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T01_마태복음_성화와 함께 읽기(Visio Divina)

마태복음 제26장❶_예수님을 죽이려 모의하는 종교 지도자들, 향유를 붓는 여인 그리고 배신하는 유다

by 적아소심 2025. 12. 26.

마태복음 26:1-16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다(14:1-2; 22:1-2; 11:45-53)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제임스 티소(1836-1902), 대제사장들이 모여 모의하다, 1886-1894년, 부르클린 박물관 [James Tissot(1836–1902), The Chief Priests Take Counsel Together, 1886-1894, Brooklyn Museum]

 

제임스 티소(1836-1092), 대제사장들이 모여 모의하다, 1886-1894년, 부르클린 박물관 [James Tissot(1836–1902), The Chief Priests Take Counsel Together, 1886-1894, Brooklyn Museum]

 

1-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1a)”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 마치셨다는 것은 24-25장에 나오는 감람산 담화를 마무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셨다라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끝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담화를 통해 세상에 다가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새롭게 된 세상에서 통치하기 위해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전하셨습니다. 이날은 아마 유대력으로 니산월 12일 수요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서 끝납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마지막 장면이 가까이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말씀과 행적을 보고 읽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복 읽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분을 위대한 선지자로 보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의 씨가 어떻게 뱀의 머리를 부쉈는지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오랜 세월 동안 반복적이고 일회적으로 드려졌던 구약의 제사가 폐기되고, 그 한 번의 희생이 어떻게 영원한 효력을 지니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는피가 흘렀고, “세상의 죄를 도말하시는(없애시는)” 어린 양의 죽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공의로우시면서도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위대한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자의 배신과 십자가 처형을 앞둔 마지막 시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2). 이 예언에서 예수님은 수개월 동안 예언해 오셨던 십자가 처형 날짜를 확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을 예언하신 것이 이번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첫 세 번의 예언은 마태복음 16:21, 17:22-23, 20:17-19에 있으며, 17:12에도 암시가 있습니다). 이 예언들이 성취되었을 때 제자들은 슬픔과 두려움에 휩싸였겠지만, 결국 이 말씀의 진리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주며,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했습니다.

 

2절에서, “팔리리라”라는 말은 파라디도타이(παραδίδοται)인데, 넘겨지다”, “배신당하다”, “뒤집어지다”라는 뜻으로, 미래를 나타내는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더 큰 확신을 나타내거나, 지금 배신당하고 있다”는 현재의 완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현재 시제는 비록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결정되었거나 불변의 법칙에 따라 반드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현재와 다름없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틀 후는 유월절입니다. 지금 수요일이라는 것이지요. 이틀 후의 유월절은 금요일 저녁이고, 일요일은 초실절며, 그 직후에 무교절이 이어집니다. 때로는 유월절과 무교병이 때때로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2:1절 이후에는 "유월절이라 불리는 무교병절이 가까이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교병절은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동안 지속됩니다. 무교병은 7일 동안 먹습니다(23:6; 28:17). 유월절은 사실 별개의 절기로, 니산월 14일에 지켜지며, 식사는 니산월 15일 해가 진 후에 합니다. 그러나 "유월절"이라는 용어는 8일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23:6; 28:17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사명을 완수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말씀으로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치시고 이제는 십자가의 피로써 모든 인류를 구속하시려 하십니다. 제자들은 25장까지 예수님께서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다가올 메시아의 왕국에 대한 희망으로 잔뜩 부풀어 올랐을 것입니다. 메시아 왕국에서 그들은 모두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주의 깊게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리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세상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과 앞 25장의 연결성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에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과 그에 따르는 모든 두려운 일들을 묘사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자신의 보좌 앞에 모일 심판자로서 자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아무런 멈춤이나 간격 없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놀라운 예언이 아직도 제자들의 귀에 울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다가올 고난에 대해 거듭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왕으로 오셔서 통치하시기 전에 속죄 제물로 죽으셔야 한다는 것, 즉 왕관을 쓰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셔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며, 우리 영혼의 눈은 항상 그 사실에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의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체계에서 핵심 진리입니다. 이것 없이는 복음은 주춧돌 없는 기둥, 기초 없는 건물, 태양 없는 태양계와 같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과 모범, 그분의 기적과 비유, 그분의 행적과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죽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라는 것이 성경의 가장 기초적인 진리입니다. 어떤 이들은 초기의 그리스인들처럼 이 교리를 비웃으며 어리석은 것이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영광을 돌리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6:14)

