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울 왕이 다윗을 배신하고 죽이려 하는 동안, 요나단은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주었고 아버지 사울이 분노할 경우의 결과를 알고서도 친구를 위해 용기 내어 나선 것입니다. 요나단은 친구에 대한 진정한 우정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용기를 보여줍니다.

 

7b절에서, ”전과 같이 있었더라(As in times past)“ 예전과 같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다윗이 비록 겉보기에 왕의 친밀함과 애정으로 대접받았지만, 곧 새로운 이유가 생겨나 왕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질투의 불길에 다시 불을 지폈습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오래된 원수인 블레셋을 상대로 거둔 성공적인 전투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그 전투에서 다윗은 항상 그래왔듯이 영웅이었습니다.

 

②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다 (8-10)

8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죽이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9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출처: bible art)

9절에서 사울이 손에 창을 들고 집에 앉아 있을 때, 여호와께로부터 온 악령이 사울에게 임하였고, 다윗은 손으로 수금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전환점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되는데, 사울의 다윗에 대한 질투와 광적인 편집증이 새로운 국면에 이르게 됩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온 악령이 사울에게 임했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순수하게 선하고 의로우시다는 생각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해 왔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선과 악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고대 히브리인의 관점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거부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볼 수도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사울이 단창을 손에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은 긴장감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의 마음은 불안하고, 그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가 다윗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가 커지면서 정신적, 감정적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암시합니다.

Antoni Stanisław Brodowski (1784–1832, Polish), Saul's Anger at David, 1810s
Constantin Hansen(1804-1880), "Saul throwing his spear at David“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령이 임하자, 사울은 손에 들고 있던 단창으로 연주하고 있는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악령에 붙잡힌 사울은 아무리 맹세하여도 맹세의 약속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결국 사울은 반복적으로 악령에게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즉시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는 장면이 반복됩니다(삼상 17:9-10). 이번에는 다윗이 사울이 자신을 죽이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왕궁에서 탈출합니다.

 

③ 미갈이 다윗을 구하다 (11-24) (참조 사도행전 9:23-25)

11 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12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 13 미갈이 우상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14 사울이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이르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15 사울이 또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째 내게로 들고 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16 전령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는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17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Gustave Doré (1832–1883), Michal lets David escape from the window, 1865.
James J. Tissot, 'David Makes His Escape' (1896-1902), gouache on board, The Jewish Museum, New York

그날 밤,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이 한밤중에 창밖으로 도망치도록 부추깁니다. 미갈은 다윗이 병들었다고 말하며, 다윗을 죽이러 온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다윗의 침대에 실물 크기의 우상을 놓습니다(미갈이 우상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신앙적으로 신실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윗이 자신이 도망치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을 위협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시점에서 미갈은 다윗 편에 선 것처럼 보입니다. 왕국에서의 자신의 미래가 다윗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아버지 사울 왕으로부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서 다윗이 자신을 위협해서 도망하게 하였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녀가 진심으로 다윗을 사랑해서 탈출시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녀가 다윗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을 보면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다윗에 대한 행동은 다분히 그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전략적인 선택인 것 같습니다.

 

이 필사적인 도망과 함께 다윗의 길고도 지친 방랑, 그리고 끊임없는 생명의 위험이 시작되었고, 이는 사울 왕이 죽고 그의 죽음의 추격이 완전히 그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④ 다윗이 사무엘에게 피신하다 (18-24)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18절에서, 다윗은 도망하여 사무엘에게 갔습니다. 그는 결국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고난 가운데서 자신에게 기름 부어 주었던 존경하는 선견자 사무엘에게 갔습니다. 사무엘은 은퇴하였지만, 여전히 영적 권위가 막강하였기 사울이 사무엘 앞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은 행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 사울에게 겪었던 모든 일을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고난과 환난 중에 사무엘에게 피한 것이 다윗의 마음에 위로와 안도감을 주었지만, 사무엘은 사울의 영적 타락에 대해 듣고 몹시 슬퍼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이 있는 나욧에서 지냈습니다. 나욧은 갈대아어로 '학문의 학교'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연구하는 데 전념했던 유명한 선지자들의 학교이자 대학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신학대학교였던 셈입니다. 다윗이 거기에서 살았다는 말은 와예쉐브(וַיֵּשְׁב֖וּ)’인데, 야솨브(יָשַׁב)의 미완료시제로, dwelt, 또는 stayed의 뜻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함께 살면서 거기에서 기숙하며 배우고 있는 선지자 무리(20)‘와 함께 신앙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 삼상 19:19 (출처: bible art)
“예언하는 사울의 전령들 – 삼상 19:20 (출처: bible art)

다윗의 희망과는 달리 사울은 결국 사무엘이 있는 선지자학교에까지 전령들을 보내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이제 영적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도 팽개칠 정도로 타락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너무나 강력하여 사울의 전령들은 모두 다윗을 잡기는커녕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예언하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사울은 3차까지 전령을 보내었으나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맙니다. 당시 사무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영이 얼마나 강력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구에서의 사울" - 삼상 19:22 (출처: bible art)
"예언하면서 나욧으로 가는 사울" - 삼상 19:23 (출처: bible art)
"예언하면서 벌거벗은 사울" - 삼상 19:24