 

3-5절에서, 그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님을 속임수로 잡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동안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의 오랜 논쟁을 지속했습니다. 마침내 그 논쟁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언급된 기관들을 보면 이것이 산헤드린 공회 회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67년까지 적어도 28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가야바는 이 단락뿐 아니라 57-66절에서도 예수님의 불법 재판을 주재하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가야바는 기원후 18년부터 36년 죽을 때까지 율법이 아닌 로마에 의해 임명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서기 6년부터 15년까지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사위였습니다. 그는 또한 사두개인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야바가 공식적인 대제사장이었지만 여전히 안나스는 대제사장으로 불렸습니다(4:6). 구약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죽은 후에야 후임자를 임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의 권력 이양은 불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두 사람 모두를 계속해서 '대제사장'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가야바의 이야기는 비극적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진리를 부인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부와 높은 지위, 그리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한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결국 자책감으로 인해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함께 모의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메시아를 제거하기 위한 최종 전략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흉계로잡으려는 것은 마치 사나운 짐승을 덫에 걸리게 하듯 은밀하게 잡으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중을 자극할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 또한 쉽게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쉽게 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흉계(속임수, 기만)'미끼를 던지다'라는 뜻의 dello에서 유래한 'dolos', 문자 그대로 낚싯바늘, , 속임수를 의미합니다. 흉계(dolos)는 거짓말을 통해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덫에 걸리게 하거나, 미끼를 놓는 행위(방심한 희생자를 '낚기' 위해 덫에 미끼를 놓는 것)를 의도적으로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거부함으로써 이득을 얻거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현대 광고에서는 '미끼 상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소비자를 현혹시키는데, 이는 너무 좋은 가격처럼 보이는 것에 속는 것을 의미합니다. 흉계는 함정에 빠뜨리거나 속이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배신을 수반합니다. 속임수는 때때로 우리 내면에서 비롯되는데,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속이도록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월절 명절 기간에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5)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 가운데 소란이 일어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순례자들로 가득 차서 평소 인구의 3~5, 5만 명에서 25만 명까지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타락한 생각을 가진 그들조차도 많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이 군중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분노를 이스라엘로 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성전에서 제물로 바칠 어린양을 팔아 큰 수익을 올리고, 외국 화폐를 제물로 바칠 수 있는 화폐로 환전하는 장사에도 방해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는 일로 인해서 생기는 소란으로 인하여 유월절 명절과 관련된 막대한 재정적 이익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명절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명절에는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명절에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틀 후에 해야 한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3절의 첫 단어 “그때에”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승리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2:4; 33:10, 11). 그들은 유월절 이후에 음모를 실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셨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유월절에 죽으시도록 예정되셨습니다. 언제나처럼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계획을 초월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여호와께서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16:9).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으나, 오직 여호와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19:21).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14:3-9; 12:1-8)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베다니의 예수님.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 마태복음, 1920년 후안 라구이 리테라스의 저서 《사그라다 역사》에 실린 오래된 판화 [Jesus in Bethany. Mary anoints the Lord Jesus. Matthew book, New Testament Sacred biblical history. Old engraving from the book Historia Sagrada 1920 Juan Lagui Lliteras]

 

예수님께 향유를 붓다 [Jesus is Anointed (John 12:1-8)]

 

피터 폴 루벤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의 그리스도, 1618-20 [Peter Paul Rubens, Christ at Simon the Pharisee 1618-20]

 

제임스 티소(1836-1902),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다, 1886-1894년 [James Tissot(1836–1902), The Ointment of the Magdalene, between 1886 and 1894]

제인스 티소의 위 그림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여인이 나사로와 마리아의 동생 마리아로 분명히 언급되어 있으나 그 외의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이 표기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배경을 누가복음 7장으로 하여 죄를 지은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6-13에서, 한 여인이 예수께서 죽으시기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과 비슷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시는 중에 그 머리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합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8b, 9)”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10-13).”

 

요한복음 12장에 따르면 이 여인은 나사로와 마르다의 누이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던 마리아(10:39)는 예수님께 이처럼 아낌없는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향유 부음을 받으신 시기는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요한복음 12:1절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가셨다고 하며 날짜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가복음과 마태복음(26:6-13)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 음모를 꾸몄다는 언급(14:1-2, 26:1-5) 이후에 예수님께 향유 부음을 받으신 사건을 묘사합니다. 이 사건은 유월절 전 화요일(대부분의 주석가들) 또는 수요일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이 묘사를 "회상"으로 기록했지만, 요한복음은 이 사건의 정확한 연대기를 제시하여 유월절 전 토요일로 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병환자 시몬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아마도 지역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나병환자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구분 마태(26:6-13) / 마가(14:3-9) 누가(7:36-50) 요한(12:1-8)
장소 베다니 시몬의 집(나병환자) 바리새인 시몬의 집 베다니(나사로의 집)
여인 (베다니의) 한 여자 죄를 지은 여인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행동 예수님 머리에 값비싼 향유 부음 예수님 발에, 눈물, 입맞춤, 머리카락으로 닦기, 향유 예수님 발에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 부음 (머리카락으로 닦음)
반응 제자들이 허비라고 비난(유다) 시몬, 예수님의 선지자 됨 의심 유다의 비난(탐욕)
의미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행동 빚진 자의 비유, 큰 사랑 받은 자의 헌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헌신과 사랑

 

제자들은 여인의 행동을 왜 허비(낭비)라고 하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을 비판했습니다. 특히 유다가 더욱 그러하였습니다(12:4-6). 제자들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이 "쓸모없는 일시적인 투자"라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좋은(선한) 영원한 투자"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당신을 위해 선한 일을 하였다고 적극적으로 변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그녀의 사치스럽고(?), 사실 무모한 헌신을 복음이 전파되는 한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허비(낭비)라고 부르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는 무엇이라도 당신을 위한 것이라면 낭비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인의 행동이 좋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있던 모든 사람은 귀한 향유의 향기를 맡고 즐길 수 있었지만, 향유 부음은 오직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였지만, 예수님은 동기로 판단하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함이었다고 하지만, 여인은 자신이 한 일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인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은 제자들이 말하거나 행하지 못한 것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큰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그분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위로와 사랑과 관심을 드렸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었기에 이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0:39에 의하면 마리아는 평소에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주의 깊게 경청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시신이 부패하기 전에 향유를 발라 부패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다윗이 예언한 대로, 여인은 예수님께서 썩거나 부패하지 않으실 것을,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으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요(49:9)? 여인은 이것을 알았을까요? 베드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마, 안드레, 나다나엘도 모두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가까이 지낸 시간이 많지 않았고,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듣지도 않았으며, 변화산에 함께 오르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계시와 경배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치에 엎드려 예배할 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베르텔 토르발센(1770~1844), 그리스도 (코펜하겐의 토르발센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에는 폐기된 토르발센의 그리스도 조각상 초안. 사도들을 포함한 전체 세트의 일부임) [Bertel Thorvaldsen (1770–1844), Christ (A then-discarded draft of Thorvaldsen's statue of Christ, located in the Thorvaldsen Museum in Copenhagen. It is part of a full set including the Apostles.)]