사울은 3차까지 전령을 보내었으나 모두 실패하자 마침내 직접 가기로 결심합니다. 길을 떠난 그는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했습니다. 사울은 그곳에서 사무엘과 다윗이 아직 라마에 있는지 확인하고, 라마 나욧으로 길을 계속 갑니다. 그러나 사무엘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욧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 즉 겉옷만 걸친 채 그날 밤낮으로 누웠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의 감정은 극한 흥분에 달했고, 아마도 찬송과 예언을 하며 격렬한 몸짓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감정의 폭풍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소름 돋는 놀라움을 선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다시 한번 이 기이한 현상에 놀라며 "사울도 선지자들 가운데 있느냐?"라는 속담을 떠올렸습니다(삼상 10:11). 사울이 하나님의 영을 체험한 것은 분명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0:10에 따르면, 사울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직후 기브아에서 예언하던 선지자들을 만났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그들 가운데서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울은 다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울의 변화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했습니다. 하루 동안의 폭풍 같은 감정의 표출이 끝나고 사울은 예전의 모습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는 다윗을 잡고자 하는 의도를 접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지만, 그는 회개도 없었고, 마음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사울처럼 고집 세고 불순종하던 자가, 구경하던 백성들에게는 신성한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받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시편 103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악한 ​​사람들이 소유한 하나님의 은사들이 많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종종 뛰어난 재능, 뛰어난 기술,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 예언의 은사는 위대한 은사이지만, 사울이 그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악한 왕이었던 사울은 믿음의 사람 다윗을 박해하던 바로 그 시기에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은사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13:1-2). 그러나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두려운 결산(accounting)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직 내에서 자주 보게 되는 불편한 진실은, 옹졸한 리더는 자기보다 훌륭한 부하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나의 교회, 나의 공동체 내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리더는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소원을 물어보셨을 때, “듣는 마음을 달라고 요청하였고, 하나님은 솔로몬의 이런 요청을 지혜를 구했다고 답하신 것처럼, 주변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왕상 3:9-11). 잘 듣기 위해서는 넓은 마음과 넓은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이 넓은 만큼 조직은 커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어떡하든 아랫사람을 못 올라오도록 은근히 까고 짓밟습니다. 아랫사람의 등을 밟고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올라가면 사다리를 치워버립니다. 그리고 내려갈 때는 명예롭지 못하게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얼마간은 통할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반면, 아랫사람을 키운 만큼 내가 올라간다는 것이 역설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도입니다.

 

한비자(韓非子)에는 학택지사(涸澤之蛇)라는 말을 인용한 고사가 나옵니다. 요지는 아랫사람을 높여주면, 내가 높아진다라는 것입니다.

  • 田成子가 齊나라를 떠나 燕나라로 달아날 적에 鴟夷子皮(치이자피)는 傳을 짊어지고 따랐다. 望邑에 당도하여 치이자피가 “당신 혼자만 마른 연못의 뱀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연못에 물이 말라서 뱀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고 했는데, 작은 뱀이 큰 뱀에게 ‘당신이 앞서가고 내가 뒤따라가면 사람들은 그저 뱀이 지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여겨서 반드시 당신을 죽이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꼬리를 문 채 당신이 나를 등에 업고 가느니만 못합니다. 그리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를 神靈이라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뱀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큰 뱀이 작은 뱀을 등에 업고 큰길(公道)을 건너가니,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피하면서 ‘神靈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지금 당신은 훌륭한 모습이고 저는 추악한 모습입니다. 당신을 저의 상객(上客)으로 삼으면 사람들은 저를 천승(千乘)의 작은 나라 군주로 간주할 것이고, 당신을 저의 시종(侍從)으로 삼으면 사람들은 저를 만승(萬乘)의 큰 나라 경(卿)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저의 舍人이 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田成子는 이 때문에 傳을 짊어지고 鴟夷子皮(치이자피)의 뒤를 따랐다. 여관에 당도하니 여관 주인이 매우 공경히 접대하였고 아울러 술과 고기까지 바쳤다.
  • 田成子去齊하야 走而之燕할새 鴟夷子皮負傳而從하다 至望邑하야 子皮曰 子獨不聞涸澤之蛇乎잇가 澤涸하야(41) 蛇將徙러니 有小蛇謂大蛇曰 子行而我隨之면 人以爲蛇之行者耳라하야 必有殺子者리이다 子不如相銜負我以行이(42) 人必以我爲神君也라하리이다(43) 乃相銜負以越公道而行하니(44) 人皆避之曰 神君也라하니이다 今子美而我惡하니 以子爲我上客이면 千乘之君也요 以子爲我使者면 萬乘之卿也리니 子不如爲我舍人이니이다 田成子因負傳而隨之하다 至逆旅하니 逆旅之君待之甚敬하고 因獻酒肉하다(45) (韓非子集解(2) 22)

논어(論語) 옹야(雍也)편에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 “인자(仁者)는 자기가 입신(立身)하고자 하면 남을 입신시키고, 자기가 진달(進達)하고자 하면 남을 진달시킨다. 가까이서 비유를 취하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夫仁者는 己欲立而立人하며 己欲達而達人이니라 能近取譬면 可謂仁之方也已니라)

다시 말하면, 인자(仁者; 어진 사람)는 자기가 입신(立身;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 수 있는 인격과 학식을 갖춤) 진달(朝廷에 나아가 벼슬함)하고자 하면 먼저 남을 입신 진달시키고, 또 가까이 자신에게서 비유를 취하여 모두 자기가 원하는 바로써 남의 마음을 헤아려 남에게 베풀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인()을 행하는 방법이라고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과 요나단, 다윗의 삶을 보면서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편협하고 성령님으로 온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보면서, 날마다 주님의 은혜로 기경(起耕)해야 함을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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