 

베르텔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그리스도상(Christus)'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토르발센 박물관, 루터교 대성당인 프루에 키르케(Vor Frue Kirke) 등 전세계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걸작입니다. 토르발센은 예수님이 양팔을 벌려 세상을 품는 자애로운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세 때문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며, 몸을 낮추어 그분의 발치에 앉거나 무릎을 꿇어야만 평온한 예수님의 표정을 마주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조각상 옆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그분의 발치에 앉으십시오." 이 조각상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메시지를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아름다움 덕분에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의 템플 스퀘어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 복제품이 세워져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19세기 신고전주의 조각의 정수로 불리며, 신성함과 인간미를 동시에 갖춘 가장 위대한 종교 조각상 중 하나로 꼽힙니다. 토르발센은 서 있는 자세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조각했습니다. 겸손하게 그분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분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혹은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발치에 앉아 본 것이 얼마나 되었는가?” 우리가 겸손히 예수님 발치에 엎드려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인처럼 시간을 내어 그분의 발치에 앉아 있으면 놀라운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39에서 의하면, 마리아는 평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 듣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치에서, 즉 예수님 가까이에서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그에 합당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유를 발랐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분의 영원한 죄사함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넘쳐올 것입니다. 그 발치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리고 무모하게(?) 보배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왕국에 대한 관념에 사로잡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믿음의 눈으로 보고 상황을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자신의 사랑과 충성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비록 여인이 자신이 한 일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녀의 행동은 제자들이 말하거나 행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큰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그분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사랑과 관심을 드렸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치에 있었기 때문에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자신을 위해 장례를 위한 향유를 부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다가 그 큰 심판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6:7-9; 딤전 5:25; 14:13; 2:1, 19; 3:8 참조).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며 아낌없이 드린 이름 없는 여인과, 하나님의 아들을 배신하며 최악의 행동을 한 유다라는 남자가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기억을 영원히 아름답게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에 대해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14:21) 말씀하셨습니다.

 

! 우리는 얼마나 이 여인처럼 되고 싶어 하는지요? 하지만 거울을 볼 때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드린 여인이 아닌 유다가 내 앞에 나타나는지요! 오직 우리 주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이 죄 많고 병든 영혼을 치유하십니다. 내가 오직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꺼져가는 심령이 살아나고, 기쁨이 충만하게 살아납니다. 예수님 발치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다가 배반하다(14:10-11; 22:3-6)

14 그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Judas Iscariot)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리포 메미(이탈리아, 1291-1356).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김, c. 1340. 프레스코. 이탈리아 산지미냐노 산타마리아 아순타 대학. [Lippo Memi (Italian, 1291-1356). Bargain of Judas, c. 1340. Fresco. Collegiate Santa Maria Assunta, San Gimignano, Italy]
리포 메미(이탈리아, 1291-1356).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김(상세 묘사), c. 1340. 프레스코. 이탈리아 산지미냐노 산타마리아 아순타 대학. [Lippo Memi (Italian, 1291-1356). Bargain of Judas(in Detail), c. 1340. Fresco. Collegiate Santa Maria Assunta, San Gimignano, Italy]

 

조토 (이탈리아, 1267-1337).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김, 1305년경 작품,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Giotto (Italian 1267-1337). Bargain of Judas, circa 1305. Scrovegni Chapel, Padua, Italy]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1255/60-1318/19),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토스카나 지방 시에나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김, 14세기 고딕 양식과 시에나 학파의 화풍 [Duccio di Buoninsegna(1255/60- 1318/19), Italian painter active in Siena, Tuscany, in the late 13th and early 14th century. Bargain of Jadas, Painting style of Trecento Gothic style and the Sienese school.]

 

크리스토퍼 윌리엄스, 가룟 유다 - 그리고 밤이었다, 애버리스트위스 대학교 미술관 및 박물관 [Christopher Williams, Judas the Iscariot – And It Was Night, Location: Aberystwyth University, Art Gallery]and Museum

요한복음에서 유다가 예수를 판 후 밖에 나가니 밖이었다는 말씀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이며, 캄캄한 밤은 곧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가 어둡게 된 유다의 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Judas Iscariot)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그러자 그들이 먼저 그에게 은 삼십을 선불로 달아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예수를 배신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14절의 그때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여인의 편을 들어주었던 사건이 유다의 마음에 큰 불만과 모욕감을 준 것 같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애써 그것을 못 들은 체하며 넘어갔지만, 유다는 메시아의 영광보다는 고난과 죽음을 책하신 것에 실망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말한 내용으로 보고 그의 내면 깊이에 있는 배신의 동기를 추측하기는 어렵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다를 가룟 유다, 즉 이스카리옷(Iscariot) 유다라고 부릅니다. 어떤 주석가는 그가 유대 남부의 케리옷이라는 도시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다른 제자들(모두 갈릴리 출신) 중에서 유일하게 남부 유대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제자들 사이에서 갈릴리 어부 촌놈들이 리더가 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배신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또한 유다는 예수님에게서 영광의 메시아, 보다 정치적이고 정복적인 메시아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편에 서서 자신의 마래를 도모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진정으로 알지 못했고, 또한 자기의 고정관념을 벗고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째든 그가 예수님을 진정한 구세주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배신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가 예수님께서 강력한 메시아로서 존재감을 드러내시도록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진정한 구세주요,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도록 하는 고귀한 희생에 의해 예수님을 부득이하게 배신하였다고 옹호(?)하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한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말씀에 의하면 유다의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나 주저함의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저자들은 한 가지 동기, 즉 마음 깊이에 있는 탐욕을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라는 말에 그의 의도가 그대로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유다에게 은 30을 세어 주었습니다. 은 삼십은 아마 은 삼십 스타테르 즉, 120 데나리온을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베다니의 이름 모를 여인, 또는 마리아가 드린 향유의 값인 300 데나리온(14:5; 12:5)보다도 못한 금액이었습니다. 여인은 300 데나리온짜리 향유를 주님께 아낌없이 드렸으나(허비하였으나?) 가룟 유다는 120 데나리온을 얻기 위해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유다가 고귀한 의도에서 예수님을 팔았다면 절대 돈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동기는 오로지 돈이었습니다. 그것도 은 삼심, 이는 노예 한 사람의 가치(21:31; 요엘 3:3, 6)에 불과한 적은 돈(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큰 돈으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으로 우리 주님을 팔았던 것입니다.

 

---------------************----------------

 

이 땅에서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륫 유다가 받은 은 삼십보다 더 적은 값으로 예수님을 팔고 있습니다. 아니 대가 없어 미소나 조롱만으로도 우리는 언제든 주님을 배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플로타르코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 로물루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 “배신을 제안한 사람은 좋아하지만 배신 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증오한다는 말이 안티고노스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 하다. 카이사르 역시 리미타클레스에게 배신 행위는 좋지만, 배신자는 증오한다고 외쳤다. 때때로 동물의 독이나, 이런 사악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감정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다. 쓸모가 있을 동안에는 사랑하고 아껴주지만,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나면 그 더러운 행위에 증오심을 품는 것이다.”

이는, 내가 하면 선택이지만, 상대방이 하면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예리한 통찰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동정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민족주의자로서 민족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열심당원이요, 휴머니스트로서의 번민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그가 당시 유대 열심당의 핵심 암살단(sicarii)에 소속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암살조직 시카리1세기 40~50년에 조직된 것으로 이 설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 유다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가룟 유다의 경우를 무척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문제는 결코 특별하지 않으며, 우리 일상생활에서 늘 벌어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가룟 유다의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가 이중성 또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장 거룩한 자의 모습과 가장 타락한 자의 모습이 바로 가룟 유다에게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고상하게 보이는 이면에 보이는 추악한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영적, 심리적 현상이기도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나름대로 위대한 구원자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을 통해 고상한 그 무엇을 추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면의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돈을 사랑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 제자 일행의 회계 일을 보면서 일행의 전대(금고, 자금)를 맡았습니다. 아무튼 그가 한 조직의 재무행정을 맡았다는 것은 무척 총명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처음부터 배반할 사람인 것을 아셨지만, 편견 없이 그의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맡은 전대에 욕심이 있었습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표시로서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 제자들은 (특히 유다는) 그 비싼 향유를 허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분개하였습니다(26:8-9; 12:4). 그러나 그의 본심은 그 돈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고상한 믿음의 세계에 살면서도 한편으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손해 보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또한 세상의 가치관대로, 자기 정욕대로 행하기 일쑤입니다. 자존심 상한다고 주변 사람에게 상처 주기도 합니다. 음란한 생각을 은근히 즐기기도 합니다. 나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화풀이하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 또는 자식들 앞에서 풀어진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 또는 자녀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진정 훌륭한 사람이라는 명언까지 있잖습니까?)

 

이러한 양면성 또는 이중성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늘 회개하며 자신을 복종시킬 때만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가룟 유다처럼 양면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예수님을 새벽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 앞에 겸손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그럴 때는 그는 모든 죄 사함을 받고 결국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둘째, 가룟 유다는 세상과의 양다리를 걸치다가 결국은 자신의 길로 돌아갔습니다. 사도행전 1: 25절에서는 말합니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유다는 늘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습니다. 그의 이중성은 바로 한쪽 발은 세상에 깊이 담그고, 다른 한쪽 발은 예수님께 살짝 담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헌신과 열정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견되는 것은 배신뿐입니다. 처음 언급한 플루타르코스의 말처럼 자신의 길을 가면서 자기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은 선택이라는 말뿐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온몸과 마음을 드려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 말씀과 기도, 그리고 봉사에 헌신하고 몰입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세상과 예수님께 동시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때 내면은 늘 갈등하고, 행복이 없습니다. 돈을 헌금 또는 구제로 드릴 것인가 아니면 그걸로 내 입과 몸을 즐겁게 할 것인가? 옆의 사람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인가 아니면 귀찮게 사람들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방관자로 살 것인가? 주일에 교회에 갈 것인가 아니면 새벽 골프를 갈 것인가? 여름에 교회 수련회를 갈 것인가 아니면 친구들과 해외 여행을 갈 것인가? 마음은 늘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셋째, 우리는 삶의 선택은 늘 사탄의 유혹과 공격 때문에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삶의 여정 가운데 일어나는 영적 싸움인지, 나의 죄로 인한 과오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탄의 활동은 강력합니다. 누가복음 22:3절에서는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3:27에서는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빵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탄을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사탄의 능력이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뛰어넘거나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회개치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내버려두시면 그 사람은 반드시 사탄의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바로 살려면 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늘 자신을 살피고,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지 않으면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이나 거침이 되는 일들, 사람들의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들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에스겔 22:25 그 가운데에서 선지자들의 반역함이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를 그 가운데에 많게 하였으며

베드로전서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사탄, 마귀는 상상 속의 존재도 아니고, 늘 우리 삶 가까이에서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웅크려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우리가 영적으로 밝지 못하면 언제든지 사탄의 올무, 구덩이에 발뿐 아니라 온몸이 빠질 수 있습니다. 날마다 매시간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지 않으면 무심코 사자 밥이 되듯 사탄에게 삼켜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늘 우리가 깨어있도록 권면(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6:41; 마가복음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가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있다고 해서 언제나 사탄, 마귀를 이기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깨어있어서 우리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가룟 유다는 현실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고뇌하고 번민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보다 세상에 더 깊이 발을 담갔기에 세상을 택하였고,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는 죄의식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두 개의 선이 처음에는 약간의 차이가 나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것처럼 처음의 조그마한 선택이 일생을 좌우합니다.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영적인 것이냐 세상적인 것이냐? 이러한 것은 늘 내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성이 강하여 세상의 것을 택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내면에 이중적인 법, 즉 하나님의 법과 육신의 법이 충돌하는 것에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결국 일생을 하나님께 드렸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의 내면에는 가룟 유다의 속성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가시나무새처럼 내겐 내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단 한 가지 분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 같은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은혜 하나 붙들고 오늘도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댓글